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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2014년 봄호
한국사회에서 지젝의 위험한 철학?
김정한
1. 한국사회에서 공산주의를 말한다는 것
작년 가을 지젝이 바디우와 함께 진행한 ‘공산주의 이념 서울 컨퍼런스’는 많은 화제를 남겼다. 런던(2009), 베를린(2010), 뉴욕(2011)에 이어 공산주의 이념 컨퍼런스의 네 번째 개최지가 서울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지만, 최근 한국사회의 인문학 열풍과 맞물려서인지 지젝의 대중 강연에는 1만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이재원, 「철학은 있었지만 철학적 사건은 없었다」, ≪중앙문화≫ 65호, 2013년 11월.] 개인적으로 컨퍼런스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케이블 채널로 지젝의 강연을 시청할 수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강연을 듣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지젝의 말들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맑스, 헤겔, 라캉을 종합적으로 사숙한 지젝의 논리와 개념들은, 맑스는 그렇다고 쳐도 헤겔과 라캉의 주요 저서들이 거의 번역되어 있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비전문가가 편리하게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케이블 방송에서는 강연 도중 낯선 용어와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에 관한 간단한 소개를 자막과 자료 화면으로 친절하게 제공해주었지만 몇몇 개념들을 우리말로 잘못 옮기는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이 컨퍼런스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는 지젝에게서 어떤 것을 기대했고 또 무엇을 발견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컨퍼런스의 주제가 일반적인 철학이나 인문학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잔존해 있는 한국사회에서, 더구나 작년 8월 말 이석기 국회의원 등이 내란음모 혐의로 검찰에 체포, 구속되어 있는 상황에서 세계적인 철학자가 한국에 와서 공산주의 이념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박근혜 정부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는 근본 문제를 정치 의제로 만들어 반대파들을 무력화하는 통치 전략을 펼치는 마당에 컨퍼런스를 주관한 관계자들도 당혹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1919년 3․1운동의 효과로 1920년대에 한국사회에 널리 수용되기 시작했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상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결합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해방 이후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분단국가로 형성된 남한에서 다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얼마간 자율적인 정치적 공간을 겨우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1980년 5․18 광주항쟁의 ‘사후효과’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피하게 소련이나 북한의 교조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 오염된 사상이었고, 그마저도 1989-90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더불어 그 이념적 좌표는 결정적으로 흐릿해졌다. 한국사회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에는 한국전쟁 시기 좌우 학살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고, 1980년대 반역의 시대를 이끌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라는 이미지가 덧붙여 있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사회에서 공산주의는 너무 무거운 용어이다.
반면에 늘 농담을 곁들여 논리적 반전의 묘미를 선사하는 지젝에게 공산주의는 우선 가볍다.
제게 코뮤니즘 사회란 모든 사람이 각자의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가도 되는 그런 사회입니다. 누구에게서 이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아세요? 프레드릭 제임슨이 코뮤니즘을 완전히 정상적인 사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피테르 브뤼헐의 그림 「네덜란드 속담」에서 볼 수 있는 정신이 이상한 사회로 생각한들 어떠냐고 말한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있지요. 자신이 닭이라 생각해 닭처럼 꼬꼬댁 거리며 걸어 다니는 남자도 있고, 자신이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점잖게 공존하는 것, 멋지지 않나요?[제이슨 바커, 은혜․정남영 옮김, ≪맑스 재장전≫, 난장, 2013, 100쪽.]
Pieter Brughel, The Dutch Proverbs (1559)
이를테면 그에게 공산주의는 각자가 어리석음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도 공존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래도 별반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잘 굴러가는 사회이다. 자본주의에서라면 어리석은 자들(특히 정치적 대표자들)로 인해 사회 체계가 금방 말썽이 나거나, 정신이 이상한 자들이 공적 영역에서 손쉽게 배제되거나 할 것이다. 컨퍼런스의 제목이 ‘멈춰라, 생각하라’였던 것처럼, 지젝은 항상 ‘삐딱하게 보기’, ‘다르게 생각하기’를 즐겁게 권유한다. 그러나 지젝의 공산주의론이 과연 어떤 이론적, 실천적 함의를 갖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2. 급진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한때 지젝이 라클라우의 지적 동료로서 포스트맑스주의의 급진민주주의 전략을 수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00년을 전후로 급진민주주의 전략을 분명하게 거부하면서 라클라우와도 신랄한 논쟁 끝에 결별하기에 이른다.[자세한 내용은 김정한, 「알튀세르와 포스트맑스주의: 라클라우와 지젝의 논쟁」,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참조.] 지젝이 초기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적 태도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스스로 밝히는 그 이유는 라캉적 헤겔 독해가 불분명했다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제2판 서문: 오직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향락」, 박정수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 이런 자기 수정을 통해 지젝이 다시금 강조하는 개념이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ity)이다. 간단히 특수성과 보편성의 과잉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구체적 보편성은,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특수성)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전체 요소들의 영역 자체를 규정한다(보편성).
라클라우의 급진민주주의 전략은 계급, 성, 인종, 생태 등등이 각각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의 특수한 요소로서 서로 등가적인 관계에 있으며, 어떤 요소이든 헤게모니적인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비어 있는 보편성을 자리를 점유할 수 있다는 논리를 바탕에 두고 있다. 하지만 지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투쟁은 다른 요소들과 달리 구체적 보편성으로 기능한다고 반박한다. 계급투쟁은 헤게모니적 실천에 참여하는 하나의 특수한 요소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요소들의 헤게모니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영역 자체를 구성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예외라는 것이다.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듯이 민주주의의 보편적 규칙에서 배제되는 예외는 계급투쟁이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다른 모든 투쟁들의 궁극적 참조항이거나 의미 지평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투쟁이 여타의 적대들이 ‘등가연쇄’로 절합될 수 있는 상이한 방식들의 ‘비일관적인’ 복수성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구조화 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슬라보예 지젝, 박대진․박제철․이성민 옮김,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 도서출판 b, 2004, 132-133쪽.]
이와 같이 지젝은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의 예외성에 주목해야 하며, 다원적인 민주주의 게임으로는 세계 자본주의를 변혁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오늘날 대표적인 사회적 환상 가운데 하나이다. 즉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권력의 장소가 비어 있고, 이 비어 있는 장소는 자유롭고 공정한 경합(agonism)을 통해 누구든 점유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권력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이다. 이런 거짓된 개방성은 자본주의를 변혁하기는커녕 용인하는 데 기여한다. 물론 라클라우는 이런 논리가 먼 옛날의 ‘계급투쟁 본질주의’(또는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 결정론)로 회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지만, 지젝은 라클라우와 결별하면서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그는 어떤 혁명적 시도도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할 것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협박에 맞서서 레닌을 반복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하고 재장전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레닌으로의 변증법적 회귀는 ‘좋았던 옛 혁명기’를 향수 속에서 재현하는 것도,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 귀환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더 정확히는 1914년의 파국으로 진보주의라는 긴 시기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붕괴하고 난 뒤--이라는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의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슬라보예 지젝 외, 「레닌을 반복하기」, ≪레닌 재장전: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마티, 2010, 23쪽.]
3. 혁명과 공산주의
공산주의와 관련해 지젝은 점차 바디우에게 이끌리는데, 바디우는 공산주의를 플라톤적인 이데아로 재정의하고 그것이 정치 영역의 근거를 이루는 영원한 이념이라는 공산주의적 가설을 제기한바 있다.[알랭 바디우, 「사르코지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공산주의적 가설」, ≪뉴레프트리뷰 1≫, 길, 2010 참조.] 지젝은 이 공산주의적 가설을 적극적으로 (그러나 일정하게 수정하면서) 지지한다.
어느 때보다 지금 우리는 바디우가 ‘영원한’ 공산주의 이념 또는 공산주의적 ‘불변항’이라고 부른 것을 고집해야 한다. 그것은 플라톤에서 중세의 천년왕국주의적 반란들을 거쳐 자꼬뱅주의, 레닌주의, 마오주의로 이어지는 가운데 작동하는 ‘네 가지 근본 개념’으로, 곧 엄격한 평등주의적 정의(正義), 처벌적 테러, 정치적 주의주의, 민중에 대한 신뢰다. … 현재의 역사적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 영원한 이념은 끈질기게 존속하는, 패배 이후 매번 다시 귀환하는 하나의 플라톤적 이념으로 작동했다.[슬라보예 지젝, 김성호 옮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49-250쪽.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먼저 지젝은 바디우의 공산주의적 가설을 칸트적인 규제 이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공산주의가 결코 도달할 수 없지만 끊임없이 참조해야 하는 규범이라면 그것은 ‘윤리적 사회주의’에 불과하다. 오히려 공산주의는 적대에 대응하는 한에서 ‘영원한 이념’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이념의 진정한 문제는 역사적 현실에서 적대를 발견하는 데 있다.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는 그것이 무한정 재생산되는 것을 막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적대를 담고 있는가? 그러한 적대에는 네 가지가 있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특히 유전공학에 있어서의)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마지막으로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새로운 장벽(월가)과 빈민가의, 즉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 이 마지막 특징--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로부터 분리하는 간극--과 앞의 세 가지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182쪽)
앞의 세 가지 적대는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하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s)의 상이한 측면들로서, 세계 자본주의는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기 위해 둘러막는(enclosure)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화를 촉진한다. 그러나 하트와 네그리를 비판하면서 지젝은 가장 핵심적인 적대는 네 번째,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의 간극이라고 주장한다. “오직 배제된 자와 관련해서만 공산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이 정당화”되며, “그것 없이는 다른 모든 적대도 전복적 효력을 상실한다.”(195-196쪽)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적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생태학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지적재산권은 법률적 사안으로, 유전자공학은 윤리적 쟁점으로 변할 수 있다. 또한 앞의 세 가지 적대가 인류의 생존의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네 번째 적대는 “궁극적으로 정의의 문제”이다.(197쪽) 요컨대 사회적 배제를 유지한 채로 앞의 세 가지 적대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하다. 더구나 앞의 세 가지 적대에서 프롤레타리아화는 인간 행위자가 자신의 실체적 내용을 박탈당하여 순수 주체(예컨대 호모 사케르)로 영락하는 것이지만, 네 번째 적대에서 프롤레타리아화는 특정 인물들이 사회-정치적 공간에서 배제된다고 하는 형식적 사실이다. 즉 실체를 박탈당한 인간(실체 없는 주체성)의 프롤레타리아적 위치를 사회-정치적 질서에서 직접 체현하는 주체들이 있는 것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말하듯이 사회적 위계 속에 정해진 자리가 없기 때문에 보편성을 직접 표상하는 ‘몫이 없는 부분’이다. 이와 같은 배제된 자와 보편성의 단락(short-circuit)이 모든 해방 정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198-199쪽) 지젝은 앞의 세 가지 적대와 네 번째 적대를 구별하고, 후자가 전자를 규정한다는 의미를 담아 ‘적대의 3+1 구조’라고 표현한다.
지젝에 따르면,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혁명적 열광은 이 ‘몫이 없는 부분’ 및 그것의 독특한 보편성의 입장과의 전면적 연대에 절대적으로 뿌리박고 있다.”(247쪽) 그렇다면 사회 위계에 고유한 자리가 없는 ‘몫이 없는 부분’으로서 보편성을 직접 표상하는 사회 집단은 무엇인가? 지젝은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주요 착취 기제가 세(rent)의 형태로 변화했고, 이는 “노동력의 착취에 의해 생산되는 이윤이 바로 이 ‘일반지성’의 사유화에 의해 전유되는” 형태라고 분석한다.(287쪽). 이런 변화에 따라 생산과정의 세 가지 구성요소(“지적 입안과 마케팅, 물질적 생산, 물질적 자원의 공급”)가 각각 별개의 영역으로 자율화하면서 선진사회에서는 세 가지 주요 계급(또는 분파)이 출현하는데, 지적 노동자, 구래의 육체노동자, 추방자(outcasts, 실업자, 슬럼가 거주민 등)가 그것이다. 노동계급이 세 분파로 분할됨으로써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이 붕괴되고, 각각의 생활방식과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다양한 정체성 정치가 등장한다. 지적 계급은 계몽된 쾌락주의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정체성 정치로, 옛 노동계급은 포퓰리즘적 근본주의(증오의 정치)로, 추방자들은 비합법적 집단화(범죄조직, 종교 분파 등)로 나아가는 것이다.(289쪽) 당연히 이런 분할은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념이 현실의 적대들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한 기획과 관련된 성찰은 불가피하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공산주의는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것은 ‘시장과 국가’라는 틀의 한계를 돌파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 그 해결을 위한 어떠한 신속한 절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과제를 가리키는 이름인 것이다”라고 지적한다.(257쪽) [일찍이 알튀세르는 공산주의를 “상품관계의 부재, 즉 국가 지배와 계급적 착취관계의 부재”로 규정하면서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이런 공산주의적 조직들이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라고 토로한바 있다. 루이 알튀세르, 권은미 옮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매진, 2008, 296-297쪽 참조.] 공산주의는 시장과 국가의 한계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제를 가리키는 문제설정이다. 지젝은 국가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공리를 제시한다.
1) 공산주의적 국가-당 정치의 실패는 무엇보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반국가적 정치의 실패, 국가적 조직 형태를 자기 조직화의 ‘직접적’, 비대의적 형태(‘평의회’)로 대체하려는 노력의 실패다. 2) … 진정한 과제는 국가에 거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비국가적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권력을 위해 투쟁하느냐(이는 우리를 우리가 맞서 싸우는 적과 동일하게 만든다), 아니면 국가에 거리를 둔 입장으로 물러남으로써 저항하느냐’의 양자택일은 허위다. 두 가지 항은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국가형태는 여기에 그대로 있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국가를 탈취하거나 그것에 거리를 취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하는 것, 그것의 기능, 토대에 대한 그것의 관계 등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핵심적 구성 요소가 존재한다.(259-260쪽)
현실 사회주의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그것을 반국가적 정치로 대체하려는 시도 속에서 실패했으며, 문제는 국가권력을 변형하여 국가가 민중 참여에 기초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해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20세기의 트라우마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정치 주체의 자리에 지도자를 위치시키는 오류를 벗어나야 한다. 즉 지도자(또는 당)를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 상정하지 않아야 하며, 지도자(또는 당)와 지식의 특권화된 관계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더 나아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데 있어서 고대 민주주의에서 유래하는, 무기명 투표의 보통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추첨)가 민주적인 유일한 제도라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299쪽)[여기서 지젝은 가라타니 고진을 인용하는데, 고진은 어소시에이션(연합)에서도 대의제나 관료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은 전원 참가하는 의회가 아니라 행정 권력의 제한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 방법이 제비뽑기이다. 행정 관리를 제비뽑기로 선출하고 탄핵재판소를 통해 통제함으로써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익명 투표에 의한 보통선거, 즉 의회제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독재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추첨제야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옮김, ≪트랜스크리틱: 칸트와 마르크스를 넘어서기≫, 한길사, 2005, 310쪽.]
물론 이상과 같이 윤곽을 그리고 있는 오늘날의 공산주의 이념이 어떤 역사적 정세와 마주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지젝은 낙관적이지 않다. 역사는 우리 편이 아니며, 오히려 파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젝은 역설적으로 순수한 주의주의를 요청한다.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순수한 주의주의, 다시 말해 역사적 필연을 거슬러 행동하려는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이다.”(303) 이를 가리키는 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우리다”라는 슬로건이다. 과거의 혁명 또는 맑스주의의 문제는 혁명적 주체로서 노동계급의 실패에 놓여 있었지만, 새로운 혁명적 행위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3. 지젝의 철학은 어떻게 위험해지는가?
바디우의 공산주의적 가설에 기대어 지젝이 제시한 공산주의 이념의 여러 쟁점들은 매우 독창적이거나 전혀 새롭지는 않다. 사실 이 정도의 이야기들은 이미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서도 예컨대 ‘맑스 코뮤날레’ 등을 통해 여러 차례 토론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다양한 현대 철학자들을 비판하며 논리를 정교하게 다듬는 지젝의 논변이 더 세련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공산주의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젝의 공헌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곳곳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찬가가 일방적으로 울려 퍼지고 반(反)자본주의적인 대안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고금지’의 시대에 공산주의를 본격적인 토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새로운 사유를 촉구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영원한 공산주의 이념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은, 앞서 인용했듯이, “엄격한 평등주의적 정의(正義), 처벌적 테러, 정치적 주의주의, 민중에 대한 신뢰”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처벌적 테러’와 ‘정치적 주의주의’이다. 먼저, ‘처벌적 테러’와 관련하여, 지젝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을 인용하면서 빈민들의 약탈과 방화, 경찰 끄나풀에 대한 가해 등을 혁명적인 행위로 제시하여 ‘대항폭력의 경계와 유효성’을 둘러싼 논란을 자초한바 있다.[슬라보예 지젝,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2011; 「민주주의에서 신적 폭력으로」, 김상운․양창렬 옮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난장, 2010; 김정한, 「폭력과 저항」,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3 참조.] 물론 최근의 인터뷰에서는 ‘방어적 폭력’이나 ‘시민불복종’으로 다시 개념화하고는 있지만, 처벌적 테러를 공산주의 이념의 근본 개념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다. [“저는 알랭 바디우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는 우리 좌파가 20세기로부터 국가권력의 무시무시함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지요. 진보적인 좌파의 폭력에 대한 대응은 ‘방어적 폭력’입니다. 이는 ‘우리가 광장을 점거한다. 당신들이 공격할 경우에 우리는 대응할 것이다’라는 식의 폭력인 것이죠. 공격적인 폭력이 아닙니다. … 제가 유일하게 옹호하는 폭력이란 테러리스트의 폭력이 존재하거나 독재적인 정권과도 같은 상황에서, 다소 급진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시민불복종의 형태를 띠는 것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인디고연구소 기획,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궁리, 170-172쪽.]다음, ‘정치적 주의주의’와 관련하여, 그것이 개인적인 영웅적 결단이 아니라면 여기에는 단결 내지 연대의 문제설정이 결합되어야 하는데, 이는 결국 조직 형태라는 쟁점으로 수렴한다. 이에 대한 지젝의 답변은 임상치료에서 정신분석가처럼 기능하는 정당이지만(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의 권위가 아니라, 지식의 형식에 의한 권위를 갖고서 하나의 정치적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정세를 해석하고 대표하는), 이는 알튀세르가 지적한바 있듯이 공산주의적 실천에서 정당이 부르주아 국가장치 및 군사기구를 모방한 것이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그린비, 2008, 306-308쪽; 조형준 옮김, 라캉 카페≫, 새물결, 2013, 1749-1750쪽; 루이 알튀세르, 이진경 옮김,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새길, 1992 참조.] 어쩌면 정당 형태야말로 공산주의 이념을 새롭게 사고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쟁점일 수도 있을텐데, 지젝은 이 지점에서만큼은 새로운 공산주의적인 조직적 실천을 고민하기보다는 고전적 맑스주의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지젝의 철학은 어떻게 위험한 것이, 또는 위험하지 않은 것이 될 것인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젝이 한국사회에서 영화와 문학 평론을 중심으로 대중문화 비평가로 매력적이었던 까닭은, 다면적인 차원의 지식과 정보를 활용해 감히 물어보지 못한 질문들을 던지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포스트모던한 ‘이론의 빈곤’에 도달했다고 여겨진 시대에 신선한 지적 자극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이후 정치철학과 사회과학에서 널리 인용되었던 까닭은, 맑스와 라캉을 결합해 프로이트맑스주의를 재발명함으로써 이데올로기 비판의 문제의식을 확장시키고 현대를 살아가는 냉소적 주체의 문제를 정확하게 집어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에서도 지적한바 있듯이, 지젝이 시도한 수많은 사유의 반란은 세계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의 전망이 불투명한 시대에 한국사회에도 지적인 활력을 불어넣고 희망과 대안을 찾는 급진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김정한, 「슬라보예 지젝, 사유의 반란」, ≪실천문학≫ 103호(가을호), 2011.] 아마 지젝은 21세기 초에 어떤 의미에서든 가장 성공한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성공은 대개 그림자를 드리운다. 예컨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전지구적 행동 단체들에게 대기업이나 (초)국가기관이 자금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자신을 파괴하려는 반자본주의 운동에 자금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자신에 대한 저항조차 상품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로버트 J. C. 영, 김용규 옮김,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현암사, 2013, 194-195쪽.] 공산주의 이념과 실천을 과감하게 요청하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다시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모든 것을 다시 사유하자’고 하는 열정적인 외침은, 언제부터인가 ‘공산주의자’라기보다 ‘세계적인 명사’(celebrity)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공산주의에 관한 한, 지젝의 사유는 본연의 경쾌하고 탁월한 논리가 퇴색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아마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든 이윤만 남길 수 있다면 공산주의까지도 상품화할 수 있는 체제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출처: https://emptypaper.tistory.com/5 [empty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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