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81년 루뱅 강의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의 강의정황 (2/3)

미셸 푸코,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 1981년 루뱅강의

강의정황


파비엔 브리옹(Fabienne Brion) & 베르나르 E. 아르쿠르(Bernard Harcourt)



II. 인식과 그 주체

 그러니까 고백이다. 푸코의 작업에서 고백의 기능은 어떤 것일까? 간결하게 대답하자. 그것은 경첩, 논문 「주체와 권력」에서 푸코가 자기 작업의 두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경첩이다. 즉, “‘분할하는 실천’ … 에 있어서 주체의 객체화”,1) “주체를 객체로 만드는” 과정의 연구와, “인간 존재가 주체로 변형하는 방식”2)인 주체화 과정의 연구 사이의 경첩이다. 이것을 전개하면, 두 계열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대상의 계열에는 ‘객체적’3) 분할, 지배의 테크닉의 계열이 있고, 주체의 계열에는 주체적 분할, 자기의 테크닉이 계열이 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예속화assujettissement를 한편으로는 객체적 날조forçage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주체적 재건reprise subjective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이 재건 탓에 예종servitude이 자발적이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예종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재건의 술책[속임수]leurre에서 이탈의 요청으로, 유순함에서 숙고에 기반한 비유순함indocilité réfléchie으로, 예종에서 자발적 비예종으로 이행하는 문이 열린다.


요구사항이 많아 까다로운 임무

객체와 주체를 분절시키는 것. ―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인식에 있어서 이것들의 분절을 문제화하는 것. 푸코가 “인식형태”4)와 “‘주체-대상’ 규범”5)이라고 부르는 것을 동시에 심문하는 것. ― 이것은 [1961년의 박사부논문인] 「칸트의 『인간학』에 대한 서문」 이후, 푸코가 끈기있게 뒤쫓았던 기획인 것만은 아니다. 억압의 저편에 있는 철학적 전통과 과학의 담론을 비판한 것에서 나오는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려움도 따라다닌다. 계보학자〔푸코〕가 밝히려는 것이 ‘정신질환자’나 ‘범죄자’의 역사성일 뿐 아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인식 주체의 역사성이기도 하다면, 철학적 장과 과학적 장에 있어서 그 저항(réluctance)도 셈에 넣어야 한다. 1973년의 「진리와 사법적 형태들」에서 말하듯이, 정신분석의 실천과 이론은 분명히 “서양적 사유에서 수립된, 주체에 거의 신성시될 정도로 부여된 우선성을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재평가”했다.6) 그래도 “인식의 이론 … 의 영역에서, 혹은 인식론épistémologie의 역사의 영역에서, 혹은 과학사의 영역에서, 혹은 여전히 사상사의 영역에서”7) 주체가 이해되는 방식은 “여전히 매우 철학적이고, 매우 데카르트적이며 매우 칸트적이다”8)(푸코는 여기서 “내가 스스로 위치하는 일반성의 수준에서 나는 데카르트적 개념화와 칸트적 개념화를 분간하지 않는다”9)고 명확하게 말한다). 더욱이 “대학이나 학계의 맑스주의의 어떤 전통은, 이런 전통적인 철학적 개념화와 아직 관계를 끝맺지 못했다….”10) 즉, 10년 정도 지난 후에 푸코가 그렇게 회상하듯이, 그는 애초부터, 주체의 이론을 재정교화한다는 임무에 골몰한 것이다.

 요구사항이 많아 까다로운 임무이다. “주체가 진리와 맺는 관계, 혹은 단순하게는 인식의 관계는 실존의 조건에 의해 교란되고 흐릿해지고 흐리멍텅해져 있다”11)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원래 이 주장은 전통적 맑스주의의 분석에서는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일종의 부정적 요소”12)로서 번역됐다. “자신이 믿고 있는 관념을 자유롭게 형성하거나 자유롭게 승인하는 곳인 의식을 갖춘 주체”13)라는 통념은 “완벽하게 이데올로기적인 … 장치dispositif14)라고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주장하고, 개인들과 이들의 실존 조건 사이의 상상적 관계의 이런 양태는 인식의 주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낙인이라고 (알튀세르에게서 연역되듯이) 주장하더라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이데올로기를 말한다는 것은, 인식에 선행하여, 주체와 객체가 존재하며, 이것들 사이에는 제거할 수 있는 장막이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허위의식과는 별도로, 또 다른 의식이 있는데, 이것의 작업은 진리에 열려 있으며,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리를 해방하는 작업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가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은 “실존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은 인식의 주체에게 장막이나 장애물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 인식의 주체들이, 따라서 진리의 관계들이 형성되는 바로 그것”15)이라는 것이다. 니체로의 회귀 ― 진리에 덧붙여, 과학의 담론이 전제하는 주체의 역사를 기술하고, 의식이라고 하는 사건의 계보학을 구축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무의식은 영원하다”는 프로이트를 따라, 이데올로기 일반은 영원하다고 말하면서, 두 개의 명제 사이에는 “이론적인 상호 접근을 부과하는 유기적인 연결”16)이 있다고 말하는 알튀세르에 맞서) 주체를 만들고 분할하는 것의 역사성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문제는 주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망각하고 있는 것의 역사성이며, 달리 말하면, 의식되고 있는 것과 무의식적인 것의 역사성이다.

 이 미끄러지기 쉬운 땅 위를 푸코는 천천히 나아간다. “인식의 뿌리에 있는 것은 의식이 아니다”17)라고 푸코는 「니체에 관한 강의」[1971년 3월]에서 말했다. 거기에 있는 것은 힘의 의지이며, 이것은 “실체, 이해 가능한 본질, 자연, 창조 등의 형태 하에서”18) 대상에 다시 돌려진다. 이런 의지에서 주체 ― “왜곡déformations원근법perspectives의 시스템”19)이자 “지배의 원리”20)이며, 대상을 “자신의 동일성과 현실성réalité의 표식”21)으로 받아들이는 것 ― 는 출현한다. 분명히 철학적 전통에 있어서, 인식의 관계는 “진리를 위해 빈 장소가 아닌 모든 것”,22) 즉 “개인적 성격, 욕망, 폭력의 모든 것”23)을 의지가 스스로 지워버린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니체의 가르침은, 인식에 있어서 의지와 진리의 관계가 자유(진리의 자유와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폭력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다. 푸코의 니체 독해가 가르치는 것은, “인식하다의 폭력에는 인식활동이 실현하는effectuer 동시에 전개할 것인 불변적, 본질적, 서곡적préalable 관계”24)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인식하는 활동을 정초하게 되는 ‘주체-대상’의 관계는 실제로 인식활동의 ‘산물’25)이며, ‘첫 번째 환영illusion26)이다. “아프리오리, 객관성, 순수인식, 구성적 주체 같은 그 모든 파생물”27)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철학적 전통과 과학적 담론의 주체에 동일시되는 사람들에게 (『정신의학의 권력』에서 논한, 파스퇴르가 의사들에게 끼친 충격에 관한 푸코의 언급을 바꿔 말한다면) “가공할 만한 나르시시즘적 상처”28)이다. 주체가 인식되는 방식은, 그들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의식’의 대행자agents29)이기를 꿈꾸는 지식인들은 이 꿈의 주체가 “인식이라고 하는 지식-권력의 형태”30)의 착각효과의 대열로 폄하되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힘겨워한다. 데카르트를 본 따서 명증성에 매달린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저항 없이 굴복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그들의 확신을 날려 보내기 위해 푸코가 휘두른 첫 번째 무기는 용어법을 정확히 하는 것이다. 그는 매우 빠르고도 신경을 써서 “어휘를 고정한다.”31) “인식”이란 “욕망과 지식에 전제적[서곡적] 통일성, 상호 귀속, 공통의 본성conaturalité을 부여할 수 있는 믿기 어려운 fabuleux 시스템”32)을 가리킨다. “지식”이란 “인식의 내부로부터 탈취하여arracher 거기에 의지의 대상, 욕망의 목적, 지배의 도구, 투쟁의 쟁점enjeu을 다시 찾아내야 하는 것”33)이다. 그러나 용어를 이렇게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필요하기는 해도 충분하지는 않다. 말할 뿐만 아니라 행해야 한다. 인식으로부터, 힘의 의지와 (주체의 의지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그 대상 사이의 경합(agôn)의 흔적을 탈취해야 한다. 주체의 물음을 제기하기 위해, 푸코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의 테마들 중 하나를 다시 거론한다. 이항구조로 이루어진 ‘시련-진리vérité-épreuve’, 삼항구조로 이루어진 ‘사실확인-진리vérité-constat’의 테마이다.

 1974년, 푸코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의학, 정신의학, 형사사법justice pénale, 범죄학은 인식의 규범을 통한 진리의 표명manifestation과 시련의 형태를 통한 진리의 생산 사이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다. 후자의 진리는 전자의 진리 아래에 항상 은신해 있으며, 그것에 의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한다.”34) 정신의학의 예에서 출발해 그는 파스퇴르의 병원에서 희미해지기를 그치지 않는 진리의 생산 기능이 어떻게 해서 이와는 반대로 19세기의 정신의학 병원에서 비대해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곳은 “진단과 분류의 장소”35)이지만, 이와 비슷한 정도로 “설전을 벌이는 장소이며, 승리와 복종soumission이 문제가 되는 제도적 장”36)이다. 이어서 푸코는 자신이 설정한 무대 위에 샤르코를 등장시킨다.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주인인 샤르코는 “의학적 지식-권력의 요구를 받아들여”37) 현상들(혼수상태와 긴장성 분열증 … )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히스테리를 어떻게 과학에 대한 대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지를 보게 해준다. 또한, 질병학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권력관계가 어떻게 피암시성suggestibilité(“히스테리의 최고 미덕, 비할 데 없는 유순함, 진정한 인식론적 신성함”38))이라는 특수한 징후적 특질 속으로 사라지는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구성된 대상에 의해, 인식의 순수 주체라는 신분이 샤르코에게 어떻게 수여되는가이기도 하다.

 『감시와 처벌』에서는 형사사법과 범죄학이 새롭게 다시 다뤄진다. 그것은 반복이지만, 범죄자와 억압의 관계는 대상과 인식의 관계에 등치되어 있으며, 억압은 빙산의 보이는 부분일 뿐이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다. 푸코의 강의를 듣고 읽은 사람들은 “분할적 실천”에 관한 분석에 바쳐진 작업으로부터 지식-권력 개념을 끄집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자주 “인식이라고 하는 특이한 형태의 지식-권력”39)이 탄생시키는 주체를 잊어버린다. 푸코가 연구한 인물들 중에서도 그들은 “분할적 실천”이 타자들로부터 분리시킨 사람들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소홀히 한다. 즉, 푸코가 『라스 메니나스』를 평하면서 이야기한 것인데,40) 그림 안쪽에 매달린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는 재현의 주체와 관람자들les représente을 재현하는 동시에 주권적 주체의 반영된 모습le reflet을 재현한다. 식별(discernement)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 인식의 차원에서는, 판별(discrimen)과 범죄(crimen)가, “분할적 실천들”이 객체화하는 주체들을 여백으로 물러나게 억압refouler하면서, 또한 주체적 분할의 물음까지도 억압하는 것인 양 모든 것이 이뤄진다. 정신질환자나 범죄자의 계보학은 전이transfert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푸코가 철학적 전통의 주체와 과학의 담론의 주체(코기토, 재현의 주체, 의식, 혹은 어떤 양태이든)를 조준할 때, 전이는 저항으로 변형된다.


망설임

어려운 점이 있다. 형사사법의 위기 또는 범죄학의 위기, 정신의학의 위기 ― 즉, 범죄(crimen)와 판별(discrimen)을 자신의 전문분야로 삼는 ‘분과학문’의 위기 ― 가, “인식의 장에서 이런 분과학문들의 한계나 불확실성을 의문에 부친다”41)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어떤 철학자한테는 너무도 손쉽다. 이런 위기가 더 나아가 “인식을, 인식의 형태를, ‘주체-대상’의 규범을 의문에 부친다”42)〔이 철학자가〕 받아들일지 어떨지가 된다면, 틀림없이 난이도는 올라가겠지만, 아무튼 이건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분과학문들”이 분리해버린 대상에서부터, 분할된 주체로 나아가게〔초점을 옮기게〕 되면 어떨까! 철학과 과학의 주체에 관해, 그 통일성을 의문에 부치는 것. 인식의 주체에 있어서, 주체에게 버거운 욕망을 명백히 하는 것. 철학적 전통과 과학의 담론에 있어서 “욕망의 주체와 인식의 주체가 하나일 뿐이다”43)는 것은, “욕망이 그 효력efficace과 더불어 사라지기44) 때문임을 ―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 보여주는 것…. 파레르레시아스트[파르레시아를 실천하는 자]인 푸코에게 ― 푸코는 파르레시아(parrêsia)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부터 이를 실천했다 ―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주체와 그의 분열schize을, 그리고 이것들의 비가시성을, 그리고 이것들의 비가시성의 비가시성을 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도전이 ― 진리의 용기라는 게임의 규칙이 그렇다 ― 푸코에게 귀를 기울이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에게도 던져졌다. 즉, 방어기제를 구사해서 자신이 무엇을 보호하고 있는가를 다시 묻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인식이라는 형식을 넘어서서, 자신의 향락을 의문에 부치는 것을 흔쾌히 승낙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큰 상처. 만만치 않은 도전. 푸코는 작업을 여러 차례 수정한다. 『감시와 처벌』에서 1년 후인 1976년에, 『성의 역사』 1권이 출판된다. 주체의 물음을 다시 던지기 위해서일까? 『성과 진리(Sexe et vérité)』45)라는 제목이 어떨까 생각하다가 푸코는 『지식의 의지』를 고른다. 1970-1971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이미 사용됐던 제목이다. 8년 후의 『쾌락의 활용』의 서문에 적혀 있듯이, “당시는 욕망 또는 욕망하는 주체라는 통념이 하나의 이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널리 받아들여진 이론적 주제를 구성했다.”46) 그는 주권적 주체를 “사건화하기”47) 위해서 자신의 동시대인들의 갑옷에 이 약점을 투자〔투여〕한다. 거기에서 제시된 기획은 “근대의 서양사회에서 〔지금은〕 친숙하지만 19세기 초 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통념인 ‘섹슈얼리티’의 ‘경험’으로서 어떤 것이 스스로를 구성하는 방식을 파악한다”는 것이다.48) 그는 욕망 또는 욕망하는 주체의 계보학을 쓸 생각이었다. 다만 1984년에 명확히 말했듯이, 그것은 “욕망, 색욕concupiscence, 리비도 같은 잇달아 생겨난 개념화의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판독하도록 하고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하며 고백하도록 만드는, 더 나아가 개개인들이 자신들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그것에 의해 자신의 존재의 진리를 ― 자연적 존재이든 타락한 존재이든 ― 욕망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실천들을 분석하는 것”이다.49)

 이 책의 중심은 “<성의 과학(Scientia Sexualis)>”이라는 제목의 장이다. 거기에서 푸코는 우선 사실확인-진리의 모티프와 시련-진리의 모티프를 분리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내내 성(sexe)은 두 개의 변별적인 지식의 등록부에 기입됐다. 생식의 생물학과 성의 의학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실제의 거래는 전혀 없었고, 상호적 구조화도 없었다. 전자는 후자와 관련해 먼 거리의, 그리고 완전히 허구적인 보증[증명]의 역할밖에는 맡지 않았다.”50) 이어서 시련-진리에 관해 푸코는, 보기와 듣기의 거부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 거부는 “명확하게 세상에 내놓거나 혹은 정식화가 긴급하게 요구되는 바로 그것”51)에 대한 거부이다. 여전히 샤르코의 차례이다. 그는 막대기를 환자의 자궁 위에 대고,52) 히스테리성 위축contracture hystérique을 나타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러나 G라는 여성 환자가 “그 어떤 은유도 담고 있지 않는 말로, 성기인 막대기bâton-sexe를 요구했을”53) 때, 사라진 것은 그녀였다. 조작opération의 결과, 두 개의 새로운 계열(serie)이 생겨나, 낡은 모티프들이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결합된다. 〔첫째〕 사실확인-진리의 계열. 인식의 주체, 그리고 “서양에서 과학적 담론의 제도를 지탱했던 지식의 거대한 의지”54)의 계열이다. 〔둘째〕 시련-진리의 계열. 욕망의 주체와, 그것이 담고 있는 ― 장갑처럼 학자의 담론을 배가시키고, ‘오래된 고지식함’과 ‘철저한 맹목55)을 축재하는 ― “비-지식의 집요한 의지”의 계열이다. 전자의 계열이 ‘생물학’과 ‘생식’의 기표들에 의해 재현된다면, 후자는 ‘의학’과 ‘성’이라는 기표들에 의해 재현된다.

 그러나 푸코는 샤르코가 욕망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주인인 샤르코가 열정을 갖고 행사한 의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중에 프로이트가 간파했던 대로, 섹스이다. 그렇지만 물론, 샤르코는 생식의 생물학에도 통달했다. 조작manipulations을 할 때,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참조한다(막대기를 G양의 자궁 위에 댄다). 이것은 은유일까? 분석의 목적에는 구별된 계열들이 서로 겹쳐져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까? 이것이 사르코의 실천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샤르코와 G양의 관계는 〔우선은〕 인식의 관계이다. 이런 인식에 의해 관계하는 두 개의 항은 각각 d/S와 d/O로 기입할 수 있다. 아니 Hd/Sc와 Fd/Oc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샤르코는 과학의 담론에 의해 인식의 주체(Sc)로서 호명된 개인이며, 또한 욕망에 의해 움직여지는 남성(Hd)이기도 하다. G양은 인식의 대상(Oc)이다. 동시에 샤르코가 억지로 흡입하게 한 아질산아밀의 증기 속에서 그녀가 기억했듯이, 그녀는 욕망하는 여성(Fd)이기도 하다. 샤르코의 욕망이 G양의 욕망과 같지 않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샤르코의 편에서 지식과 권력의 욕망인 것은 G양의 편에서 섹슈얼리티의 장치dispositif에 있어서 (생식을 향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와 관련 없이) 성적 욕망이라는 형태를 명백히 취하는 것을 대신하고 있다. 인식의 관계에 있어서 효력을 낳는 것은 이렇게 오인된 욕망들의 마주침이다. 욕망에 의해 활처럼 휜 신체가 샤르코와 제자들을 매료시키고, 이들의 주목을 끈다. 욕망이 낳은 환상illusion이 그들을 다시 모이게 한다. 샤르코에게 욕망은 지식-권력의 축적 원리에 속하지만, G양에게는 착란적 영합complaisance délirante 원리에 속하는 것이다.

 첫 번째 교훈. 인식의 주체와 대상은 두 사람 모두에게 욕망의 주체이다. 다만 욕망을 ‘지닌du’ 주체라기보다는 욕망을 ‘따르는au’ 주체이다. 왜냐하면 샤르코와 G양의 행동[품행]이 의지에 의해 방향이 정해졌다고 해도, 이 의지는 개별 주체의 선택이나 결정의 형태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가 권력관계에 관해 말하듯이, 의지는 의도적인intentionnel 동시에 비주체적non subjectif이다.56) 두 번째 교훈. 이 욕망은 인식에 있어서 맹목의 원인이 아니라 중계를 담당한다. 그렇지만 욕망은 히스테리적 위축contracture에 의해 주어진 예에서 드러나는 합선court-circuit의 형식을 통해서, 그 맹목을 대리보충한다. 세 번째 교훈. 이 대리보충은 보증과도 같다. 재현représentation의 세계에서는 신이 보증을 대신하지만, 이 세계를 떠나면, 욕망에 시달리는 인식의 주체에게 유일한 보증은 그가 인식의 대상으로 간주한 자에 의해 주어진다. 즉, 그의 욕망과는 변별적인 욕망에 시달린, 그러나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가 부여하는 보증 말이다. 네 번째 교훈. 살페트리에르의 남편인 샤르코는 수육한incarne 히스테리 환자라는 ― “권력관계는 신체의 내부로 통과한다”57) ― 보증밖에는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이 보증에 관해서는 G양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므로 G양이, 샤르코가 자신에게서 보고 싶어 하고 인식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보게 하고 인식하게 해줄 때, 그녀는 자신을 권력의 공모자로 만든다. 그녀는 지식이라는 동기와 수단에 기초하여 자신에게 행사되는 권력의 공모자가 된다. 진실로, 그리고 실제[현실]로.

 이것은 주체의 재건일까? 아니다. 개별 주체의 선택도 없고, 결정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도 하다. 히스테리 환자의 “인식론적 신성함”58)을 낳는 이런 재건의 원동력은 욕망이기 때문에. 확실히 히스테리 환자는 인식의 대상이지만, 히스테리 환자가 복종하는 것은 욕망이다. 그렇지만 자발적 예종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푸코가 그것에 대해 ‘유순함’59)이라는 말을 쓰고, 떠맡고 받아들이는 ‘책임’60)을 말하기 때문이다. 샤르코가 G양에게 귀속시킨 정체성의 산출에 의해, 이렇게 만난 무대의 주인공들 사이에 지배관계가 생겨난 것이다. [지배관계의] 현실화actualisation 조건은 [G양에게] 귀속된 정체성의 유효성을 G양이 인정하는 것이다.61) 다섯 번째 교훈으로,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의 신체를 “완전한 형상에 있어서”62) 즉, “완전한 지식과 완전한 무지에 있어서”63) 받아들인다는 점, 그리고 샤르코도 G양도 사태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모른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즉, 권력은 의식에 내부화되기 전에 신체를 건드리는atteindre 것이다. 힘의 관계들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재현에 의해 중계되어서는 안 된다.64) 더욱이 여섯 번째 교훈으로, 19세기 후반의 병원들에서 “히스테리의 폭발적 증가”65)가 나타났다는 점, 이것은 “정신의학적 권력의 행사 자체에서 오는 여파”66)라는 점을 지적해두자. 여기에는 샤르코와 G양이 종속된 욕망, 의식의 바깥hors에서 권력행사의 중계로서 작용하는 욕망의 역사성이 있다.

 여기서 주체와 그 분열schize이 보이게 된다. Sc와 Oc는 그 의식적 부분을 상징하는데, 철학적 전통과 과학의 담론은 〔오로지〕 이것〔만〕을 떠올린다. 〔그리하여/그렇게〕 그 무의식적 부분인 Hd와 Fd는 억압되고 망각된다. Hd/Sc와 Fd/Oc의 관계에서는 소문자 d가 H와 F(섹슈얼리티의 장치dispositif에 있어서 적절하게 성화되어sexués 있다)를 촉발한다[영향을 미친다, affecte]. 조종〔진두지휘〕하는 것은 이 소문자 d이다. 이 소문자 d는 해독해내야 할 비밀이라기보다는 담론이 개인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이 담론이 개인을 주체로서 생겨나게 한다causer. 가설적으로 얘기한다면, d의 해독을 목표로 하는 실천에 의해 오히려 d의 암호화가 진행되고, 그래서 d는 욕망의 진리로서 구성된 것과 연결된다. 구성은 해독/암호화 조작(시련)을 통해서 이뤄지지만, 진리는 실재에 부합하는 정체성이라는 형식(확인)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기획된 작업의 관건enjeu은 억압refoulement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 이 결과(Hd/Sc와 Fd/Oc), 그리고 이 주체의 방정식의 항들 각각에 관한 역사를 만들기. 이것에 덧붙여 푸코가, 의견doxa이 “역사적 장의 바깥hors에”67) 뒀다고 말하는 욕망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1976년에 예고된 『성의 역사』일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 발상idée은 “성적 행동comportement을 기화로 삼아 … 어떻게 개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그리고 타자들에 대해 욕망의 해석학을 행사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하는”68) 것이다. 물론 『성의 역사』가 “그 배타적 영역이 분명히 아니었다”69)고 하지만. 그러나 푸코는 곧바로 어떤 필요성을 결론으로 끌어낸다. 진리 게임들 중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맺는 관계를 연구하고 더 나아가 권력관계들과 관련시켜 진리 게임들을 연구한 후, “진리 게임들을 자기에 대한 자신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의 구성 속에서”70) 연구하는 데 몰두해야 한다. 『성의 역사』도 역시 주체의 역사인 것이다.


정치와 윤리

 정치와의 관련은 어떨까? <성의 과학(Scientia sexualis)>을 둘러싸고 분석에 무게의 중심을 둔 『지식의 의지』는 권력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한다. [사회적] 억압(répression)은 “[무의식적] 억압(refoulement)을 규정하는 사회적 윤곽을 보이게 한다”71)는 발견적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서양에서 작동하는 권력 메커니즘은 이 차원에는 없다. 신체의 해부정치와 인구의 생명정치의 접합부jonction에 있는 섹슈얼리티가 그것을 보여줄 채비가 되어 있다. 권력은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작동하는 동시에, 말하는 것을 의무로 부과함으로써 작동하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권력은 우리에게 그리고 또 다른 우리에게 ‘진리’를 말하도록 하는 의무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의 진리를 말이다. 시련의 의례를 통해 그렇게 구성된 진리를 말이다. 우리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그 역방향으로 우리라는 주체에 대해 효과를 위해서이며, 그 효과란 할당된 정체성의 감옥 속에 우리를 가두는 것이다. 더욱이 가령 G양처럼 남편이 알고 싶어 하는 대상을 남편을 위해 구현하고incarnons, 자신을 가둬버리는 문의 열쇠를 자신이 마지막으로 돌리는 경우, 도대체 어떤 향락이 우리의 품행conduite을 인도하는conduit 것일까…. 아무튼, 우리는 자신들이 억압되고 있다고 열심히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억압을 따라 통치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진리를 따라 통치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권자-법> 시스템”72)을 넘어 권력의 실효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에 대한 분석론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사법적 모델을 전략적 모델로 대체할 필요성이다. 억압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억압에 맞설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선 한편으로, 권력 메커니즘이 변형되었다. 징수prélèvement ― 이 조작에 관해 푸코는 「마오쩌둥주의자와의 대화」에서 페니 레비에게 주목하라고 촉구했다 ― 는 “권력의 주요형태가 더 이상 아니고, 다른 많은 것들 중 하나이게 되는 경향이 있다.”73)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유순함’ ― 우리의 아첨, 비굴, 결기 부족 ― 은 악(le mal)을 진부하게 만든다. 

 윤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기하자. 푸코는 책상 위에서 권력만 아니라 마차가지로 주체도 묻는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지식의 의지』는 맹목이라는 주제를 공들여 다룬다. 「니체에 관한 강의」 이후의 것이다(다음의 한 구절을 유념하자. “왜 인간은 사물들을 보지 않는가? 인간 자신이 이것을 방해하고 있다. 인간이 사물들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74)). 이 검토élaboration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고찰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관한 논의를 통해 이뤄진다(이 경합agôn에서는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싸우도록 만들어진다. 그리고 주체와 진리는 그 효과이다). 모든 것은 마치, 알튀세르의 예속화 테제를 반박하는 것처럼 읽힐 수 있다(그래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필요할 경우 국가 (억압)장치의 이러저러한 별동대의 개입을 유발하는 나쁜 주체”와 “‘혼자서’ 잘 걷는 주체,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그 구체적 형식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appareils로 실현된다)에 의해 작동되는 (좋은) 주체”75) 사이의 구별은 무엇을 사유하지 못한 채 내버려두는가? 신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 좋은 주체는 “주체들로의 호명, <주체>에로의 예속화, 보편적 승인reconnaissance, 절대적 보증이라는 네 종류의 시스템”76)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이데올로기라는 통념을 사용하지 않고 이런 물음을 어떻게 개진할까?).

 푸코가 마찬가지로 달콤하고 여린 소리로 몰래(Sotto voce) 라캉과 대화했을 수도 있다. 알다시피 푸코는 1969년의 강연에서 사무엘 베켓에게서 정식화를 차용해 하나의 문제를 검토했다. “누가 말하는가는 상관없다. 누군가가 말했다, 누가 말하는가는 상관없다.”77) ― “저자라는 기능fonction-auteur78)의 문제이다. 이런 분석을 전개하는 것은, 그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담론의 유형론”79)에 들어가게, 그리고 “주체의 특권들을 재검증하게”80)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주체에게서 (혹은 그 대리substitut에게서) 근원적 기초라는 역할을 빼앗고, 주체를 담론의 가변적이고 복잡한 기능으로서 분석하기”81) 위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라고 제언한다. “어떻게, 어떤 조건에 따라, 어떤 형식 아래에서, 주체로서의 어떤 것이 담론의 질서에 등장할 수 있을까? 담론의 각 유형 속에서 주체로서의 어떤 것은 어떤 장소를 차지할 수 있고, 어떤 기능을 행사하며, 어떤 규칙에 복종하는가?”82) 한편으로, 이것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 강연을 들은 라캉은83) 1969년부터 1970년의 세미나에서 어떤 짝짓기relation를 제출한다. 욕망의 주체와 인식의 주체라는 관계relation도 아니고,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의 관계도 아니다. ― 따라서 Hd/Sc와 Fd/Oc의 관계가 아니라, 행위자agent/진리와 타자/생산이라는 네 개의 장소를 네 개의 항(S1과 주인기표, S2와 지식, S/과 주체, 와 잉여향락)이 차지하는 관계이다. 이런 항들이 교대로 순환한다[차지하는 장소를 번갈아간다]는 것이 네 개의 담론을 구조를 정의한다. 주인의 담론,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 대학의 담론, 정신분석가의 담론이다. 이것이 예속화의 양태를 설명해준다. 즉, 주체가 자신의 욕망과 맺는 관계의 양상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결국 이들 네 개의 담론을 『진실의 용기』에서 정의된 네 개의 진리진술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특히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의 윤리와 푸코가 말하는 철학의 윤리에 관해 정신분석적 담론과 파르레시아적인 ‘진실-말하기dire-vrai’를 비교하면 무엇을 깨우치게 되는지를 보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라캉과 대화했든 하지 않았든, 푸코도 라캉처럼 다음을 알았다. “말해지는 것이 이해되고 나면, 말한다는 것은 잊힌 채로 머문다Qu'on dise reste oublié derrière ce qui se dit dans ce qui s'entend84)는 것이다. 1977년의 푸코는 무엇이 말해지고 있다고 이해되는가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억제refoulement의 효과에 의해 무의식에 머물러 있는 것에 표시를 하고, 맹목적이게 만드는 맹목적인 임무의 윤곽을 분간하려 한다. 어떤 인터뷰에서 그가 말하길, 『지식의 의지』에는 “증명 기능이 없다.”85) 이 책은 “전주곡prélude과도 같은 것이며 …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어디서 비판 받게 될지, 어디서 몰이해가 생겨날지, 어디로 분노가 쏠릴지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나올 책을, 아무튼, 이 책에 대한 모든 반응을 미리 담아둔perméables 책으로 만들기”86) 위한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더욱이 들을 수 있는 것을 탐구한다. “‘이게 제 생각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제가 무엇을 개진할지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걸 말해도 될까, 그리고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를 보고 싶었습니다. … 이 때문에 이 가설적 담론이 산출한 효과를 대충 훑어보면서en survol 듣고 싶다고 소망했던 것입니다.”87) 푸코는 이렇게, 1977년 7월에 행한 라캉파 분석가들, 전-프롤레타리아좌파 활동가들, 전-감옥정보그룹 활동가들과의 인터뷰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도 또한 머뭇거림이 [새롭게] 생기는 것일까? 당황한 알랭 그로스리샤르Alain Grosrichard는 “당신〔푸코〕이 하고 싶었던 것에 못 미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라며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책들이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에 관해 생각이 바뀐 것입니까?”88) 푸코는 이렇게 답한다. “질문이 [표적을]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이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맙시다. 제 주제가 빗나감을 증명할 테니까요.”89) 대화 상대와 푸코 사이에, 오해는 철저하다. 권력에 관해, 알랭 그로스리샤르는 이렇게 개탄한다.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억압적이거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행사되는 것으로서 이렇게 권력을 표상하는 것이 속임수illusion였다고 생각하세요? … 여하튼, 꽤 끈질긴 속임수이죠. 사람들은 이런 유형의 권력에 맞서 싸워 왔으며, 그렇게 해서 사물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90) 사회계급에 관해, 카트린 미요Catherine Millot는 놀라워한다. “그런데 사회계급은 어떤 역할을 하겠죠?”91)(푸코는 말하기를, “그것이 문제의 중심, 틀림없이 저의 고유한 담론이 가진 모호성이죠. 지배계급은 추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결 여건도 아닙니다…”92)). 주체에 관해, 자크 알랭 밀러Jacques-Alain Miller는 화를 낸다. “그러나 이론적 장이 아니라, 실천적 장을 논할 때에는 어쩌면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힘관계가 있으며, 투쟁combats이 있습니다. ‘누가 싸우는가. 누구에 맞서 싸우는가’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됩니다. 여기서는 당신도 주체 혹은 어쩌면 주체들의 물음을 외면할 수 없죠”93)(푸코는 말하길, “물론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 관심사이죠. 이로부터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94)) 등.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는 이 점과 관련된다. 이 강의에서는 진리의 표명manifestation과 생산이라는 테마가 또 다시 새롭게 다뤄진다. 인식의 차원에서는, 고백이 증거가 된다. 사건의 차원에서는, 고백은 하나의 시련épreuve이다. 그렇지만 사법진술이 다른 수단들에 의해 계속된 경합(agôn)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루뱅 강의의 유일한 의도propos인 것은 아니다. 이 강의는 진리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쓰기를 일삼는 중립성의 가면 아래에서 “본능, 열정, 날카로운 추궁achamement inquisiteur, 잔혹한 세련, 악의méchanceté 같은 지식의 의지의 형식들과 그 변형들”95)을 찾아낼 수 있게 해준다. 부수적으로, 푸코는 예속화의 물음을, 이 물음이 금시초문이지 않는 형벌의 장으로 옮겨 놓는다. 개인이 어떻게 주체로서 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은, 판별(discrimen)과 범죄(crimen)를 연구하는 학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맡겨진다. “진리에 의한 통치”96)의 물음은 그들에 대해 제기된다. 이 물음은 정치적 물음 ― “개인이 자신에게 행사되는 권력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그 연결을 받아들이는가”97) ― 인 동시에, 인식론적 물음 ― “주체들이 각자가 서약하는 진리진술의 형식 속에서, 또한 그 형식에 의해, 어떻게 실제로 연결되는가”98) ― 이기도 하다.






1) M. Foucault, «Le sujet et le pouvoir»(«The Subject and Power», trad. F. Durand-Bogaert), in H. Dreyfus, P. Rabinow,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p.208-226),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lV, no306, p.223.

2) lbidem.

3) lbidem.

4)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Le pouvoir psychiatrique», Annuaire du. Collège de France, 74( année, Histoire des systèmes de pensée, année 1973-1974, 1974, pp.293-300),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I, no143, p.675.

5) lbidem.

6) M. Foucault, «La vérité et les formes juridiques», p.540.

7) lbidem.

8) lbidem.

9) lbidem.

10) lbidem.

11) Idem, p.552.

12) lbidem.

13) L. Althusser,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Notes pour une recherche)», La Pensée, no151, 1970,

   http://classiques.uqac.ca/contemporains/althusser_louis/ideologie_et_AIE/ideologie_et_AIE.pdf(consulté le 30/10/2011), p.43.

14) lbidem.

15) M. Foucault, «La vérité et les formes juridiques», pp.552-553.

16) L. Althusser,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Notes pour une recherche)», p.37.

17) M. Foucault, «Leçon sur Nietzsche. Comment penser l’histoire de la vérité avec Nietzsche sans s’appuyer sur la vérité»; (conférence prononcée à l’université McGill à Montréal en avril 1971), in M. Foucault, Leçons sur la volonté de savoir, p.203.

18) lbidem.

19) lbidem.

20) lbidem.

21) lbidem.

22) lbidem.

23) lbidem.

24) Idem, p.202.

25) lbidem.

26) lbidem.

27) lbidem.

28)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77.

29) M. Foucault, «Les intellectuels et le pouvoir», p.307.

30)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80.

31) M. Foucault, Leçons sur la volonté de savoir, p.18.

32) lbidem.

33) lbidem.

34)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75.

35) Idem, p.679.

36) lbidem.

37) Idem, p.680.

38) Idem, pp.680-681.

39) Idem, p.686.

40) M.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Paris, Gallimard, 1966.

41)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75

42) Ibidem.

43) M. Foucault, Leçons sur la volonté de savoir, p.19.

44) Ibidem.

45) M. Foucault, «Le jeu de Michel Foucault»(«Le jeu de Michel Foucault», entretien avec O. Colas, A. Grosrichard, G. Le Gaufrey, J. Livi, G. Miller, ) . Miller, ) .-A. Miller, C. Millot, G. Wajeman, Ornicar ' Bulletin périodique du champ freudien, no10, juillet 1977, p. 62-93),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II, no206, p. 3 12.

46) M. Foucault, L’usage des plaisirs, Histoire dela sexualitéfl, Paris, Gallimard, 1984, p. l 1.

47) 사건화 개념에 관해 다음을 참조. M. Foucault," Qu’est-ce que la critique’ [Critique et Aufklarungh p. 47-48.

48) M.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in M. Foucault, L’usage des plaisirs, Feuiller libre joint à l’édition originale.

49) M. Foucault, L’usage des plaisirs, p.ii.

50) M. Foucault, La volonté de savoir, Paris, Gallimard, 1976, p.73.

51) Idem, p.74.

52) 조화법. 이 기술은 샤르코를 넘어서 마르셀 드티엔이 분석한 점술mantique의 몇 가지 형태들을 떠올리게 한다. “왕은 권위의 증거gage이자 도구인 왕홀sceptre을 손에 간직하고 있다. 이 막대기의 힘에 의해 왕은 법령, 정부명령, 판단을 발한다. 그것들은 마치 신탁oracles과 같은 것이다. (M. Detienne, Les maîtres de vérité dam la Grèce antique, Paris, Librairie François Maspero, 1967, rééd. 1971. Cf. pp.42-43.)

53) Idem, p.75, n.1.

54) Idem, p.74.

55) Ibidem.

56) Idem, p.124.

57) M. Foucault, «Les rapports de pouvoir passem à l’intérieur des corps»(«Les rapports de pouvoir passent à l’intérieur des corps», entretien avec L. Finas, La Quinwine littéraire, no247, l"- 15 janvier 1977, pp.4-6),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II, no197, p.228.

58)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81.

59) Ibidem.

60) Ibidem.

61) 이 점에 관해 능동적 주체와 수동적 주체를 대립시키는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 후에 진행된 수정에 관련되는 다음을 참조. M. Foucault, «L’éthique du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 (encretien avec H. Becker, R. Fornet-Betancourt, A. GomezMuller, 20 janvier 1984, Concordia. Revis ta inremacional de jilosojia, n · 6,jui/let-décembre 1984, pp.99-116), rééd.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V, no356, p.719. “확실히 예를 들어 미친 주체의 구성은 강제를 행하는 시스템의 결과 …로 간주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미친 주체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닙니다. 또한 정신병환자가 미친 주체로서 구성되는 것은 그 사람을 미쳤다고 선언하는 자와의 관계에서 그 인물을 앞에 둔 것입니다. 정신의학사 속에서, 그리고 19세기의 수용소 세계 속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히스테리입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주체가 어떻게 미친 주체로서 자신을 구성하는가를 멋지게 예증합니다. 그리고 히스테리라는 현상이 대규모로 관찰된 장소가 강제가 가장 엄격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광인으로서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장소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본고의 관심에서 보면, 이 계속된 이야기를 강조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대조적으로, 현재의 내가, 자기의 실천에 의해 주체가 어떻게 능동적으로 자기를 구성하는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의 실천은 개인이 스스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문화 속에서 발견하는 도식이며, 문화나 사회나 사회집단이 도전받거나 부과되는 도식인 것입니다.” 사회학에서 ‘사회화’라고 불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 푸코가 지적하는 것은, 가령 단순히 히스테리에 있어서, 어떻게 해서 “주체가 광기 주체로서 구성되는”가를 검증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과 나란히 주체가 미치지 않은 주체로서 구성되는 방식도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성찰』로의 회귀. 즉, 『광기의 역사』 초판 서문 및 제2장 서두에서 이미 보이는 테마가 여기서 반복되고 있다(Folie et Déraison. Histoire de lafolie à l’âge classique, Paris, Pion, 196 1, p. l-Xlet p. 54-57). 1981년, 푸코는 앙드레 베르탕에게 이렇게 말한다. “[루드비히] 빈스방거나 [롤란트] 퀸의 작업이 보여주듯이, 미친 사람의 의식을 빼놓지 않고 모조리 기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광기의 경험의 문화적 및 사회적 구조화가 없을까요? 그것을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요?”(M , Foucault, «Entret ien de Michel Foucault avec André Berten»(7 mai 1981), op. cit, p.237.) 푸코의 작업의 도처에서 이 물음은 또 다른 물음과 연결된다. ― 이성경험의 분할적 및 사회적 구조화가 없는가, 그것을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62) M. Foucault, «Les rapports de pouvoir passent à l’intérieur des corps», p.228.

63) Ibidem.

64) Ibidem.

65) Ibidem.

66) Ibidem.

67) M. Foucault, L’usage des plaisirs, p.10.

68) Idem, p.11

69) Ibidem.

70) Idem, p.12.

71) M. Foucault, «Les mailles du pouvoir»(«As malhas do poder», trad. P. W Prado Jr., conférence prononcée à la faculté de philosophie de l’université de Bahia, 1976, Barbarie, no4, été 1981, pp.23-27),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V, no297, p.198.

72) M. Foucault, La volonté de savoir, p.128.

73) Idem, p.179.

74) M. Foucault, «Leçon sur Nietzsche. Commem penser l’histoire de la vérité avec Nietzsche sans s’appuyer sur la vérité», p.199.

75) L. Althusser,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Notes pour une recherche)», p.56.

76) Ibidem.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 및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덧붙여, 보증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데카르트의 『성찰』, 그리고 데카르트적 주체를 둘러싼 푸코와 자크 데리다의 논쟁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Supra pp.159-160, n. 59.

77) M. Foucault, «Qu’est-ce qu’un auteur?»(«Qu’est-ce qu’un auteur?»),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63e année, no3, juill et septembre 1969, pp.73-104),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l , no69, p.792.

78) Idem, p.803.

79) Idem, p.810.

80) Ibidem.

81) Idem, p.811.

82) Idem, pp.810-811.

83) 라캉의 발언은 다음에 채록되어 있다. M. Foucault, «Qu’est-ce qu’un auteur?», p.820.

84) J. Lacan, «L’Étourdit», Scilicet, 4, 1972, pp.5-25, reproduit in. Lacan, Autres Écrits, Paris, Seuil, p.449.

85) M. Foucault, «Les rappons de pouvoir passent à l’intérieur des corps», p.236.

86) Ibidem,

87) M. Foucault, «Le jeu de Michel Foucault», p.298.

88) Idem, p.300.

89) Ibidem,

90) Idem, p.304.

91) Idem, p.306

92) Ibidem,

93) Idem, p.310.

94) Ibidem,

95) M. Foucault,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 Hommage à jean Hyppolite, Paris, P.U.F., coll. Prométhée, 1971, pp.145-172), Dits et écrits, II, no84, p.155.

96) M. Foucault, «Conférence inaugurale», supra, p. 13.

97) Idem, p.8.

98) Idem, p.9.



푸코 '81년 루뱅 강의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의 강의정황 (1/3)

Confessio

 

푸코 - 강의록 - 1981 루뱅 강의 - 강의정황 1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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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서양에서 진실을 산출하는 테크닉들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를 받은 것 중 하나가 됐다. 그 이후 우리 사회는 특이하게 고백적인[이상하리만치 고백을 좋아하는] 사회가 됐다. 고백은 그 효과를 멀리까지 미치고 있다. 재판, 의학, 교육, 가족관계, 연인관계에, 가장 일상적인 차원과 가장 장중한 의례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범죄를 고백한다.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며,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고백하며, 과거와 꿈을 고백한다. … 모든 타인에게는 불가능한 고백을 쾌락과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하며, 이를 책으로 낸다.

― 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 1976, p.79.

 

루뱅에서 이뤄진 두 개의 인터뷰에서 푸코는 자신의 투쟁과 책에 대해 말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서전의 단편”이며, “광기, 감옥,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개인적 문제”라고 말하기조차 했다. “내가 한 실천 활동과 이론적 혹은 역사적 작업 사이를 왕복하고, 상호 간섭과 상호 접속이 일어나도록 항상 노력했다”고 분명히 말한다. 한편으로, 그가 제기하는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질문들은 “실천과의 즉각적이고 동시대적인 관계를 … 가득 채우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현행적(actuel) 실천과 관련되어 이론적 작업이 법칙[loi,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항상 유의해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결합된 싸움과 관련해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채로 머문다.

그는 “모든 형식과 모든 측면 아래에서 고통을 겪는 인류의 보편적인 투사combattant”도, 대상 일반을 연구하는 주체 일반도 아닌 그는 “자신의 주체성에 있어서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지점에서” 싸운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주체적 경험에서 출발하면, “인간의 일반이론”에 기대지 않고 “다른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푸코는 대의의 불명료함[내용이 불명료한 대의]에 인칭적 함의를 대립시킨다. 특이한 입장, 특이하게 까다로운 입장이다. 이것은 욕망 주체를 생략하는 것을 거부한다. 욕망의 주체를 용서하고 이를 비우는 방법의 비호 아래에서 이 주체를 인식의 주체와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은 또한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travail)이라는 물음을 모면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 주체는 이런 작업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이 물음을 소속의 물음으로 급선회해 버린다.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는 수많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강의정황」의 집필을 떠받친 것은 하나의 물음에 의해 방향이 정해졌다. 하지만 이 물음도 여러 가지 정식으로 굴절된다. 푸코는 비판에 어떤 임무를 할당했을까? 그의 삶과 저작에서, 그는 정치와 윤리를 어떻게 연결했을까? 정치공동체cité에서 한 명의 철학자라는 것은 그에게 무엇을 뜻할까? 그는 진실의 용기에 어떤 형태를 부여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취하는 출발점은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가 기입되는 순환(cycles) 속에서 푸코가 진리의 권력을 어떻게 문제화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로부터 어떤 결과들을 끌어냈는지를 알아차리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작업은 세 개의 전개(developments)를 통해 이뤄진다.

첫 번째 전개는 루뱅 강의를 형사사법justice pénale에 관한 텍스트들의 계열 속에 위치시킨다(푸코는 이에 관해 1971년에는 ‘억압’을, 1981년에는 ‘지배의 기법’을 말한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푸코는 철학자가 제안한 분석들을 “가능한 계보학의 세 가지 영역들” 중 두 번째 영역인 “권력의 장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의 내부에 기입한다. [여기서] 고백은 법·권리상의 진실(le vrai en droit)을 생산하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고백의 너머에는 “과학적 실천과 철학적 담론이 조금씩 자격을 잃게 하고 숨기고 쫓아낸 진리의 모든 테크놀로지”가 있다. 이것이 검증되는 것은 “사건의 차원에서 시련으로서의 진리(vérité-épreuve)”가 어떻게 “인식의 차원에서 사실확인으로서의 진리(vérité-constat)”라는 형식을 취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 전개는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에서 푸코가 억압가설의 쇠퇴épuisement라고 부르는 것을 확인한다.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는 자기의 기술과 통치의 부드러운 판본으로 이루어진 사이클 속에 위치되며, “우리가 도덕과 맺는 관계의 역사적 존재론”으로 정의되는 세 번째 영역과 계보학의 두 번째 영역의 경첩charnière에 위치해 있다. 관건enjeu은 억압의 이편과 저편에서 어떻게 주체화 자체가 예속화assujettissement를 산출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주체성과 진리≫에서 아프로디시아[aphrodisia, 쾌락]가 그랬듯이, 고백은 하나의 “굴절réfraction의 표면”이다. 이것에서 출발해 자기에 대한 관계의 역사적 양상들modalités가 검증된다. 이런 검증은 “윤리적 실체”, “예속화의 양태mode”, “자기의 실천”, “텔로스[목적]”라는 네 가지 측면 아래서 이뤄진다.

세 번째 전개는 ≪말과 사물≫에서 이미 다뤄진 철학적 문제가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탐지하고 푸코가 이윽고 ≪진실의 용기≫에서 주게 될 해결의 시초를 알아채는 것이다. 즉, 이 강의를 진리술(알레투르기)적 비판의 사이클을 여는 것으로 읽는 것이다. 고고학적 비판과 계보학적 비판을 보완하는 비판이다. 푸코는 고백의 생산형태들의 역사를 통해 ‘주체성-진리’의 형식을 연구한다. 칸트와의 논쟁으로 복귀한 것이다. 「칸트의 ≪인간학≫에 부친 서문」의 편집자들이 지적하듯이, 이 논쟁이 푸코의 “저작 전체에 영양분을 제공할” 것이다. 이를 세공할 때[암암리에], 하나의 물음이 끝나지 않고 주장된다. 즉, 진리가 “[사실이라고]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야기되는 것”이라면, “제시된 명제apophantique를 대신한 생산”이라면, 비판철학이란 무엇일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루뱅에서 너무 짤막하게 불려내진 대답은 프로그램적[강령적]이다. “대항-실증주의. 실증주의의 반의어가 아니라 그 대위법[contrepoint, 대척점]으로서의.”

 

I. 억압과 그 대상

형사사법에 관한 푸코의 텍스트에서 정치와 윤리는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진리의 권력이라는 문제는 거기서 어떻게 제기되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려면, ≪감시와 처벌≫의 저자가 “자주 상황이 진행되는 바에 따라souvent au gré de circonstances” 작업한다고 말했음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가담한 싸움이 진행되는 바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또한 들뢰즈에 따르면, 푸코에게 실천은 “이론적인 한 점을 다른 점으로 잇는 중계의 총체(ensemble)이며, 이론은 하나의 실천을 다른 실천으로 잇는 중계”였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그가 ‘프롤레타리아 좌파’(GP) 구성원들의 편에서, 또 ‘감옥정보그룹’(GIP)의 한복판에서 벌인 그의 싸움을 짤막하게 돌이켜보자. 이는 인생에 의해 저작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기물적 총체화의 시도에 굴하지 않고, 그가 이해하는 바로서의 비판철학의 윤리가 무엇을 요청하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상황

상황이란 우선 1968년의 학생운동에 대한 억압이다. 그가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곳인 튀니지에서는 시위가 혹독하게 탄압을 받고, 수십 명의 활동가들militants이 투옥됐다. 푸코는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수감된 학생들의 변호사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그들의 재판이 끝난 후에, 푸코는 프랑스 외교부에 자신의 해외 파견 근무를 끝내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돌아온 프랑스에서는 68년 6월에 12개의 의회 밖 좌파 조직에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1970년이 되자 정부의 압박은 베니 레비를 필두로 하는 “3월 22일 운동”과 “청년공산주의연합 맑스-레닌주의”(UJC-ml)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한 마오쩌둥주의 조직인 ‘프롤레타리아 좌파’를 중심으로 옥죄어온다. 같은 해 2월에는 푸키에르-레 랑스(Fouquières-lez Lens) 광산에서 갱내 가스 폭발로 몇 명의 광부가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염병이 탄광사무국에 투척됐다. 이 사건으로 [프롤레타리아 좌파의 기관지인] ≪인민의 대의≫ 편집자들과 함께, 이 파의 활동가 아홉 명도 투옥됐다. 5월 27일, 전투집단 및 민병대milices privées에 관한 법률에 기초하여 프롤레타리아좌파는 해산 명령을 받는다. 6월 9일, “새로운 형태의 범죄(délinquance)를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법률이 채택되었다. 이 법률은 집단적 책임의 형태를 지정하고, 금지된 집회에 평화적으로 참여했는데도 2년의 실형을 선고받을 리스크를 낳았다. 거의 200명의 활동가가 투옥됐다. 새 법이 적용된 사례 외에도, 해산된 단체의 재결성을 이유로 한 사례도 있었다. 후자에 관해서는 ≪인민의 대의≫의 판매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고 여겨졌다.

프롤레타리아 좌파도 이 억압에 맞선다. 활동을 금지당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계속했다. 첫째, 저항을 확대하고 민주전선을 열기. 조직은 그들의 명성이 체포와 유죄선고의 리스크로부터 보호해주는 지식인을 동원했다. 6월 9일, 보봐르와 레이리스(Leiris)는 ≪인민의 대의≫의 친구모임의 단체규약을 제출한다. 6월 11일에는 ≪인민의 대의≫ 편집장이 된 사르트르가 다른 유명인사들과 함께 투옥된 혁명가들의 변호활동을 위한 “적색구조대”를 재설립하자고 호소한다. 둘째, 사법적인(juridictionnelle) 대항 실천을 전개하기. 화염병을 투척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활동가들은, 1970년 12월에 국가보안법정(Cour de sûreté de l'État)에서 재판을 받는다 ― 그리고 무죄 석방된다. 같은 무렵, ‘프롤레타리아좌파’는 랑스에서 인민법정tribunal populaire을 조직하고 탄광회사를 재판정에 세운다. 검사〔원고의 대리인〕 역할을 맡은 사르트르는 광부들의 죽음에 대한 국가와 광산 경영자들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의 법정 논고[구형réquisitoire]는 의사와 학생과 엔지니어들이 행한 재조사contre-enquête에 기초한 것이었다. 셋째, ‘정치범’이라는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 담장 안에서는 활동가들이 집회 개최réunion와 출판물에의 접근, 소속 조직과의 소통 등의 권리를 얻기 위해, 탄압을 고발하기 위해 단식 투쟁을 벌였다. 담장 바깥에서는 세르주 쥘리와 베니 레비가 이끄는 ‘프롤레타리아좌파’의 한 부분인 “정치범조직”(OPP)이 “레닌주의의 전통을 좇아, 재판을 정치적 연설의 무대로 만드는” 것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자크 랑시에르의 초대로 ‘정치범조직’에 합류한 다니엘 드페르의 제안에 따라 푸코에게 하나의 요청이 제기됐다. 랑스에서처럼 조사enquête위원회를 조직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교도소[행형] 시설établissements pénitentiaires에 관한 조사위원회이다. 푸코는 이것에 전면적으로 관여engagement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좌파’가 기대한 것과는 상이한 방식의 관여였다. 관여의 시작부터d'entrée de jeu 그는 탄압과 맹목을 하나의 차원에 통합한다[동일한 차원을 갖고 있다면서 문제 삼는다]. 즉, 첫째는 “68년 5월”이 감옥 쪽을 보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며, 둘째는 탄압에 직면한 활동가들이 다른 수감자들을 그늘 속에 내버려두는 활동의 형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의식〔양심〕과 웅변”이기를 욕망한 열의, “아직 진실을 못 본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진실을” 말하려 하는 열의에도 불구하고, 범죄학 담론의 덫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의 허위의식 때문일까? 일반사범을 정치의식이 없고 게다가 반동적이기까지 한 하층-프롤레타리아로 간주한 맑스의 멸시méfiance와 레닌의 적의감의 원격효과Effet lointain인 걸까? 인민재판justice populaire에 관한 「마오쩌둥주의자와의 논쟁」에서 푸코는 베니 레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 행형체계système pénitentiaire는 지금까지 군대와 식민지화와 더불어 잉여인구의 흡수prélèvement 기능을 맡았으나, 향후에는 그것을 홀로 맡는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좌파’와 ‘정치범조직’을 이끈 젊은 철학자 베니 레비는 〔납득하지 못하고〕 맞선다. 연장자인 철학자 푸코는 더 나아가 덧붙이길, 국가장치appareil로서의 형사사법la justice pénale은 주민〔인구〕 속에 “모순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항상 기능했다”고 말하고, 감옥 주위에서 두 번째 성벽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 장벽(범죄, 범죄자, 도둑질, 깡패pègre, 양아치dégénérés, 인간 이하의 존재 등에 관한)”을 들먹인다. 그러나 베니 레비는 〔반응을 바꾸지 않고〕 이렇게 응수한다. 그에 따르면, 주요한 단절은 “한줌의 노동자minorité ouvrière와 … 프롤레타리아화되는 하층민plèbe 사이에 존재합니다. 이 하층민은 지방 출신의 노동자이지, 불량배, 불한당, 싸움꾼이 아닙니다.”

푸코는 여기서 레비의 몰지각을 나무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 후에도, 그러지 않았다. 들뢰즈가 나중에 이에 대해 언급했듯이,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주체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보는 주체 자체가 가시성 속의 하나의 장소이며, 가시성에서 파생된 하나의 기능”이다. 맹목은, 그가 동맹을 맺은 사람들에게 엄습한 탄압을 맞이해 제기된 문제의 한 차원으로서 생각된다. 맹목, 혹은 더 일반적으로는 가시적인 것의 비가시성, 더 꼬아서 얘기한다면, 이 비가시성의 비가시성에 관해, 푸코는 이미 1966년, 블랑쇼에게 픽션이 보여주어야 한 것은 이 비가시성이라고 적었다. 1972년에 「지식인들과 권력」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인터뷰를 맞이해 푸코는 들뢰즈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근 〔탄압의〕 고조poussée를 겪고 지식인들에게 밝혀진 것은, 대중들이 [사물을] 아는 데 있어서 지식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대중은 완벽하게, 명확하게, 지식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를 더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담론과 이런 지식을 차단하고 금지하고 무효화하는 권력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 덧붙인다. “지식인 자신들이 이 권력 시스템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의식’과 담론의 담지자(agents)라고 하는 관념 자체가 이 〔권력의〕 담론의 일부입니다” 이 분석에서 두 가지 의무가 연역된다. ‘프롤레타리아좌파’와 ‘정치범조직’의 멤버들의 곁에서 이뤄진 푸코의 참여engagement의 형태들은 이런 의무가 결정한 것 아닐까.

 

지식인의 두 가지 의무

한편으로는 유보réserve라는 소극적négatif이면서도 적극적인actif 의무이다. (부정명령의 형태를 취하는) 소극적 의무란, 푸코가 말하길, 지식인의 역할은 “모두가 침묵하는 진리를 말하기 위해 ‘약간 앞에 있거나 약간 곁에’ 자리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재판tribunal populaire도 조사위원회도 아니다. 그리고 적극적 의무. 지금 말한 것과 반대로, 경험에 의해 “지식으로서의 의식”을 획득한 사람들이 더 나아가 “주체로서의 의식”을 “차지하고occuper” 자기네의 정보력pouvoir d'information을 행사할 수 있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1971년 2월 8일, 단식 투쟁 중인 옥중 활동가들이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푸코는 감옥정보그룹의 「선언문」을 배포하고 낭독했다. 약칭 GIP. 그는 다니엘 드페르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GP[프롤레타리아 좌파]를 연상시키지만 “그저 I만큼 다르다. 지식인이 도입해야 할 차이로군.”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유명한 지식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한편, 감옥정보그룹은 “종별적 지식인intellectuels spécifiques”에게 호소한다. 투옥된 사람들의 증언을 모으고 유포하기 위해서, “권력 안에서 자신의 지위position를 전복하고, 지식 안에서 권력을 전복할” 태세를 갖춘 지식인들이다. 처음의 “불관용 조사”는 3월과 4월에 열렸다. 조사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제휴시켰다. 의사, 변호사, 사회복지사, 죄수의 가족이나 친척, 죄수 본인 ― 모두 얼마간의 자격으로 감옥에 관한 정확한littérale 지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쌓인 정보는 감옥정보그룹이 제작한 팜플렛으로 유포됐다. 제휴한 철학자들 ― 들뢰즈, 엘렌 식수, 자크 알랭 밀러, 프랑수아 레뇨 등 ― 은 죽은 문자뿐만 아니라 생생한 문자를 언어로 생각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그런 효과에 민감한 것은 대학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연극인과 정신분석가 중에서도 몰입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 실천의 변형이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무가 있다. 지식인의 역할은 “자신들이 권력의 대상이자 도구인 장소, 즉 ‘지식’, ‘진리’, ‘의식’, ‘담론’의 영역ordre에서 권력의 형태들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라고도 푸코는 말한다. 오히려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좌파의 활동가는 “지식을 듬뿍 갖고 있었다.”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그 지식은 (1972년에 「오이디푸스의 지식」에서 이용된 말을 원용하면) “아쿠에인(ακούειν)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청취écoute의 차원에는 없다. 어떤 명증성이 그들의 눈을 피로하게 했는가,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눈을 피로하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또한 의지도 듬뿍 갖고 있었다. 그러면 욕망하는 남녀가 속이거나 속임을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이해관계가 있어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지식인들과 권력」에서 들뢰즈가 사용한 말을 원용하면)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무의식적으로 투자[투여]investissements”하고, 자신들의 뜻에 반해[마지못해 하면서] 자신들의 맹목성에 있어서 공모에 가담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경제적·무의식적 투자〔투여〕와 맹목화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전제로 어떻게 말하기가 ― 어떤 말하기 방식과 쓰기 방식을 발명하면 ― 이론적 실천을 실제로 변형시킬 수 있는가? 그것이 비판의 표적일 것이다. 관건은 어떻게 싸움을 할 것인가이다. 이런 변형에 자기 이탈의 한 형태가 요구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자기 이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푸코에게 정신분석은 문제가 아니다. ― 자신이 관여된engagée 투쟁 속에서 정치와 윤리를 결과적으로 그리고 엄격하게exigeant 결부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곡예를 부리는 것처럼 진정으로 어려운 일일 수도 있으나véritable tour de force, 1970년 12월부터 1971년 3월 17일까지 이뤄진 콜레주드프랑스의 취임 첫해의 강의를 ‘프롤레타리아좌파’와의 비밀 대화로 읽을 수도 있다. 제기된 문제는 지식의 의지라는 문제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 개의 문제, 진리의 의지 ― 서양문명에서 지식의 의지의 역사의 “중심적 에피소드” ― 와 욕망 주체의 삭제élision ― 철학담론과 과학담론에서 진리의 〔성립〕 조건처럼 보이는 것 ― 이다. 푸코는 철학적 담론, 전-사법적 및 사법적 실천〔담론〕, 시적 담론을 검토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이런 탐구를 구실로 삼아, 이렇게 말하며 강의를 시작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을 정의하는 것은 “‘왜 인식하기를 욕망하는가’라는 소피스트적 혹은 소크라테스-소피스트적 질문”의 억압refoulement이며, 이 억압refoulement은 “진리의 양식에 기초하여, 존재를 따라 질서지어져 있다고 칭하는” 명제학적 담론apophantique에서 현실화된다. 이어서 고대 그리스에서 법droit과 진리가 우선 시련épreuve의 이항형식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기술한다. 여기서의 언표는 명백히 행위수행적이며, 경합적agonistiques 의례의 틀 안에 있다. 그 후 사실확인constat의 삼항형식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기술한다. 여기에서의 언표는 겉보기에는 기술적(descriptifs)이지만, 경합agôn을 사법진술로 대체하는 (혹은 대체하는 듯이 보이는) 의례의 틀 안에 있다. 마지막으로 푸코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에 대한 주석을 이용해,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 그리고 이는 곡예를 부리는 것처럼 어려운 일tour de force이다. 정화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도시국가가 저지르는〕 범죄자의 배제의 몸짓은 도시국가가 자신을 정의하는 몸짓이며, 이는 소피스트를 배제하는 몸짓을, 욕망 주체의 폐제(forclusion)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배제와 폐제는 철학과 과학이 자신들의 내부에 있어서 무엇인지를,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정의한다.

판별(discrimen, discernement)에서 범죄(crimen)로, 범죄에서 (모든 의미에서의) 억압(refoulement)으로. 푸코는 서양사회에서 거짓인 것과 참인 것의 체계가 금지의 체계와 광기/이성의 대립 체계와 유비적인 배제의 기능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지배의 체계와 접합된다. 이미 봤듯이 푸코는 정치범들을 넘어서서 모든 수감자를 위해 스스로를 동원했다〔활동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푸코가 겨냥한 것은 ‘프롤레타리아좌파’보다 분명히 훨씬 더 광대한 사람들이다. 이 강의가 말을 건네는 것은 알기를 원하면서도 자기네의 지식의 의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진리란 원인(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라고 말하는 담론이 상정하는 주체 속에서 스스로를 재인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진리를 구실삼아, 그 영향력 하에서 자신을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욕망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는 아주 간결하고 집약되었던 이 이야기를 푸코는, 이 강의에서 출발해서 더 풀어내는 데 몰두한다.

지식인의 첫 번째 의무는 정보를 청취하고 전달하는 실천의 형태를 취한다. 이런 줌인에 의해 비밀과 대립된다. 두 번째 의무는 역사의 정치적-인식론적 탐구의 형태를 취한다. 과거 속에서 같은 것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상이한 것, 특이한 것, 우연한 것을 보게 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런 줌아웃과 확대(plan large)는 필연성의 환상illusion과 대립된다. 실천적 활동의 일환인 “불관용 조사”에 선행하고 또한 이것의 뒤를 쫓아 고고학적 조사와 계보학적 조사가 이론적 활동의 일환으로서 행해졌다. 우리는 감옥을 보지 않은 채 보고 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있다.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하고 있다. “수용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 “수용 가능성의 체계”로 거슬러 올라가, “지식-권력의 게임jeu에서 출발해 그것을 분석”해야 한다. 이것이 “거의 고고학에 가까운 수준niveau”이다.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것이 재코드화되어 참을 수 있게 되는 출발점을 이루는 명증성을 흔들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시스템이 작동시키는 권력 메커니즘의 맹목화하는 힘이 어느 정도이든, 혹은 거기에서 정교화된 정당화가 어느 정도이든” 시스템은 “뭔가의 원초적 권리droit에 의해” 수용되도록 만들어지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계보학의 수준이다.

1971년 3월,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감옥제도는 많은 사람에게 빙산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범죄자가 있기 때문에 감옥이 필요하다’라는 정당화입니다. 감춰진 부분이야말로 매우 중요하고 매우 가공할 만한 것입니다. 감옥은 사회적 억압répression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 두 개의 숫자를 들어보겠습니다. 그 의미를 철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죄수의 40%는 아직 재판을 받지 않은 피고인[prévenus, 미결수]이며, 약 16%는 이민자입니다.” 1971년 8월에 쟈릴라 하프시아(Jalila Hafsia)가 푸코에게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향후 계획에 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오래 전부터 제가 관심을 가진 문제가 있습니다. 형벌체계système pénal입니다. …저는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아직 27년 동안 가르칠 수 있는데요, 이 문제에 대한 일련의 강의를 할 작정입니다. 27년을 그것에 모조리 다 쓸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필시 몇 년 동안은 그렇게 할 거예요. 친구들 … 과 함께 작은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어찌 말하면 좋을까요? 프랑스의 사법justice, 형벌체계, 행형제도institutions pénitentiaires와 관련해 개입하고 행동하는 그룹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수감자들의 조건에 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정력activités을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몇 개월, 몇 년 계속되겠죠.” 질문자가 〔눈치 빠르게,〕 푸코가 처음부터 “논리적 담론을 도덕적 담론에 종속시켰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지적하자마자, 푸코는 이렇게 명확하게 말한다. “현행 사법체계 속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계급이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을 제 눈으로 보고 분명히 하고, 누구든 읽을 수 있는 담론으로 변형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법Justice과 진리

푸코를 온통 사로잡은 문제를 다음과 같은 근사치로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 형벌체계에 맞선 투쟁은 중요하만, 그러나 이 투쟁은 진리 때문에 어렵다. 즉 그는 형벌체계를 또 다른 문제의 토대 위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1968년에 이미, 그는 이 문제가 “정치적 실천에 대해 중요성이 없지 않은” 문제, “과학적 담론의 지위, 행사 조건, 기능, 제도화”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1971년 4월부터, 푸코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 1회분의 「니체에 대한 강의」를 추가한다. ≪도덕의 계보≫의 저자는 진리를 하나의 효과로서 인식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예속적이고 종속적이고 이해관계가 얽힌” 인식인 진리가 “참과 거짓의 구별을 제기하는, 항상 갱신되는 기본적인 허위화falsification의 게임”에 의해 산출되는 효과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법justice이란 이 말의 니체적 의미에서 진리의 생산양식 중 하나가 아닐까? 인민재판justice populaire에 관한 「마오쩌둥주의자와의 논쟁」 당시의 푸코가 지적했던 대로, 거기서의 결정은 당사자와 관련해 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재판관에 의해 이뤄진다. 그 결정은 “진리의 어떤 규범에 따라, 그리고 정의와 부정의에 관한 몇 가지 관념에 따라” 내려지며, “‘진실’을 수립하거나 ‘고백’을 얻기” 위한 의례 ― 조사enquête와 감정[규명]examen ― 를 거친다. 재판의judiciaires 실천은 힘force을 법droit으로 변환시키는transmuer 권력, 경찰의 폭력 앞에서의 원한ressentiment을 징벌적/행형적/교도소적pénitentiaire 자명성 앞에서의 찬성assentiment으로 변환시키는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의적인 양심을 필연적인 환상(illusion)으로 대체한다. 그렇다면 소송절차의 흐름에 따라 진리의 효과가 작동하게 된다. 수동성과 몰지각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이 효과를 산출하는 메커니즘을 몰아내야 한다.

콜레주드프랑스의 두 번째 강의인 ≪형벌의 이론과 제도≫는 조사[수사, enquête]의 발전을 연구하고, 〔이와 더불어〕 16세기부터 발달되고 감정examen을 탄생시킨 사회통제의 형태들을 분석했다. 이 강의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묘사된 계획, 즉 “모종의 유형의 지식의 형성을, 그것들을 탄생시키고 떠받치고 있는 사법-정치적 모체(matrix)에서 출발해서 지식의 몇몇 유형들의 형성을 뒤따라가는” 것으로 이루어진 계획의 내부에 기입되어 있다. 이 화두는 1973년의 「진리와 사법적 형태들」에서 다시 취해진다. 푸코는 진리에 관해 내적 역사가 아니라 외적 역사를 연구하고 싶다고 말한다. 즉, 과학들의 역사의 형태들 속에서가 사고되고 있는 진리가 아니라, 거기에서는 사고되고 있지 않으나, 실천과 사유를 형성하는informe 진리를 연구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길, 재판의judiciaires 실천은 지식이 그로부터 출발해 형성될 때의 출발점에 있는 실천이며, “새로운 대상, 새로운 개념, 새로운 테크닉”을, 그리고 “주체와 인식주체의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등장시킨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다섯 번에 걸친 이 강연은 두 개의 소송절차 사이의 비교를 전개한다. 한편으로는 이항구조를 한 경합적 소송절차가 있다. 이것은 힘force을 법권리droit로 변환한다[commutateur, 스위치를 바꾸듯이 전환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과 권력의 분리disjonction라는 신화에 의해 정비된ordonnées 삼항구조의 소송절차가 있다. 이것에는 법권리droit에 적합한 진리를 얻는 수단으로서 힘과 법권리droit가 속해 있지만, 이 점은 감춰져 있다. 행위의 진리는 조사enquête의 형태 속에서 산출되며, 범죄자의 진리는 감정examen의 형식 속에서 세공된다.

1975년의 ≪감시와 처벌≫은 “처벌권력이 거기에서 그 버팀목을 취하고 그 정당화와 규칙을 수여받고[맞아들이고] 그 효과를 확장하고 그 터무니없는 특이성을 감추고 있게 되는 현행 과학-사법judiciaire 복합체의 계보학”을 제안한다. 19세기 이후 행위의 진리를 넘어서, 위반자infracteur의 진리가 탐구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범죄자의 진리이다. 감옥은 단순한 법률 위반자를 범죄자로 만들어버리며, 범죄자는 일련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또는 사회적 결정 모두에 의해 그 [범죄]행위에 연결된다고 한다. “지식, 테크닉, ‘과학적’ 담론이 처벌권력의 실천과 더불어 형성되고 교착된다.” 형벌의 극장에서는 새로운 연극이 상연된다. 줄거리도 달라진다. ― 행위를 재판하지만, “이와 동시에 정념, 본능, 비정상성anomalies, 신체장애infirmités, 부적응, 환경이나 유전의 영향도 재판한다.” 새로운 등장인물 ― 의사, 정신과의사, 범죄학자, 비행자 …. 억압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 이후 범죄자의 진리가 그것을 감추는 베일이 됐기 때문이다. 베일의 씨줄은 과학의 외양을 하고 있다. 더욱이 형벌의 완화가 그 베일의 베일이 된다. 베일의 날줄은 법droit의 외양을 하고 있다. 법원tribunaux과 감옥은 속임수leurre의 제조공장manufactures이며, 거기서는 끊임없이 사실이 진리로 변형되고, 수감자[피구금자]humains détenus라는 것에서 출발해 비행자로 제조된다. 이런 제도들은 일군의 실천가와 이론가를 고용한다. 이들의 지식은 참으로 간주되며 이들의 권력은 올곧다droit고 여겨진다.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산출하는 속임수[술책]에 언제나 낚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이 설령 급여의 형태로든, 이 생산물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등한시하기를 선호한다면, 그것을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작업 전체에다 1981년의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는 고백이라는 부분을 덧붙인다. 고백은 1972년에 이미 주목받았으며, 오랫동안 푸코에게 궁금증을 자아냈다. 1975년부터, 그는 사법 시스템의 대부분에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말한 것이 증거를 구성한다”는 것에 놀란다. 그러나 “타인을 감싸기 위해서든 다른 잘못으로부터 면제받기 위해서든 누군가가 어떤 것을 스스로 떠맡으려고 한다”는 것도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더 나아가 고문과 다른 테크닉들은 현실[실재]에 맞지 않는 고백을 얻어낼 수 있게 한다. 루뱅에서 검토된 몇 가지 물음에서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의 메아리[잔향]가 들릴 것이다. 고백에서는 현실에 합치하는 것이 진리의 조건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고백은 진실vrai로 간주되는가? 고백을 진실이라고 상정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 걸까? 언어에서의 참조축의 문제와 사법에서의 고백의 기능의 문제가 합쳐진 문제제기이다. 다른 물음들은 ≪감시와 처벌≫의 연장선상에 있다. 처벌되는 것은 “공격[의 사실]뿐만 아니라 이것을 통한[매개로 한] 공격성이기도 하다. 강간이지만, 이와 동시에 도착이다. 살인이지만, 동시에 충동pulsions과 욕망이다.” 범죄자가 법률 위반자infracteur를 대신했다면, 그리고 자신이 한 것뿐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혹은 그것을 할 수 있었기 위해서는 그가 누군가이지 않으면 안 된다)를 고백해야 한다면, 고백은 “모든 형벌 체계에 박힌 가시, 그 상처, 도주선, 갈라진 틈brèche” 외의 다른 무엇일 수 있겠는가. 고백에서는 진리와 상관적으로 구성되는 주체의 문제화이며, 진리-주체성의 문제화이다.

강의 마지막에, 두 개의 새로운 질문이 열린다. 질문은 이제 재판과정procès de juridiction에서의 고백의 기능이 아니다. “추방의 사회(그리스 사회), 속죄rachat의 사회(게르만 사회), 각인marquage의 사회(중세 말기까지의 서양사회), 우리의 사회인 감금하는 사회”에서의 고백의 기능도 아니다 ―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는 ≪처벌사회≫에서 제시된 이런 구별을 그대로 채용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푸코의 저작이라는 특이한 진리진술의 과정에서의 고백의 기능이다. 피에르 리비에르에서 파트릭 앙리에 이르는, 살인을 자백하면서도 자신이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는지를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주체들에 관한 물음이다. [게다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허사로 끝난 사례도 있다(피에르 리비에르는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그의 눈에는 죽는 것밖에 없다고 비칠 때까지 노력하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기묘한 물음이다. 그러나 라캉이 난해하듯이 푸코가 수수께끼 같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바로 똑같은 이유 때문에 ― 왜냐하면 푸코는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은 자기 자신에 대해 실현되어야 할 작업이기를” 바랐기 때문에 ― 이런 물음들은 푸코의 비판철학이 형벌체계에 맞선 그의 교전engagement을 넘어서서, 정치와 윤리를 어떻게 묶고 있는가를 분석하기 위한 열쇠를 구성할 것이다.

 

- Fabienne Brion & Bernard E. Harcourt, "Situation du cours", in M. Foucault, Mal faire, dire vrai: Fonction de l’aveu en justice. Cours de Louvain, 1981 (Presses universitaires de Louvain, 2012), pp. 265-276.

푸코 '81년 루뱅 강의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 원서 편집자 주

푸코_강의록_1981_루뱅_강의_편집자주_2019060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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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푸코는 루뱅 가톨릭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프랑키기금 초청 강좌라는 틀로 이뤄진 이 강의에 푸코는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 사법에 있어서 고백의 기능』이라는 제목을 골랐다. 이와 병행하여 그는 “사회보호의 계보학”에 관한 연구라는 세미나를 이끌었다. [“사회보호론”으로 알려진 20세기 초반의 형법 정책은 20세기의 전환기에 벨기에의 법률가이자 형법 교수인 아돌프 프린스가 개척한, 형사사법정책에 대한 예방적 접근법을 가리킨다 ― En]. 게다가 푸코는 총 3회의 인터뷰도 허락했다. 첫 번째는 철학자 앙드레 베르탕André Berten, 두 번째는 법학자[판사] 크리스티앙 파니에Christian Panier와 철학자 피에르 바테Pierre Watté, 세 번째는 범죄학자 장 프랑수아Jean François와 욘 데 비트John De Wit와 인터뷰했다.

[푸코를 벨기에로 초대한 것이 지닌 역사적 맥락은 의미심장하다 ― En]. 강의와 세미나는 프랑수아즈 툴켄스가 제창해서 범죄학 학회가 푸코에게 보낸 초청에서 기원했다. 나중에 유럽인권재판소 부소장이 된 툴켄스는 이 당시에는 법학부의 젊은 교수였다. 그녀는 벨기에에서는 드문 형법학자로,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형벌폐지론의 관점에서 연구 작업을 했다. 푸코를 초청한 당시, 그녀는 급진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에서 형법개정위원회의 작업에 주목했다. 제시된 [수정본] 초안은 실증주의에 의해 법률주의를 뒷받침하고 과학에 의해 법droit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고전파 학설과도 사회보호론과도 단절하지 못했으며, 죄의식culpabilité과 위험성이라는 두 개의 개념이 ‘서로 버팀목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푸코가 여러 차례 급진적인 법학자들과 연계alliance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초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푸코의 강의와 세미나는 같은 해에 「대학범죄학연구단」이 조직한 콜로케 「위험성 개념은 여전히 의미가 있는가?」와 마찬가지로, 사회보호론의 기반을 무너뜨림으로써 형법개혁 논쟁에 기여하려는 것이었다. 투쟁은 두 개의 전선 위에서 이뤄졌다. 강의의 틀에서는 사회보호론이 전제하는 주체의 계보학이 다뤄졌고, 세미나의 틀에서는 이 주체와 상관적인 장치dispositif의 계보학이 다뤄졌다. 범죄학연구원과 범죄학연구단의 후원을 받아 이런 활동을 하려는 선택은, 처음에는 역설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심사숙고한 일이다. 푸코는 사회보호론을 뒷받침하는 범죄학 담론을 무너뜨리는 것에 스스로 한 몫을 하면서, 범죄학자들에게 ‘형법에 대한 비판의식’을 스스로 갖게 한다는 임무를 할당한 것이었다.

이상이 본서의 맥락이다. 텍스트에 관한다면, 강의는 개강 강연과 6번의 강의로 이루어져 있다. 푸코의 말에 따르면, 화두는 “고백의 역사를 진리진술(véridiction)과 사법진술(juridiction)이 연결되고 관계되는 형식으로서” 개괄하는 것이다. “형벌의 문제”로 제한된 역사 말이다. 처음 두 번의 강의는 그리스의 전-법률단계를 건드린다. 첫 번째 강의는 싸움의 문제, 진실한 것과 정의로운 것du vrai et du juste의 문제를 제기하며, 두 번째 강의는 참주tyran의 지식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어진 두 번의 강의는 중세와 기독교의 영역과 관련된다. 푸코는 이 두 가지를 ‘고백, 고해, 조사[수사, 취조]enquête’와 결부시킬 것이다. 마지막 두 번은 근대적 영역 현대적 영역에 결부되며, 이것은 ‘고백, 검사[점검, 검증]examen, 감정expertise’과 연결된다. 조감도(perspective)는 “진실-말하기(le dire vrai)의, 진실-발화(la parole vraie)의 정치적·제도적 민속학ethnologie”이었다. 어떤 주장이 참이나 거짓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채워야 할 조건을 검사[점검]한다examiner는 것이 아니라, 진리 게임들과 권력 게임들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여기서는 진리는 무기로, 담론은 논쟁적이고 전략적인 사실들의 집합ensemble으로 간주된다.

더 명확하게 말해야 할까? 푸코의 강의는 물론 분명히 그를 초대한 범죄학자들이 벌인 싸움에 유익하지만, 강의의 의의는 이것으로 다 소진되지는 않는다. 두 개의 질문이 연구 대상의 장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범죄 및 범죄자와 관련해 진리의 물음이 형성되는 실천이란 무엇인가? 자책할 거리를 지닌 어떤 사람이 자신에 관해 진리를 말하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범죄와 범죄자의 곁에서, 이런 질문들은 진위 게임에 새로운 대상을 들인다. 자기에의 관계라는 게임이다. 강의는 진리의 권력이라는 문제에, 개인과 그의 과실fourvoiements의 관계라는 문제를 통합함으로써, 감옥의(carcéral) 계보학을 완성한다. 이후 계보학은 지식, 권력, 주체화라는 축을 따라 전개된다. 그러나 푸코는 도래할 작업이 주체성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라고도 공지한다. 주체성에 관해 그가 강조하는 것은 그 역사성이다. 주체든 자기이든, 자기에의 관계이든, 문제는 역사이다.

따로따로 고려했을 때,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는 뫼비우스의 띠의 구조를 갖고 있다. 개강강의부터 푸코는 자신이 전념하고 있는 문제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고 알린다. 첫 번째는 정치적이다. “개인이 자신들에게 행사된 권력에 어떻게 연결되었고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받아들이는가”라는 문제. 두 번째는 철학적이다. “주체들은 이들이 서약하는 진리진술의 형태 속에서, 또 그 형태에 의해 어떻게 실제로 연결되었는가.” 이 두 가지 측면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한다, 무한정하게. 독자가 어떤 면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사법진술과 진리진술이라는, 그가 편력하고 있는 두 가지 과정의 역사는, 진리효과를 산출하는 재판(judiciaire) 절차의 우연성을 입증하기도 하며, 진리는 착각과 거짓faux을 실제[현실]적인réel 것과 진실[참인 것]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주체의 사법진술에 달려 있다고 공준화하는 철학의 역사성을 입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작 전체 속에 놓고 봤을 때, 강의는 언뜻 보기에, 후기 텍스트들에는 “정치에서 윤리로의 이행 같은 것”이 있다는 가설을 확증하는 듯 보인다. 이행을 실천적으로 관장하는 것opérateur은 ‘언어행위un acte verbal’로서 정의된 고백이다. “그것에 의해 주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언하고, 이 진리에 스스로를 연결하며, 타인autrui과 관련해 종속 관계 속에 자리 잡고,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수정한다.” 이행을 이론적으로 관장하는 것은 진리의 의무라는 통념일 것이다. 이 통념은 그 자체로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종교적 믿음의 차원ordre에서든, 과학적 지식의 수용 차원에서든, 그것은 믿다, 인정하다, 공준화하다를 의무로 삼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진리를 인식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말하고 현시하고 인증하는 것을 의무로 삼습니다.”

그러나 강의에는 이 가설에 대한 몇 가지 반론도 있다. 확실히 같은 해에 한 강의(미국에서 한 『자기의 해석학의 시작에 관해』와 파리에서 한 『주체성과 진리』)와 마찬가지로,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도 어떤 이행을 보여준다. 자유민주주의의 형태를 취한 서양사회들에서 통치의 딱딱한 판본에서 부드러운 판본으로의 이행이다(범죄자의 계보학에서 욕망하는 인간의 계보학으로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제기된 문제의 정치적 측면에 주목한다면 말이다. 이를 철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계보학에서 알레투르기[alêthurgie, 진리술]로의 이행일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초기 글부터 말년의 글까지, 진리의 권력에 진리의 용기를 대립시킨다. 그리고 초기 글부터 말년의 글까지, 그의 철학은 정치와 윤리를 연결시킨다[나눈 적이 없다].

캉길렘은 옳다. 한편으로 지식-권력의 푸코와 다른 한편으로 윤리의 푸코 사이에는 단절rupture이 없다. 푸코 자신이 1984년에 회고하듯이, 그의 연구를 “지식을 권력으로 환원하려는 시도, 지식을 권력의 가면으로 만들려는 시도, 주체가 그 안에 자신의 장소를 갖고 있지 않은 구조들 속에서 그런 시도를 하는 것”으로 소개하는 것은 “단순한 희화화일 뿐이다.” 우리는 분명 통치가 억압répression을 경유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또한, 더 일반적으로는, 통치가 에토스의 형성을 경유하는 사회에도 살고 있다. 개인을 자신의 품행conduite의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하는 에토스이다. 주체 없이는 순종docilité도, 자발적 복종servitude도 없다. 그러나 또한 푸코에게는 특히, 주체 없이는 ‘성찰적 비순종’의 기예도 ‘자발적 비복종inservitude의 기예’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상화normalisation를 접하고 이에 맞서는 『자기의 배려』”가 있다고 과학철학자 캉길렘은 적었다. “푸코가 윤리를 가다듬는 데 골몰한 것은 고유하게 가치론적axiologique 의미에서 정상적인normal 일이다.” 지식과 권력 사이에,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는 주체를 쐐기coin로서 끼워 넣는다. 개인을 자신의 품행의 주체로서 구성하는 에토스의 형성을 경유해 통치가 행해진다면, 자기로부터의 이탈 ―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이탈하는 것을 항구적으로 할 수 있게 스스로 만드는 것” ― 은 정치적 저항 형태들의 윤리적 가능성의 조건이다[정치적 저항이 여러 가지 형태들로 행하기 위한 윤리적 가능성의 조건이다]. 푸코의 철학은 우리를 이곳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이 강의는 또한 자신에 대한 투명한 의식이라는 통념이 주체에 관해서는 하나의 양상modalité일 뿐이라는 것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 자아론이 데카르트 및 칸트에 맞서 무엇을 생각하든 ― 맞서더라도 똑같은 요청에서 출발했지만 ―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이탈한다는 것은 인식의 영도(零度)라는 허구로부터 스스로 이탈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로부터의 이탈이란, 철학적 전통의 주체 속에서, 그리고 과학의 담론의 주체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의 화신avatar을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기도 하다.

* * *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 : 사법에서의 고백의 기능』에 관해서는 사정을 잘 아는 독자조차도 IMEC에 소장된 5회분 강의의 타이핑 원고만이 알려져 있는 상황이 오래 계속됐다. 원고는 녹음테이프를 토대로 작성됐는데도 그 테이프를 찾지 못했고 한 번도 교정되지 않았다. 강의록은 출판될 수 없었다. 한편으로 타이핑 원고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강의 원고가 포함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 명백한 오류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조사한 결과, 범죄학연구원에서 한 개강강의와 1강을 위해 직접 집필한 원고의 사본이 발견됐다. 더욱이 범죄학연구원의 의뢰로 강의가 녹화됐을 때 사용된 비디오테이프 13개도 발견되었는데, 개강강의를 뺀 여섯 번의 공개강의가 수록돼 있었다.

결과적으로 텍스트를 확정하는 데에 다음의 자료를 이용할 수 있었다.

 

* 개강 강의 : 원래의 육필 원고 및 타이핑 원고의 사본

* 1강 : 원래의 육필 원고, 녹화된 영상, 타이핑 원고의 사본

* 2강~5강 : 녹화된 영상, 타이핑 원고

* 6강 : 녹화된 영상

 

개강강의 텍스트는 원래의 육필 원고를 토대로 확정했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레이아웃을 바꿨다. 항목별로 쓴 것을 단락으로 나눈 곳도 있다. 이어진 6회분 강의의 편집은 푸코가 실제로 강연한 내용을 수록한 녹화 영상을 참조해서 이뤄졌다. 테이프 교체로 인한 누락분은 가능할 경우에는 타이핑 원고에서 고스란히 옮겨 적어 해당 페이지의 하단부에 삽입했다.

다니엘 드페르 및 프랑수아 에발드와 협의를 거쳐,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 편집과 똑같은 확정 방향을 취하기로 결정하고, 가능한 한 축자적으로 옮겨 적으려 했다. 그렇지만 구어체를 문어체로 바꾸는 것은 [부득불] 몇 가지 개입을 강요했다. 부득이할 경우 구두점을 삽입하고 단락을 나눴으며, 필요하다고 싶으면 반복을 삭제했고 중단된 구절을 복구했고, 부정확한 문구를 바로잡았다. 판독할 수 없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대목은 이를 적시했다(이것은 [ ]로 표시했다). 페이지의 하단부에 있는 *는 교정자의 추측에 따른 추가, 그리고 또한 청중들과의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편집자가 붙인 주에는 문헌정보와 전기적 정보를 적었다. 또 푸코가 같은 주제를 다뤘던 다른 텍스트들을 특정하고, 연구자들이 추가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인용 대목은 원문·원전을 확인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보충했고, 참고 문헌을 각주에 표시했다.

부록에는 미셸 푸코가 루뱅에 체류하는 것을 맞이하여 실현된 두 개의 인터뷰를 담았다. 1981년 5월 7일 앙드레 베르탕André Berten과의 인터뷰 텍스트는 범죄학학회가 대학시청각센터에 의뢰해 촬영한 영상기록을 토대로 확정했다. 장 프랑수아Jean François 및 욘 데 비트John De Wit와 한 인터뷰는 녹음테이프에서 녹취한 타이핑 원고를 바탕으로 했다. 이 녹음테이프는 오늘날 잃어버렸으나, 타이핑 원고는 장 프랑수아가 소장한 자료에서 발견됐다. 따라서 본서에 수록된 텍스트의 판본은 번역된 후 네덜란드 잡지에 게재된 초판 인터뷰를 채택한 프랑스어 번역본을 수록한 『말과 글』의 그것과 다르다.

 

다니엘 드페르, 프랑수아 에발드, 프랑수와즈 툴켄스, 그리고 장-미셸 쇼몽 등 교정 작업 검토위원회의 구성원들에게 텍스트에 대한 재검토를 부탁했는데, 이들은 수정안과 귀중한 논평을 해줬다. 이들의 도움과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루뱅 강의록의 출판은 미셸 푸코의 유산상속인들에게서 허가를 받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낸 신뢰에 보답하는 높은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애를 썼다.

 

파비엔 브리옹 & 버나드 하코트

김상운 옮김

 

 

- M. Foucault, Mal faire, dire vrai: Fonction de l’aveu en justice. Cours de Louvain, 1981 (Presses universitaires de Louvain, 2012), pp. V-XIII.

[工房 강좌] 푸코 '81년 루뱅 강의 강독. 개강 6월 12일,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강사 : 김상운

현대정치철학 연구자이자 전문 번역가.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한국어판 기획자이다.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1975-76년 강의록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2015)1982-83년 강의록 자기의 통치와 타자의 통치(근간)를 옮겼다. 그 밖에 옮긴 책으로 푸코의 미학(2018), 푸코 이후(2015), 자크 데리다를 읽는 시간(2018) 등이 있다.

 

강의 일정 : 20196월 12()부터 총8. 오후 730분부터 10시까지

 

수강료 : 16만원 (1강 이후에는 환불하지 않습니다.)

 

참가신청 : https://forms.gle/hZ3VnN4TkkCVff4x5

 

위 링크를 열어 신청서 작성 후, 아래 계좌에 입금하면 수강 신청이 완료됩니다.

 

** 입금 계좌 : 카카오뱅크 3333-11-6041114 (예금주: 황재민)

** 정원 : 20(선착순 마감)

 

강의 소개 및 강의 목표

푸코가 19814월부터 5월까지 벨기에의 루뱅가톨릭대학교에서 이뤄진 7의 연속강의를 8에 걸쳐 강독 형식으로 읽고자 한다. 이 강의록은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Mal faire, dire vrai : Fonction de l’aveu en justice)라는 제목으로 루뱅대학교출판부에서 2012년에 출판됐다.

 

* 강의 일정

- 1. 612: 편집자 주, 강의 정황읽기 [1972-73<처벌사회> 강의록의 강의 정황(버나드 하코트) 초역본을 인쇄물로 제공]

- 2. 619: 개강 강의

- 3. 626: 1. 1981422

- 4. 73: 2. 1981428

- 5. 710: 3. 1981429

- 6. 717: 4. 198156

- 7. 7월 24: 5. 1981513

- 8. 7월 31: 6. 1981520

 

문의 : sanggels@gmail.com

 

5/22부터 새 책 읽습니다.

 

세미나 신청 : https://forms.gle/BQsfev3ommjz5y91A

 

5/22 시작하는 두 번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