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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사항/소식 나눔

[서평] 마르크스라는 유령의 귀환

마르크스라는 유령의 귀환

마르크스의 귀환』(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 경희대학교출판부, 2020) 서평

 

강길모 (현대정치철학연구회)

 

환영들에 대한 이러한 적대감, 때로는 웃음을 터뜨림으로써 공포감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곤 하는, 이러한 공포에 질린 적대감은 아마도 마르크스가 그의 적수들과 항상 공유했던 게 될 것이다. 그는 또한 환영들 및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모든 것, 곧 결코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현상도 그 반대도 아닌 어떤 허깨비/출현의 재출현을 푸닥거리하려고 했던 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이는 오늘, 아마 내일도,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
-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

 

데리다는 90년대 초, 동구권 붕괴 직후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마르크스가 유령의 유령성을 분석하기 위해 돌아오게 될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르크스는 어떤 형태로든 자본주의의 위기 때마다 다시 호명되고, 다시 출현하며,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나타났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던져졌다. 왜 지금 이 시점에서 마르크스가 ‘귀환’하는가? 이 귀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작가는 어떠한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귀환했다고, 혹은 귀환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마르크스에 대한 무수히 많은 해석들이 있다. 서구 좌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맥락 속에서도 마르크스의 복잡성은, 하나의 마르크스를 감히 논하기 어렵게 만들 정도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또 다른 하나의 마르크스 해석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론적 경향을 소개하거나, 혹은 과거의 유령을 재출현시키는 것일까? 이 책, 이 소설은 마르크스에 대한 어떠한 이론적 해석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그 대신 마르크스가 그렇게 살아갔을법한, 그럴듯한 이야기eikotes logoi를 구성한다. 그가 어떠한 사상을 설파했고, 현재 그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은 그러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국 망명 직후부터 자본론 출간까지의 마르크스의 삶을, 논픽션과 픽션을 섞어가며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들어서 보여준다. 여기에는 위대한 혁명가 마르크스, 천재적 이론가로서의 마르크스 이외의 마르크스가 있다. 망명인으로서 극한의 생활고에 시달리고, 저술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치질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마르크스가 있다. 초인적인 자기 절제와 부단한 노력, 번뜩이는 천재성보다, 스트레스에 폭주하고, 저술의 방향을 잃고 헤매이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의, 우리 옆에 있을 법한 누군가처럼 묘사되는 마르크스가 있다. 즉, 이 ‘소설’은 마르크스 또한 인간으로서 살아갔음을 실감할 수 있는 통로처럼 보인다. 사상가라는 유령으로서의 마르크스가 아니라, 시대적 인간으로서 살아간 인간으로서의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사상이 아니라 삶을 조명하며, 고증과 허구를 넘나드는 이 글 속의 마르크스의 모습은 과연 누구의 모습일까.

예를 들면 이 서평을 쓰고 있는 필자 본인의 경우, 최근 코로나 19로 경제적으로 계획했던 일들이 모두 어그러져 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이 방향이 옳은지 아닌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는 상황 속에서, 그 이외의 수많은 삶의 난관들이 자신을 괴롭혀서 이에 너무나 버겨워하는 마르크스의 심정이나 상황은 정말 남의 일 같지 않다(마르크스가 겪었던 곤경과, 마르크스가 했던 이론적 작업의 중요성에 필자를 견줄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나마 모아놓은 돈이 있기에 나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와 무관하게, 경제적으로도 만족스럽고 안전하게 잘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 이후 더더욱 어렵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서구 사회에서 코로나 19의 주요 희생자들은 외국인 노동자, 유색인종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안전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생계 자체에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방문판매원, 콜서비스센터, 물류센터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퍼졌던 것은 이 사회의 시스템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분명히 이 사회의 안전망에서 소외된 사람일수록 코로나 도중의 삶, 코로나 이후의 삶은 어렵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이 끔찍한 현실이 자본주의의 결과임을. 오늘날 코로나 19, 지구온난화라는 재앙 앞에서 자본주의적 모순의 극한으로 수렴해가는 삶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삶들이 19세기 마르크스가 겪었던 고난의 삶과 닮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소설의 형태로 귀환해야 했을 까닭도, 우리의 삶이 겪고 있는 난관이 마르크스가 느끼고 겪었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마르크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 역시 더 나은 삶에 대한 상상력은 일종의 망상으로 여겨진다. 더 나은 삶의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들도 허황된 혁명타령, 허황된 삶의 방식으로 너무나 쉽게 기각되고 있다. 물론 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망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마르크스가 바라보는 바쿠닌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본인과 엥겔스처럼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들처럼 어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러한 ‘우리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하는 것일까? 이 그럴듯한 이야기 속의 마르크스의 삶은 우리에게 어떠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을까? 분명히 지젝과 같은 이는 이 책을 ‘마르크스 혁명 사상의 핵심에 가닿은 걸출한 소설’이라며, 어떠한 이정표처럼 읽으려 하는 듯 하다. 저자 또한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만 살려고 하는 세상에서 그렇게는 살지 않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말하며 어떠한 고집을 말하고 있다. 그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는 살지 않겠다’는 고집을 마르크스 삶의 중요한 요소로, 이 이야기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이 고집이 또 다른 해석의 이론이 아니라 ‘그럴듯한 이야기’를 통해 제시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그럴듯한 이야기를 통해 19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마르크스는 우리처럼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 우리와 엮여 있게 된다. 그의 고집은 이해할 수 있으면서(그를 둘러싼 불합리한 자본주의의 폭력에 대한 대항으로서)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생존 자체가 위협당하고, 가족들의 희생과 함께 살아가기에) 모순으로서 묘사되는데, 이 모순은 이론적인 모순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매일매일 겪고 있는 삶의 모순이다. 마르크스가 겪는 여러 상황들은 일상의 삶 자체이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예니, 엥겔스, 헬레나와 같은 사람들의 삶, 마르크스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삶과 죽음. 필자는 ‘왜 마르크스는 귀환하는가’를 또 다른 방식으로 대답해줄 텍스트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다만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그럴듯한 이야기의 대상은 마르크스다. 인간주의를 거부한 마르크스. 그를 인간으로서 그려냈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인간주의적 드라마로 쓰여졌다는 뜻은 아니다. 마지막 결말부의 ‘유령’에게 하는 마르크스의 외침, 『자본』이 누구를 위해 쓰여졌는지를 말하는 그 푸닥거리의 외침은 가족사의 푸닥거리로 멈추지 않는다(어떤 외침이었는지는 직접 읽어보고 확인해보길 권한다). 『자본』이라는 역작의 출간이라는 사건 이후 마르크스가 유령을 만나고 푸닥거리를 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어떠한 인간상(그것이 영웅적이든 평범하든간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저 삶이 있을 뿐이다. 노동자를 바깥에서 관찰하고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그 자신이 19세기 자본주의의 변두리에서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극복하려고 했던 삶의 여정이 『자본』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흐름이다. 그래서 감히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그의 삶과 그의 이론의 의미의 밀접성을 보여주고, 그의 삶이 우리의 삶과 매우 닮아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삶과 이론의 분리불가능성, 실천과 노동, 이론의 관련성이야말로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이론적 전회가 아닌가. 그 점에 비추어보았을 때 이 이야기는 마르크스에 대해 어떠한 해석을 내어놓는 것도 아니고, 고증의 엄밀성을 극한으로 추구한 것도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마르크스에게 ‘충실’하다. 데리다의 말대로, 유령은 언제든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면 늘 다시 돌아와 우리 앞에 나타난다. 마르크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삶 또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유령이다. 우리의 현재로 인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유령. 마르크스는 돌아왔고 또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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