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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정치철학연구회
■ [한국일보] 손호철의 발자국

<18> 토벌대의 두 얼굴: 차일혁과 김종원

by 공방 RGCPP-gongbang 2020. 12. 9.

원문보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20412370002072

 

손호철의 발자국 <18> 전남 구례 화엄사

토벌대의 두 얼굴: 차일혁과 김종원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차일혁경무관이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살린 화엄사. 손호철 교수 제공

 

지리산에 많은 절들이 있지만, 지리산을 대표하는 절은 역시 구례의 화엄사다. 화엄사로 가기 위해 폭우를 뚫고 지리산 남쪽으로 들어서자 '화엄경'의 위력인 듯 맑은 날씨가 나타났다. 일주문을 지나 절로 들어가자, 천년고찰에 어울리지 않는 추모비가 나를 맞았다. ‘차일혁경무관 추모비’다.

차일혁, 그가 누구이기에 역사적인 화엄사의 경내에 추모비를 세운 것인가? 그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다. 그는 “빨치산들이 절을 은신처로 사용하니 이를 불 지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절의 문짝들을 떼어와 그것만 불 질러라.” 의아해하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절을 태우는 데는 반나절이면 충분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문을 다 없애면, 빨치산들이 숨지 못할 것이다.” 그의 덕으로 천년고찰은 살아남았다. 인기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장하림(박상원)의 이야기로 드라마화되기도 한 이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추모비를 파격적으로 경내에 세운 것이다.

구례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차일혁경무관 추모비. 그가 화엄사를 불 지르라는 지시를 어기고 천년고찰을 살린 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손호철 교수 제공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남원 뱀사골 입구에 있는 역사관에서이다. 빨치산 토벌에 대한 이 역사관에서 나는 벽에 크게 써놓은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5천년 이어져온 우리 민족사라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지리산 빨치산과 토벌대의 대결은 극히 짤막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이 짧은 시간에 부상한 두 개의 조국!/그 조국을 위해 이 땅에 뜨거운 피를 흘렸던 이 땅의 젊은이들!/그들에게 있어 조국은 둘인가? 하나인가?/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빨치산을 토벌하던 토벌대, 토벌대에 희생된 빨치산도/같은 역사의 피해자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을까?/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에게 물어보라!/공산주의가 무엇이고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지리산에서 사라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에게 물어보라!/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 있게 답할 자 몇이나 있겠는가?

차일혁경무관이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살린 화엄사.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아니 누가 이런 글을!”하고 놀라서 읽어보니, ‘토벌대 전투경찰 제 18대대장 차일혁’이라 쓰여 있었다. 토벌대장이 이런 글을 쓰다니,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차일혁(1920-1958)은 백선엽, 박정희 등 많은 경찰과 국군 지휘관들이 친일경찰이나 일본장교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독립군출신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한인교사를 연행하는 일본인 형사를 폭행한 뒤 상해로 망명해 중앙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 조선의용군에 입대해 항일유격전을 했다. 특히 아들 차길진씨가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상해에서 의열단의 아나키스트그룹과 가까워 일제요인 암살계획에 참여했고 해방 후 미군정이 일본 관리들을 그대로 중용한 것에 분노하여 권총을 구해 악명 높은 일본형사 등을 처단해 미군정의 수배를 받았다고 한다.

내장산공원에 있는 차일혁동상. 그는 이승만 정권의 눈에 나서 불운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경찰영웅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손호철 교수 제공

 

이후 그는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에 활동하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전투경찰 대대장으로 특별 임명되어 지리산 토벌대장으로 활약했다. 의문이 드는 것은 아나키스트였고 해방 후 일본경찰을 차단할 정도로 강한 항일투사였던 그가 왜 갑자기 우익단체에서 활동하고 친일경찰을 중용한 이승만 정부 편에 섰느냐는 것이다. 사상적 변화를 일으킨 것이었나? 아니면 아나키스트로서 ‘공산독재’보다는 독재로 왜곡되었지만 남한이 상대적으로 나은 ‘차악’이라고 판단한 것인가?

토벌대장으로 그는 빨치산을 잡으면 인간적으로 대접해 전향시켜 빨치산을 추적하는 특수부대로 운영했다. 이 같은 전술로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는데, 그 때도 그의 시신을 화장해 스님을 불러 독경을 하게한 뒤 그 재를 정중하게 섬진강에 뿌리고 하늘을 향해 세 발의 권총을 쏘는 예의를 갖춰줬다. 이에 대해 다른 지휘관들이 뭐라고 하자, “죽은 뒤에도 빨치산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라고 쏘아줬다고 한다. 그는 빨치산 토벌이 끝나면 “깊은 산속의 절로 들어가 이념의 대결 속에 짓밟힌 무주고혼(無主孤魂)의 명복을 빌고 내 몸에 스며든 피비린내를 씻고 싶다.”고 했다.

민간인 학살 등 여러 반인류적 범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던 김종원(왼쪽).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제공

 

문제는 차일혁은 ‘극소수의 예외’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예외가 아닌 ‘주류’의 대표적인 인물은 여순사건에서 소개한 바 있는 김종원(1922-1964)이다. 그는 일본군 하사관에 자원입대해 남태평양에서 미군을 상대로 싸웠고 그 때 인육을 먹으며 버텼다고 자랑했다. 해방 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품행과 성적 불량으로 간신히 졸업했다. 제주 4.3 진압을 위한 파견에 반대한 14연대의 봉기로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진압작전을 지휘했는데 무리한 상륙작전으로 많은 부하를 잃었다. 여수를 탈환하자 화풀이로 시민들을 초등학교에 모아놓고 일본도로 목을 자르는 등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그의 경력은 빨치산을 잡는다며 민간인을 학살한 ‘학살의 역사’였고, 사람들은 그를 ‘살인마 김종원’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이 나자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영덕에서 수백 명을 학살했고, 마산과 부산형무소에 갇혀있던 정치범 3,500명을 학살하는 데도 개입했다. 대표적인 민간인학살인 거창(정확히 말해 산청)학살 때도 아이들과 여자들이 대부분인 500명의 피난민을 집단학살했다.

중요한 것은 차일혁은 혁혁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밉보여 한직을 전전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면, 김종원은 이승만의 비호 속에 승승장구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가는 데 ‘차일혁들’은 뒤편으로 밀려 났고 수많은 ‘김종원들’이 중용되어 온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현대사의 비극의 원인, 한국이 제대로 된 보수를 갖지 못하고 아직도 한심한 극우세력이 보수진영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유이다.

파주 한국근대현대사박물관에 있는 민주당 1956년 선거 포스터. 김종원은 이 선거에서 승리한 장면부통령의 저격을 사주했다. 손호철 교수 제공

 

차일혁은 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 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청소년들을 돌보는 등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지만 위로부터는 미움을 받아 지방을 전전했다. 이현상을 사살한 공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조선의용대로 중국공산당과 같이 활동했고 빨치산에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기까지 했다. 공주경찰서장으로 1958년 여름 가족들과 금강으로 피서를 가 수영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아들 차길진씨에 따르면, 조선의용대 때 불렀던 민중가요인 ‘볼가강의 노래’를 부르며 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고 얼마 뒤 시체로 발견됐다고 한다. 평소 수영실력이 뛰어났다는 점에서 그가 이승만정권의 현실에 비관해 자살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산청함양추모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촤덕신 준장(오른쪽 끝), 김종원 대령(왼쪽 끝) 등 민간인학살 주범 4인방 조각. 손호철 교수 제공

 

반면 김종원은 승승장구했다. 거창학살에 생존자가 있어 이를 알리자, 국회에서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는 부하들을 빨치산으로 위장해 조사단을 기습했다. 외신의 대대적인 보도로 위장작전이 드러나 3년 징역형을 받았다. 이승만은 특별사면을 추진했고 육군참모총장이 반대하자 “그는 이순신에 견줄만한 애국자”라는 특별성명을 발표하려 했다. 육군참모총장은 할 수 없이 그를 사면했다. 그는 이승만의 비호 속에 승승장구해 56년에는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승진했다. 56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후보가 저격당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배후가 바로 그였다. 당시는 흐지부지됐지만, 4.19혁명이 일어나자 4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당뇨병으로 병보석 출감해 1964년 병사했다.

민주화 이후 차일혁은 ‘호국경찰의 상징’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고 김종원은 그 죄상이 비판받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현실 속에서는 차일혁과 김종원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79년 12월 12일 전두환 일당이 쿠데타를 했을 때도, 이에 반대했던 장태완, 정병주 장군, 김오랑 소령 같은 ‘참군인’들은 도태됐고 전두환, 노태우, 정호영 같은 ‘정치군인’들이 승리해 승승장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광주 5.18민중항쟁이 북한특공대의 짓이라고 주장하는 의원들조차 징계하지 않는 우리의 냉전적 보수정당, ‘꼴보수정당’에서 나는 김종원의 얼굴을 읽는다. 한국의 보수를 이 같은 ‘꼴보수’가 아니라 글로벌 스탠다드의 제대로 된 보수로 개혁시키기 위해 고전분투하고 있는 유승민 전의원 등에서 나는 차일혁의 얼굴을 읽는다. 차일혁이 패배하고 김종원이 승승장구하는 한국보수의 비극은 언제나 끝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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