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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 손호철의 발자국

<20> 5·18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오늘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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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21809090003801

 

손호철의 발자국 <20> 전남 광주

5·18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오늘의 투쟁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전남 광주 망월동 5·18기념공원에 5·18민중항쟁추모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는 뜨거운 맹세/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5·18민중항쟁의 대변인으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사살당한 노동운동가 윤상원과 야학동지였던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져 5.18의 상징이 된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망월동 윤 열사 무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자니 눈물이 난다. 나는 기자로 5·18을 폭도에 의한 것으로 보도하라는 신군부에 저항해 제작거부를 하다 유학을 떠나야 했다. 귀국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5·18묘역이었고, 광주를 갈 때면 여기를 들린다. 내가 가는 묘역은 사람들이 으레 찾는 웅장한 5·18기념공원이 아니라 그 옆의 초라한 구 묘역이다. 항쟁 중엔 가족들이 훼손된 사체를 손수레에, 도청함락 후에는 청소차에 희생자들을 실어 와 묻은 ‘역사적 성지’다. 나에게 진짜 묘역은 이 옛 묘역이다.

5·18기념공원에 비해 초라하지만 역사성, 현장성을 지니고 있는 5·18 구 묘역. 앞 줄 가운데 묘지가 윤상원이 묻혔 있던 곳으로, 윤상원의 사진도 놓여져 있다.

 

광주의 비극은 구조적으로는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군의 정치화’, 사건사로는 그 산물인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하나회)의 야욕에 원인이 있다. 이를 전제로 힘을 합쳐 이들과 싸우기 보다는 개인적 욕심에 서로 싸우기에 바빴던 양김(김대중, 김영삼)과 잘못된 결정을 한 학생운동도 부차적인 책임이 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하지만 일이 꼬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를 탐지, 김재규를 체포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지만, 정승화 계엄사령관 등 다수 장성들은 군의 탈정치화를 원해 위험인물인 전두환을 지방으로 보내려 했다. 이를 안 전두환은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군을 장악했고 단계적으로 권력을 손에 넣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유혈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들을 막을 것은 ‘시민의 힘’밖에 없었지만 양김도, 학생운동도 오판을 했다.

박정희 사망 후 찾아온 ‘서울의 봄’에 양김은 경쟁에 바빴고 군에 빌미를 준다며 시위를 자제시켰다. 학생운동도 오판을 했다. 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 명의 학생·시민이 모였지만 심재철 서울대학생회장 등의 주도로 ‘회군’을 결정했다. 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 금지, 휴교, 언론 통제강화조치를 내렸다. 김대중과 김종필을 각각 소요조종과 부정축재로 체포, 구속했고 김영삼을 가택 연금시켰다. 이미 지적했듯이, 신군부는 루비콘강을 건넜기 때문에 이들과의 일전은 불가피했다. 그 장소는 당연히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아 군의 행동이 제약을 받고 사태를 ‘지역주의’로 호도할 수 없는 서울이어야 했다. 잘못된 회군으로 광주가 ‘희생양’이 된 것이다.

신군부의 잔인한 광주초토화 작전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당시 사진. 5·18자유공원(구상무대)의 전시돼 있는 걸 찍은 것이다.

 

5월 18일, 주요 도시에 계엄군이 배치됐다. 반 년 전 김영삼의 국회 제명이 부마항쟁을 불러일으켰듯, 김대중 구속은 광주를 자극해, 학생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신군부는 기다렸다는 듯 11공수여단을 추가파견하고 잔인한 진압에 들어갔다. 분노한 시민들이 저항에 합류했다. 20일 200대의 택시, 버스가 정적 시위를 벌이며 계엄군의 이동을 막았다. 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21일 시민들은 최후의 자위책으로 나주, 화순경찰서 등에서 획득한 무기로 무장했다. 계엄군은 철수, 광주를 포위했다. ‘해방구 광주’가 생겨났다. 해방구는 계엄군이 시민군사령부였던 도청에 진입, 최후의 사수대를 사살한 27일까지 유지됐다. 그 기간 동안 광주는 범죄 하나 없었고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공동체’였다. 희생자는 163명, 부상 후 사망자 101명, 행방불명자 166명, 부상자 3,139명, 구속 등 피해자 1,589명 등 5,000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신군부는 5·18을 폭도로 몰아 두 번 죽였다. 호남의 한은 깊어졌고 지역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신군부의 총칼에 맞서 광주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5·18자유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이다.

 

광주의 영웅적인 투쟁은 처절한 패배로 끝났지만, 화려하게 부활했다. 87월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특히 일부 극우세력이 5·18을 모욕하며 누리고 있는 자유까지도, 광주에 빚지고 있다. 특히 광주는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던 진보의 부활을 가져왔다. 반미운동과 진보운동들이 부활했다. 5·18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리 민주투쟁의 금자탑이다.

금남로 전일빌딩 외벽에 붉은 페인트로 표시된 헬기총탄 자국들이 아직 남아 있다. 245개의 총탄 자국을 기리기 위해 빌딩이름도 전일빌딩245로 바꿨다.

 

5·18의 가장 중요한 현장인 전남도청 옆에는 광주의 중심인 금남로의 랜드마크 같은 건물이 있다. 전일빌딩인데 이름이 ‘전일빌딩 245’로 바뀌었다. 이 빌딩은 군이 피신한 시민들을 향해 헬기사격을 했다는 논쟁의 현장으로 245는 발견된 탄흔의 수다. 붉은 페인트로 표시한 탄흔들을 보고 있자, 신군부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이에 대해 증언해온 고 조비오 신부를 전두환이 회고록에서 거짓말쟁이라고 비판해, 조 신부의 가족들이 전두환을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판사들이 이곳에 와 직접 보면 끝날 일을 왜 긴 공방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다행히 답사를 다녀온 이후, 지난 달 말 법원은 헬기사격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 전두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빌딩 옥상은 시민들이 모였던 금남로 사거리와 시민군 사령부였던 전남도청을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5.18현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다. 전남도청을 내려다보고 있자, 윤상원 등 그곳에서 산화한 최후의 투사들이 생각나 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전일빌당 옥상에서 전남도청과 분수대 등 5·18의 역사적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5·18 해결을 위한 5원칙이 있다.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 손해배상, 정신계승이다. 명예회복, 피해보상 등은 대부분 이루어졌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도 전두환, 노태우 구속 등으로 일정 정도 이루어졌지만 미진한 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 총격 지시의 책임자를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고, 계엄군의 성폭력 등 숨겨진 피해 사실도 더 밝혀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5·18의 진상규명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야 합의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해 의욕적으로 조사작업을 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 그 동안 5·18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던 냉전적 보수정당(국민의 힘)의 새 대표에 오른 김종인 대표가 묘역에 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이 모두에도 나는 ‘역사의 후퇴’를 우려한다. 극우 포퓰리즘 속에 전두환 때도 없었던, “5·18이 북괴특수군의 소행”이라는 황당한 주장이 공공연하게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제 1야당의 국회의원들이 이 같은 가짜뉴스를 공공연하게 주장해도, 이를 징계조차 못 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것이 일회성으로 그칠 지나가는 ‘한 때의 바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세상은 진실이 무엇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진영논리만이 난무하고 있다. 세상은 아무리 그것이 가짜 뉴스라고 하더라도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진실’인 ‘포스트트루스(Post-Truth)사회’, ‘탈진실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에 설치된 '5·18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조형물.

 

새로 제정한 5·18 왜곡처벌법이 어느 정도 제어기능을 하겠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다. 통과된 최종법안은 처벌 범위를 허위사실로 한정해 우려되는 독소들을 많이 제거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위안부가 자발적 취업이었다는 허위사실 유포를 처벌하기 위해 위안부왜곡처벌법을, 마찬가지로 여순처벌법, 4·3처벌법 등등도 만들어야 하나? 보수정권이 ‘5·16혁명’ 왜곡처벌법을 만들면 어쩌나? 오죽하면 이런 법까지 만들었을까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상징인 5·18이 학문의 자유를 훼손하고 민주주의를 해쳤다는 오명을 쓰게 되는 ‘소탐대실’이 걱정된다.

아르헨티나의 실종자 어머니들의 모임인 5월 어머니회는 “우리 자식들은 현재의 운동 속에 살아있고 자식들의 정신을 돌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되며 생명을 금전화해서는 안 된다”며, 사체 발굴, 기념물 건립, 배상에 반대한다. 대신 매주 목요일 노구를 이끌고 그 때 그 때의 현안을 가지고 시위를 해오고 있다. 최고의 5·18 기념사업은 웅장한 기념물이 아니라 그 정신을 계승한, 모든 반민주적 요소에 대한 현재의 투쟁이다. 그것이 5·18이 영원히 사는 길이며, 이를 통해 우리사회가 진정으로 민주화될 때, ‘5·18 북한 주도설’ 같은 가짜 뉴스들도 사라질 것이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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