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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ㆍ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고백록 - 아우구스티누스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22286.html#csidxdddf18be5cf33f594690b6b36768032

※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 한겨레신문 '책과 생각' 섹션에 철학에서 정치경제학까지 다양한 인문서를 4주마다 소개합니다.

자기로의 귀환, 새로운 권력을 만나다

 

강민혁 /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로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 이르는 4세기 동안 지중해 세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 변화를 이끈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 교회였다. 초기 호교가(護敎家)들과 신학자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자들, 즉 이교도로 불리는 ‘철학자’의 무기를 적극적으로 빌려다 사용한다. 그것은 적의 무기를 빼앗아 그 무기로 적과 싸운 꼴이었다.

그들은 과거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간 내면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과거 엘리트들에게만 유통되던 철학적 언어가 새로운 도덕적 감수성으로 변하여 대중에게 놀라울 만큼 빠르게 퍼진다. 그 변화의 정점에 북아프리카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이교도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결합으로 극치를 이룬다. 그는 플로티노스의 플라톤주의를 거쳐 이루어진 ‘자기 자신에게로의 귀환’을 극적으로 서술한다. 그런데 그것은 땅을 파면 팔수록 지구 반대편 우주로 가는 것과 같았다. 내 영혼 안으로 깊이 들어가자 미약한 내 영혼의 눈(이성)은 그 눈 위에 ‘변하지 않는 빛’을 본다.(7권 10장 16절). 놀랍게도 그 빛은 세상을 창조하고, 자기 자신을 근거 짓는 빛, 다시 말하면 바로 신이다.

기묘하게도 자기를 파고 들어가니, 신이 웅크리고 있다. 그곳은 인간의 깊숙한 내면, 자기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심층의 자기이다. 자기를 넘어서는 높은 곳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넘어서는 깊은 곳. 아마도 진리(veritas)인 신이 인간에게 내려와 관여하는 장소일 것이다. 또 그곳은 “나는 존재하는 나다”(ego sum qui sum)라는 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이미 신으로 둘러싸인 자신을 느끼기 마련이다(8권 1장 1절).

그러고 보면 <고백록>은 교회장치가 마음을 함락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신의 말씀을 듣고 ‘새 의지’가 생겨도, 그 의지는 약해서 오랫동안 자신을 사로잡았던 ‘옛 의지’를 이겨내지 못한다. 이 옛 의지는 습관의 폭력으로 생긴 죄의 법에 따라 통치되고 있어서, 내 영혼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8권 10장 10~12절). 이제 내가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면의 집에서 일어나는 자기 자신과 싸움이다(8권 9장 19절).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전 고대세계와 중대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신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 죄를 둘러싸고 자기와 자기의 관계가 다시 정립되고 있었다.

죄 앞에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는 도덕적 감수성으로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로의 귀환이 신이 들어앉은 자기를 탄생시켰다. 이 자기를 통해 공동체는 완전한 연대감과 개방성을 동시에 구성해낸다. 물론 저 연대감이 부유한 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새로운 감수성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해도 신과 천사의 시선 아래에서 완전히 공적인 것이 된다. 평등의 실루엣이 신기루처럼 올라오자, 동시에 마음을 목표로 하는 우울한 권력이 정밀한 언어를 타고 내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인간의 품행을 대상으로 삼는 매우 특이한 유형의 권력, 사목 권력이 무대 중앙에 등장하는 결정적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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