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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ㆍ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선악의 저편 - 프리드리히 니체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29100.html

 

※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 한겨레신문 '책과 생각' 섹션에 철학에서 정치경제학까지 다양한 인문서를 4주마다 소개합니다.

 

선악의 저편에서 내려다보다

 

강민혁 /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를 쓴 1884년 이후, 니체는 4부를 쓰면서 <선악의 저편>을 동시에 쓰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주저라고 할 수 있을 <도덕의 계보>(1887)와 그때까지 쓴 방대한 유고들은 엄청난 가속도로 날아가던 니체의 마지막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저 비상을 개구리에서 시작해보자.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올려다보이는 대상은 실제보다 크게 보인다. 형이상학은 우리 주변의 현실 세계는 보잘것없는 가상으로 보면서, 올려다보는 신이나 이성은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여겼다. 이 개구리의 관점 위에서 신과 이성을 은밀히 숭배하는 독단론적 철학들이 득세한다.

니체는 이 철학들을 두고 아름답고 힘이 센 바보 당나귀가 출현했다고 조롱한다. 인도의 베단타 철학, 그리스의 플라톤주의,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은 그리스도교가 모두 그렇다. 현대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이제는 신이나 이성뿐 아니라 가족, 회사, 국가, 심지어 여론도 하늘인 양 올려다본다. 과거에는 하나의 유신론적 만족에 빠졌지만, 지금은 사회 전체가 여러 독단론에 빠진다. 바야흐로 개구리와 당나귀의 세상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은 니체의 관점주의(Perspektivismus)를 옹호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철학은 항상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창조한다. 철학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철학은 전제적인 충동(Trieb)이며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이기 때문이다. 즉, 개구리의 관점에서는 당나귀의 세계만을 창조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영리해지자. 놀랍게도 개구리의 관점에서조차 세계가 창조되고 있지 않은가!

니체의 관점주의는 단 하나의 참다운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 대해 다양한 표상이 생긴다는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다. 관점주의적 해석에 기초해서 생겨난 가상이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 여기에 이르러서 참으로 니체다운 세계가 펼쳐진다. 개구리의 관점에서 성립되었던 저 독단론들이 모두 삶에 일정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다. 즉, 신, 이성, 진리, 회사, 국가도 다름 아니라 삶을 견디도록 하는 가상들이었다.

니체의 이 결정적인 반전은 우리의 문제를 바꾸어 버린다. 모든 것이 얼마나 생명을 촉진하고 보존하며, 더 낫게 육성할 수 있느냐에 달린다. 니체에게 철학적 저항이란 오류나 거짓조차 삶을 위해 다르게 사용하는 것, 더 나아가서 그것을 통상적인 가치 감정에 반하여 사용할 줄 아는 쾌활함이다. 이른바 ‘모든 가치의 가치전환’(Umwertung aller Werte)이다.

좀 더 높은 영혼은 위에서 내려다본다. 높은 영혼에게는 신, 이성, 국가, 회사 기타 등등이 모조리 다르게 출현한다. 회사로 장갑을 짜고, 국가로 오토바이를 타자. 선악의 저편에서.

정신이 무너져내리기 직전, 니체는 그가 도달한 정신의 황홀한 광경을 한꺼번에 풀어놓는다. 아마 자신도 사유의 가속도를 가늠하지 못했으리라. 1888년 니체는 친구 페터 가스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명랑해져야 할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느낀다네.” 토리노의 하숙집 여주인은 열쇠 구멍으로 니체가 나체 상태로 춤추는 모습을 본다. 니체는 엄청난 가속도로 솟아올라서 저 명랑한 춤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선악의 저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아카넷(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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