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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 한겨레신문 '책과 생각' 섹션에 철학에서 정치경제학까지 다양한 인문서를 4주마다 소개합니다.
성을 사유하라, 쾌락을 사유하라
강민혁 /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 아래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마르크스가 일정한 관계 아래에서만 자본이 구성된다는 것을 비유하여 한 말이다. 사실 여성만큼 이 말이 맞는 대상도 없다. 일정한 관계 아래에서만 여성은 억압받는 아내, 교환되는 재산이 된다. 흑인이 그 자체로는 노예가 아니듯이, 아내나 하인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오면 그녀는 더이상 남성의 조력자가 아니다. 아니다 싶은 가지를 툭 분지르는 것처럼 우리도 저 관계를 찾아 잘라낼 수 있을까.
게일 루빈은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와 레비스트로스로부터 돌파구를 찾는다. 원시 부족은 선물 증여를 통해 다른 부족과 친밀한 관계를 확보한다.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선물로 보답하겠다는 의지와 관계의 승인이다. 만일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로 준다면 그 관계는 더 공고해질 것이다. 이 원시적 호혜성에서 결혼은 선물 증여의 가장 핵심적인 형태인데, 그때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여성이었다.
특히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선물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치다. 종족 내 결혼을 금지하면 허용된 성적 파트너와 금지된 성적 파트너로 성적 선택의 세계가 나뉜다. 즉, 족내혼(族內婚)을 금지함으로써 씨족 사이의 결혼 교환이 강제된다. 남성들은 이 금기 위에서 ‘여성 거래’(traffic in women)를 실행함으로써 그들만의 사회적 관계를 창출한다. 생물학적 여자(female)를 원자재로 하여 순치된 여성(women)이라는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짇고리와 재봉틀 같은 이 사회적 장치가 이른바 ‘섹스/젠더 체계’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기묘한 벼랑을 만난다.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 사회는 단일한 섹슈얼리티만 허용한다. 모든 사람은 평범한 이성애자이자 기혼자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 의미에서 친족체계란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를 사회적 수준에서 강고하게 문화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프로그램은 단일 섹슈얼리티를 낳은 기존 문화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남성을 절멸하더라도 여성해방은 어려울 거라고 게일 루빈은 반문한다.
이것은 페미니즘이 품은 일종의 아포리아다. 루빈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욕망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라 특수한 사회적 실천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섹슈얼리티는 끊임없이 다양하게 생겨난다. 그것은 억압되기보다 사회적으로 발생한다. 단일한 이성애를 넘어 새로운 쾌락, 새로운 섹슈얼리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이 영토에 거주하는 다양한 섹슈얼리티들은 젠더를 넘어 함께 연대하며 금기 안으로 침투한다. 예컨대 레즈비언은 여성 억압뿐 아니라, 퀴어이자 도착자라는 관점으로도 탄압받는다. 소수자 레즈비언은 게이 남성, 사도마조히스트 등 경계의 섹슈얼리티와 함께 성의 장치에 대항한다. 쾌락들이 권력을 뒤쫓고, 침투하고, 뒤흔든다.
페미니즘은 성적 쾌락과 성애적 정의를 옹호하는 혁명적 사유를 산출해왔다. 새로운 주체의 생산은 새로운 쾌락의 생산이다. 새로운 쾌락은 네트워크가 인정하는 쾌락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생성된다. 그것은 네트워크의 경계에서 다른 쾌락들과 함께 꽃핀다. 성을 사유해야 한다. 그만큼 쾌락도 함께 사유해야 한다. 쾌락이야말로 권력관계에 대한 반격의 거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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