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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ㆍ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역사유물론 연구 - 에티엔 발리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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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33402.html#csidxa96359cc4ad0e018f8e62fb9d025b50 

 

역사유물론, 혁명을 혁명하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균열과 모순이 마르크스 사상을 기각하는 논거이거나, 제거해야 할 오류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하다. 혁명은 사전에 이미 확립된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도 현실과 운동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새로운 현실, 새로운 운동은 문제를 새롭게 구성하고, 이론 내의 개념을 재구성하거나 변형하고, 또 오류들을 정정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도, 마르크스주의도, 노동자 운동도 매번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발리바르도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기존의 것들과 싸우며, 그것을 새롭게 갱신하려 했다. 특히 1970년대 발리바르는 ‘잉여가치 분석’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핵심요소로 당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싸운다.

예컨대 <자본론>의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해서도 오해가 난무한다. 당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던 이론가들은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출발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하나의 ‘정치경제학’을 발전시키고자 시도하거나(이것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의미를 망각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단지 정치경제학의 모순과 한계를 폭로하는 도구로만 인식한다(이것은 ‘정치경제학 비판’을 ‘비판적 정치경제학’으로 전도한 것이다!). 마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대응하는 프롤레타리아 정치경제학이란 실체가 따로 있다는 듯이.

발리바르는 ‘잉여가치 분석’을 통해서 이런 속류적 접근들과 싸운다. 회계적 관점에서 잉여가치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수적인 소비수단의 가치에 새롭게 추가된 가치 초과분이다. 그러나 초과분은 모든 생산양식에 존재하므로 놀랄 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초과분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발생하는가이다.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전과 싸움은 달라진다.

눈을 돌려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자. 노동력이 자본주의적 형태 아래에서 이미 자본화된 생산수단에 의해서 소비될 때에만 그 초과분은 비로소 잉여가치가 된다. 다시 말하면 잉여가치로 지칭되는 우리 시대의 초과분은 자본이 투입되는 장소인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내에서만 존재한다.

더 나아가보자. 생산의 출발점인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항상-이미’ 상품형태이므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언제나 가치를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가치의 재생산은 동시에 잉여가치의 생산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잉여가치의 생산 없는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잉여가치는 착취에 의해서만 가능하므로,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착취 없이는 가치도 없다.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 그것은 착취하는 것이다.

이 순간 ‘정치경제학 비판’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불가피하게 결합하는 생산과정, 특히 착취와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용광로에 접근하는 행위가 된다. 결국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하나의 정치경제학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사회적 과정(착취와 계급투쟁)의 효과와 계기로서 가치 형태에 접근하는 이론적 실천, 즉 ‘역사유물론’이다.

사실 최근의 장년 발리바르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청년 발리바르로부터 멀리 달아나 있다. 그도 과거의 그와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저 달아남도 새로운 현실 속에 있는 새로운 마르크스에게 다가가고, 더불어 혁명을 혁명하는 일이리라.

역사유물론 연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현실문화(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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