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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소용돌이다
미셸 푸코는 자신의 철학적 형성이 하이데거를 통해서 결정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하이데거를 읽지 않았다면 니체도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또 1982년 강의에서 주체와 진실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 20세기 철학자는 라캉과 하이데거 이외에 드물며, 자신의 강의를 그 하이데거의 편에서 시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적 여정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푸코에게 하이데거가 숨어 있었다.
물줄기를 따라 산에 오르듯, 푸코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읽는 하이데거는 박진감이 넘친다. 알려지지 않은 하이데거의 주저이자 강의록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의 저 도발적인 제목을 보라. 중세 교회의 종탑에서나 튀어나올 법한 ‘형이상학’이라니.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형이상학’(Metaphysik)은 초감각적인 것들, 즉 피안의 세계라는 의미의 통념적인 형이상학이 아니다. 그는 형이상학의 메타(meta-)를 “일상적인 사유와 물음에 반발하는 하나의 독특한 태도전환”이라고 새로 새긴다. 전승된 형이상학의 개념이 앞선 자 뒤서고, 뒤선 자 앞선 격으로 완전히 뒤집힌다.
그렇다고 그가 동시대인들처럼 과학을 통해 사물의 객관적 인식에 몰두하지도 않는다. 과학은 나무, 동물, 땅, 사회 같이 그때그때 눈앞에 보이는 ‘존재자’(das Seiende)만 다룬다. 그것들은 서로 다르게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다르게 존재하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어떻게 모두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는 제대로 모른다. 숱한 개별 나무들에 가려서 정작 숲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das Sein)의 의미에 관해서 묻는 것을 소홀히 여겨왔다.
하이데거는 동시대인과 달리 뒤돌아서서 우리 자신에게로 향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공허하고 권태로워지지만, 황급히 위안거리를 찾아 곧 그 공허와 권태를 덮어버린다. 어쩌면 통속적인 일상이란 그런 권태를 쫓아내고 덮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덮고 감추어서는 ‘존재’에 관해 물을 수조차 없다.
인간 현존재(Dasein)란 사물이나 동물과 달리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독특한 존재자다. 철학은 인간의 의식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을 불러 깨우는 기예이다. 이 기예는 위안거리로 공허함을 덮지 않고, 차라리 공허 속에 내버려져야 작동된다. 자명한 것 가운데 가장 자명한 것조차 문제 삼을 때 비로소 철학의 격투는 시작된다.
그렇다면 철학은 안심이나 보증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언제나 불안과 권태의 불확실성을 이웃 삼는 소용돌이다. 이제 우리는 그 소용돌이 안으로 휘말려 들어가 홀로 환상 없이 현존재를 파악하게 된다. 위장된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밖으로 나가기”라고 말한다. 실존한다(existiert)는 것, 그것은 ‘바깥으로 나가기’이다.
하이데거는 신학이나 경험과학 같은 대상의 객관적 인식이 어떻게 존재를 잊게 했는지 폭로하였다. 푸코는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등이 신학과 경험과학의 틈에서 잊혔던 자기배려의 사유를 무언중에 재발견하고, 주체 존재의 변형을 재성찰한다며 철학사를 재구성한다. 하이데거는 그 소용돌이의 심장부이다.
[책&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http://www.hani.co.kr/arti/SERIES/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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