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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ㆍ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기록시스템 1800·1900 - 프리드리히 키틀러

기록시스템 1800·1900 프리드리히 키틀러 지음, 윤원화 옮김/문학동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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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53083.html#csidx88509752587638eb16d1bbdbf6c30d2

 

글쓰기는 밤의 내전이자 놀이이다

 

강민혁.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어린 시절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새벽기도를 가곤 했다. 더 큰 고역은 온갖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어찌나 길던지 지금도 진땀이 다 난다. 성경을 필사해 읽고, 일기에 감상을 쓰기도 했다. 성경과 기도의 문자들이 우박처럼 꽂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런 고역이 반복될수록 마치 예수님이 내 손을 잡아 이끄시는 것 같고, 마음은 영롱해졌다. 반복해 읽고 쓰는 일이 숭고한 의미를 밝히고 있었다.

아마 독일의 매체철학자 키틀러라면 이를 두고 ‘1800년대식’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1800년대를 앞두고 어느 문필가는 “산다는 것은 글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로마 시대로부터 전해진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다’란 명제가 ‘인간은 글쓰는 자다’로 바뀔 참이다. 이때 글쓰기란 ‘어머니의 입’으로 상징되는 신 혹은 자연의 의미를 ‘문자’로 드러내는 행위였다. 여기서 문자들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그 뒤에는 초월적이고 숭고한 정신이 있다. 키틀러는 문자를 기록매체로 삼은 이 체계를 ‘1800년대식 기록시스템’(Aufschreibesystem)이라고 부른다.

나이 들어 난데없이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과 달리 도무지 알 수 없는 용어가 출몰하고, 낯선 문장이 끊이지 않았다. 한 문장 읽는 것이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러다 성경 필사처럼 니체의 난삽한 아포리즘을 베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흰 종이에 쓰인 검은 글자들과 문장들이 부품들의 조립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때때로 컴퓨터에 베껴 쓰면 조립품 감각은 더 생생해졌다. 이제 의미-해석조차 조립될 뿐이라고 생각해 대가(大家)의 글을 해석하는 데 용감해졌다.

단순히 문자들의 집합체가 아닌 의미의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였던 1800년대식 글쓰기는 타자기가 보급되면서 갑자기 붕괴한다. 연필을 손에 쥐고 흰 종이 위에서 의미를 찾아 연속적으로 문자들을 그리던 글쓰기는 갑자기 자판기 위에 있는 철자들을 조합하는 행위로 둔갑한다. 이제 글쓰기는 자연의 말을 문자로 이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기호들의 놀이로 바뀌었다. 바로 타자기를 기록매체로 삼은 ‘1900년대식 기록시스템’이다.

키틀러에게 중요한 것은 ‘기록’(Aufschreibe)이고, 더 들어가 보면 그것은 기록하는 기술 그 자체, 즉 기록하는 기록매체의 양식들이다. 이 기록매체들에 따라 사유 방식도, 사유 결과도, 심지어 사유하는 주체도 바뀐다. 종이에 글을 쓸 때는 수정이 어려우므로 치밀한 구상 아래 기승전결이 매끄러운 사유와 주체를 만든다. 그러나 컴퓨터로 글을 쓸 때는 쓰면서 구상하고, 단어와 문구를 오리고 붙일 뿐인 조립품 같은 사유와 주체가 있을 뿐이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에세이를 써서 공유하곤 했다. 그때마다 내 생각을 컴퓨터 자판기로 써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종일 커서만 껌뻑거릴 뿐 단 한 문장도 써내지 못하기 일쑤였다. 도대체 내겐 생각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단 말인가. 이 탄식 앞에서 잡동사니 단어와 소음만 뱅뱅 돌았다. 정신은 잡음 속에 파묻힌 밤이다. 그러나 니체는 저 백색잡음 앞에서 또는 뒤에서 글을 썼다. 글쓰기는 밤의 내전이자 놀이이다. 오히려 밤이어야 불꽃놀이와 야전(夜戰)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겨레 책&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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