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56833.html?fbclid=IwAR0eWP3-yjdZxPsxmnnmPSMSNAAWnDXSeqi6EIuJNx5Cr0eecmD-pq-w9h4#csidx1c25af9445d78619d264320cdb4678a
자유인, 자기로 되돌아갈 줄 아는 자
후기 스토아 철학을 주도한 세 명의 철학자는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세네카는 귀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 그리고 에픽테토스는 다리에 장애가 있는 노예였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던 세 사람이 같은 철학으로 묶이는 것은 징후적이다. 스토아 철학이 신분을 넘어 공유될 정도로 급진적이었음을 뜻한다.
특히 에픽테토스는 밑바닥에서 솟아난 자기배려의 철학자다. 그는 삶을 해안에 정박 중인 배에서 내려 물을 구하러 가는 모습에 비유한다. 가는 길목에 조개나 알줄기를 주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는 중에도 선장이 부르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뒤돌아보아야 한다. 만일 선장이 부르면 조개나 알줄기 따위 모두 두고 즉시 되돌아가야 할 태세다.
여기서 배는 자기 자신이다. 배로 돌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기(epistrephein pros heauton)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 지위, 평판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너에 관해 말하는 것에 마음을 쓰지 마라. 그것은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니까.” 그건 언제든 내게서 사라진다. 심지어 함께 살아온 가족이나 자신의 육체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것들은 자기에게 붙어 있지만, 궁극적으로 자기가 아닌 것들이다.
그러나 믿음, 충동, 욕구, 혐오 등은 자기에게 속한다. 사건이나 사물에 관한 판단들, 재산이나 쾌락에 대한 충동이나 욕구, 타인에 대한 혐오, 즉,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표상은 실제로 저항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다. “먼저 외적 인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일단 시간을 벌어 늦춘다면, 너는 손쉽게 너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기묘하다. 새로운 주체들이 모래언덕처럼 흘러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둘러싼 여러 사건·사물과 관계 속에 있는 주체다. 타자와 관계하고 있는 주체, 그 관계로 발생하는 행위와 태도의 주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주체. 다시 말하면 ‘자기’는 그저 신체이거나 행위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들과의 사이에서 매번 생성하는 관계이자 그로부터 흘러내리는 주체들이다. 이 사이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지배하는가, 문제는 그것이다.
이제 ‘자유’와 ‘노예’의 의미도 새로워진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롭고, 훼방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지만,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무력하고, 노예적이고, 훼방을 받으며, 다른 것들에 속한다.” 에픽테토스는 자유인 신분인 제자를 두고 노예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회적 신분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노예적인 것을 자유로운 것으로 여기곤 하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자기로 되돌아갈 줄 아는 자다. 노예는 자기로부터 멀어져 되돌아가지 못하는 자다. 삶의 기술(tekhne tou biou)은 격투기에 가깝다.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노예의 타격에 대해 평형을 유지하며 펀치를 날려야 하니까. 자기 아닌 것의 주위를 돌며 끊임없이 팔을 휘두르는 아웃 복서의 스텝, 그것이 자기배려가 이끄는 경쾌한 몸놀림이다.
'■ [한겨레ㆍ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사이토 고헤이 (0) | 2020.10.09 |
---|---|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 질베르 시몽동 (0) | 2020.09.12 |
기록시스템 1800·1900 - 프리드리히 키틀러 (0) | 2020.07.11 |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 가라타니 고진 (0) | 2020.06.14 |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 마르틴 하이데거 (0) | 2020.05.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