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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ㆍ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사이토 고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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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65099.html#csidx07b01d65ff6e52c8c253c1838bb1205 

 

생태사회주의의 문을 만나다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사이토 고헤이 지음, 추선영 옮김 / 두번째테제(2020)

 

마르크스가 기술 진보와 생산력 발전을 무분별하게 칭송했다는 비판은 늘 있었다. 부르주아에 대한 존경심에서 솟아난 듯한 <공산당 선언>의 문장들은 마치 유토피아의 초대장으로 여겨질 정도다. “부르주아지는 백 년도 채 못 되는 그들의 계급 지배 동안 앞서간 모든 세대를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창조했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형상대로 세계를 창조한다.” 자본의 진보적 성격에 대한 찬탄은 가을밤 불꽃놀이처럼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강물이 바다 길목에 들어서면 소금의 기운이 번지고 다른 물이 되듯, 마르크스도 <자본>의 바다에 이르자 다른 마르크스가 된다. 사이토 고헤이가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GA) 속에서 마르크스가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한 이 책 2부는 마르크스학의 백미다. 특히 1864년에서 1868년에 이르기까지 지대와 관련한 농학 저작들에서 발췌한 노트, 각종 편지 등 전집의 처마 그늘을 뒤져 마르크스가 생태학에 눈뜨는 과정을 복원한 장면들은 눈부시다.

리카도부터 시작해보자. 리카도는 인구가 증가하여 식량 수요가 증가하면 비옥도가 더 낮은 토지를 경작할 수밖에 없고, 동시에 같은 토지에 자본을 연이어 투자하면 그 토지에서 생산되는 생산량은 그 전보다 감소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사람이 많아지면서 동시에 한정된 토지의 생산성도 떨어져 곡물 생산은 점점 줄어든다는 뜻이다. 이른바 수확 체감의 법칙. 그러나 마르크스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그런 적이 없고 기술과 생산성이 발전하면 이 문제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마르크스다.

그러나 1865년 발췌 노트의 마르크스는 완전히 새로운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농학자 리비히는 작물을 계속 재배하려면 식물이 토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질 양분을 반드시 돌려주어 보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찰스 다윈보다도 먼저 다윈주의를 주장한 인물”인 농학자 프라스가 생산성에 기후가 큰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 점에 주목한다. 예컨대 필요한 기온보다 낮은 지역에서 곡물을 경작하면 그 곡물은 토양을 고갈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한계를 알고 경작방식을 세심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의식하지 못한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평가한다.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프라스의 농학은 자본주의의 급소를 찌르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관계 아래에서 고삐 풀린 채 이윤만을 지향하는 농업은 토양을 급격히 고갈시켜 장기 지속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 토양 고갈에 대처하기 위해 자본 투자가 증가하면 다시 생산비용만 상승시킨다. 자본이 인간과 자연 간 물질대사(Stoffwechsel)를 찢고, 전 지구를 고갈시킨다.

마르크스는 리카도의 텅 빈 법칙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과학적 응답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자연을 어떻게 고갈시키는지를 깨달아간다. 사유의 툇마루에서 일어난 주체의 짜릿한 변형이다. 저쪽으로 넘어가는 문은 언제나 벽에 붙어 있는 법이다. 그러니 더듬어 벽에 닿아야 문도 만난다. 생태사회주의의 문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벽에 부딪혔을 것인가.

강민혁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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