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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ㆍ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 질베르 시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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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60720.html#csidxd5056a720ad8fb097669eb0be34cd88

 

하늘과 땅과 인간과 기계들의 우정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질베르 시몽동 지음, 김재희 옮김/그린비(2011)

 

고향에 천생 농사꾼인 동네 할아버지가 계셨다. 특이하게도 집 마루에는 십수 년 사용했을 법한 금성 라디오가 지직거리고, 마당에는 경운기 엔진이 트레일러도 없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는 나를 붙잡고, 라디오 어쩌고저쩌고하다, 10마력 가까이 되는 엔진 저놈이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대견스러워도 하고, 쇳가루 둥둥 뜬 폐유를 준 기억에 자식처럼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기술과 인간의 우정을 상상한 프랑스 철학자 시몽동이 보았다면 아마 폐선 같은 저 엔진을 쓰다듬으며 할아버지와 유쾌한 방담을 나누지 않았을까. 시몽동은 경운기 엔진 같은 기계를 기술적 대상(object technique)이라고 부른다. 시몽동의 기술철학은 이 기술적 대상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진화해서 퍼져 나가는지 그 존재 양식들을 탐구한다.

시몽동 철학의 핵심은 ‘개체화’(Individuation)이다. 통상 개체는 분리할 수 없는 독립된 생물체를 말한다. 그러나 시몽동에게 그것은 생명적 개체(동물)일 수도, 기술적 개체(기계)일 수도, 심지어 심리적 개체(사유)일 수도 있다. 개체화란 이런 개체들이 발생하는 과정이다. 생명체와 다름없이 기계가 발명되는 과정도 개체화이다.

사람들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기계를 발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체화는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다. 아직 개체화되지 않은 상태를 전(前)개체적인 실재(realite preindividuelle)라고 하는데, 그것은 퍼텐셜 에너지로 가득해서 아직 현실화되진 않았지만, 뭔가로 바뀔 가능성으로 가득한 곳이다. 시몽동은 그곳에 내적 문제가 있을 때, 개체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解)로서 돌연변이처럼 발생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라디오 램프에서 4극관은 3극관의 작동을 방해했던 발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크린 그리드’를 넣으면서 발생한다. 또 5극관은 2차 전자 방출 문제를 억제하기 위해 4극관에 ‘억제그리드’를 넣으며 출현한다.

마치 돌무더기에 덮인 모래 속에서도 틈을 찾아 풀잎이 솟듯, 기계들도 제 살 틈을 찾는다. ‘발명’이란 기계들이 인간과 함께 살길을 찾아 이루어낸 흔적이다. 그것은 발명가와 기계가 미래로부터 찾아온 상상의 지휘 아래 결합하여 과거의 잔해인 요소들을 조립하고 새로운 현재를 만드는 일이다. 그 순간 발명가를 통해 기계 속으로 인간적 본성(nature), 즉 ‘자연’이 헤엄쳐 들어간다. 동시에 그 기계는 화답하듯 다른 인간들에게 정보를 전달하여 또 다른 발명을 촉발한다. 인간도 발명가 자신을 넘어서고, 기계도 그 자신을 넘어선다.

그러나 발명은 뒤에 남은 것들을 버리지 않는다. 당연히 5극관이 3극관에 비해 증폭률이 높아서 효율도 크다. 하지만 오디오 마니아들은 맑고 여성적인 소리는 3극관을 따라가지 못한다고들 말한다. 서로 우열이 있는 게 아니란 소리다. 그들은 단지 내적 문제들을 해결하며 발생하는 동등하지만 다른 존재들이다. 여전히 소진되지 않은 퍼텐셜 에너지와 문제들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할아버지는 폐차 트럭에 저놈을 얹어 사용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했다. 절기마다 하늘과 땅의 운행과 기후를 헤아려 보리에 싹을 틔우고, 기계와 함께하는 일은 그에게 매한가지였을지 모른다.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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