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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ㆍ책과 생각]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 가라타니 고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49041.html#csidx131f7e428d3ce29b4cbd9eebee6fe9b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게 행하다

 

진의 시황제는 죽을 때 환관 조고에게 장자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조서(詔書)를 주었다. 그러나 조고는 천자의 서거를 숨기고, 막내인 호해를 옹립하여 급히 궁정으로 귀환한다. 이를 두고 가라타니 고진은 “죽음은 그가 차지하고 있던 관계에 공백이 생기는 일이며, 살아남은 자는 그것을 메우고 관계를 새롭게 재편성한다”고 쓴다. 두려운 것은 시황제의 죽음으로 생겨난 한순간의 ‘진공’이고, 그 이후 변형될 새로운 체제다. 조고는 이 두려움 때문에 시황제의 공백을 은폐한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이런 진공은 언어 체계와 유사하다. 고진이 사례로 든 영어 단어 ‘스마트’(smart)는 영어로 ‘머리가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에 오면 ‘호리호리한’, ‘세련된’, ‘멋있는’ 등의 뜻으로 바뀐다. 원래 어떤 의미가 있어서 스마트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스마트라는 음성과는 다른 일본어 음성과의 차이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고진은 이런 ‘변화’에도 죽음과도 같은 공백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이 공백을 거치고 새로운 의미(시니피에)가 정립되기만 하면, 이 의미가 음성(시니피앙)의 차이 때문에 발생했다는 진공 같은 기원은 곧 은폐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런 방식으로 마르크스도 읽자고 한다. 마르크스에게 핵심 논의 대상은 상품의 가치이다. 앞서 말한 언어 체계에서 ‘의미’처럼, 상품의 가치도 다른 상품들과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예컨대, 책 한 권의 ‘가치’는 담배 네 갑, 과자 열 봉지 등의 ‘다양한 사용가치들’과 관계 속에서, 즉, ‘사이’에 존재한다. 고진의 관점에서는 가치의 기원도 진공인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치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것은 ‘화폐’라는 단일 상품이 다른 사용가치들을 싹 쓸어버리고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상품을 하나로 묶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상품마다 고정된 가치가 따로 응고된 것처럼 여긴다. 즉, 화폐 형태가 일단 정립되면, 그간 다양한 관계로 표현되던 가치형태가 은폐되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가치형태)을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게 행한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익숙한 관점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것을 단지 확인하기 위해 읽을 뿐이라면, 그것은 읽는 행위라고 할 수 없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 ‘작품’ 이외에 어떤 철학이나 작자의 의도도 전제하지 않고 읽어야 진정한 읽기라고 말했다. 그 순간 이제까지 ‘사유되지 않은 것’을 찾아 진정으로 읽게 된다. 이 책의 제목처럼 “마르크스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는다”란, 작품 내부에서 마르크스조차 지배할 수 없었던 마르크스의 숨은 요소를 발견해서 다른 가능성으로 읽는다는 뜻이다.

책과 함께 고진 자신도 크게 변화해 갔다. 이 책의 어떤 부분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 되었다. 또 어떤 다른 부분은 <트랜스크리틱>, <세계사의 구조>로 바뀌어 갔다. 물론 화폐(상품)와 언어의 아날로지(유비)를 생각한 것은 고진이 처음은 아니다. 그리고 그의 관점은 소비과정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노동자를 소비자로만 상정할 위험도 따른다. 그러나 고진이 현대 동아시아인의 철학적 읽기와 글쓰기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특별한 철학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강민혁 /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은행원이자 철학자인 강민혁씨가 철학에서 정치경제학까지 다양한 인문서를 소개하는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를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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