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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 손호철의 발자국

<1> 종교가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의 비극 ... '이재수의 난'

원문 보기: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81009110005722

 

[손호철의 발자국] <1> 제주 모슬포항에서 만난 '신축민란'

* 편집자주 -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종교가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의 비극 ... '이재수의 난'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1901년 제주도에서 실제로 일어난 천주교인과 주민들간의 충돌 사건을 다룬 영화 '이재수의 난' 한 장면. 최초의 한국 프랑스 합작영화였다. 네이버 영화 소개 캡처

 

“여아대(如我待).” 이 증표를 가진 사람을 “나를 대하듯 하라.” 고종이 병인양요(프랑스함대가 천주교도학살 탄압에 대항해 쳐들어온 사건)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 신부들에게 줬다는 증표다. 이는 조선조 말 주권을 잃어버린 비극적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증표는 결국 1901년 5월 ‘변방’이었던 제주에서 민란과 비극적인 천주교도들의 학살을 가져오게 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주도의 대표적인 비극인 4ㆍ3보다 45년 전에 제주도에 또 다른 비극이 생겨난 것이다(제국주의에 의한 한말 개방기와 해방정국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이 모두 제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한국근현대사에서 제주가 차지하는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축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신축민란’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이재수가 주도했다고 해서 ‘이재수의 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주도세력측은 ‘1901년 제주항쟁’이라고, 가톨릭에서는 ‘제주신축교난’이라고 부른다. 이 비극은 4ㆍ3 등 제주의 한을 형상화해온 현기영 작가의 '변방에 우짖는 새'라는 소설로 알려지기 시작, 이정재와 심은하가 주연한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이재수의 난을 다룬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책 표지(왼쪽), 이 소설을 각색해 만든 영화 '이재수의 난' 포스터.

 

19세기 말 제주는 제주도민은 육지로 못 나간다는 오래된 금지령은 풀렸지만, 두 폐해로 민생이 한계점에 달했다. 그것은 ‘세폐(세금폐해)’와 ‘교폐(종교폐해)’였다. 재정난에 빠진 고종은 제주도에 세무관을 파견해 새로운 세금들을 징수해 민생은 파탄에 빠졌다. 또 ‘여아대’ 패를 가진 프랑스 신부들이 주도하는 성당은 치외법권지대가 됐고 이 위세를 등에 업은 일부 신도들은 악행을 일삼았다. 선교를 한다며 제주도민들이 신성시해온 신당을 부수는가 하면 관아와 결탁해 세금이라며 금품을 갈취하고 성범죄까지 저질렀지만, ‘여아대’때문에 관아는 이를 방관했다.

결국 대정군내 양반과 유지들이 이 같은 폐해에 대항하기 위해 상무사라는 것을 조직해 물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자 일부 신도들이 마을 유지인 훈장과 친지들을 잡아 교당에 가두고 고문하다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정군수는 검시관으로 관노 이재수를 데리고 시신을 검시하고 범인을 잡으려 했지만 범인이 교당으로 숨어버려 잡을 수 없었다. 이에 도민들이 분노하고 있었는데, 천주교도들이 다시 상무사 위원 집을 공격했고 상무사들은 보복으로 대정의 천주교당을 습격했다. 며칠 뒤 상무사는 ‘규탄 민중대회’를 열었고 다시 양측의 충돌이 벌어졌다. 천주교도들이 무장하고 민중들에게 사격을 가해 주민이 즉사했고 지도부까지 납치했다.

평소 무예가 뛰어났던 이재수는 납치당한 지도부를 대신해 지도자로 부상했고 무장봉기를 결심, 각 고을에 격문을 보냈다. 40명의 포수를 비롯한 수천 명의 장정이 대정에 모여 총칼과 죽창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민군을 둘로 나누어 동서로 돌아 제주로 진격했고 그 과정에서 세폐와 교폐에 시달리던 많은 주민들이 이들을 환영했다. 기록에 따르면, “마을사람들이 다들 칭송하기를, 이재수는 인물이 영웅답고 한라산의 정기를 받아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재수는 제주성에서 가까운 황사평에 진을 치고 제주관아와 협상을 했다. 5월 25일, 성문을 열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 신부는 나흘간의 빌미를 달라고 답해 시간을 벌면서 인천에 정박한 프랑스 함대를 보내달라고 프랑스 공사관에 연락했다. 하지만 28일까지 함대는 오지 않았고 민군은 제주성에 입성했다. 민군은 입성 후 300여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0일 프랑스함대가 도착했다. 이 배를 타고온 신임목사(도지사)는 세폐, 교폐의 시정을 약속했고 항쟁은 진압됐다.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되어 근대적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제주 모슬포항 근처 대정마을 구석에 있는 제주 대정 삼의사비. 뒷면에 빽빽이 쓰여 있는 비문의 첫 문장이 감동적이다. 손호철 교수 제공

 

이 항쟁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주된 흔적은 민란 지도자 이재수 등 세 명의 ‘의사’(의로운 투사)를 기리는 ‘제주 대정 삼의사비’다. 이 비는 모슬포항 근처인 대정마을 추사 김정희 유배지 앞 오거리 한 구석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아 근처 주유소 직원에게 물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삼의사비는 원래 1961년 대정리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인데 여러 압력과 도로확장 등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마모되어 1998년 대정청년회가 낡은 비를 묻고 그 위에 새 비를 세운 것이다. 어렵게 찾은 그 비 앞에 서서, 위에서 아래로, 그것도 아주 작은 글씨로 촘촘하게, 써놓아 읽기 쉽지 않는 비문을 읽기 시작하자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첫 문장이 충격적이었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이 민란에 의해 목숨을 잃은 천주교도들의 무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의 무덤은 역설적으로 이재수와 민란참가자들이 진을 쳤던 황사평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 교단쪽이 피해보상으로 금전적 보상이외에도 이곳을 달라고 요구해 희생자들의 집단묘역을 만든 것이다. 내비에 ‘황사평’이라고 치자 ‘천주교 황사평 성지’가 바로 나타났다. 넓게 자리 잡고 잘 정돈된 묘역 끝으로 가면 ‘순교자묘역’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이 방문자들을 맞는다. 이곳은 ‘성지’이고, 이곳에 묻힌 사람들이 ‘순교자’들인가?

 

제주 근교인 황사평에 있는 신축민란 희생자들 묘지의 비석. 이 비석의 첫 문장이 삼의사비와 아주 대조적이다.손호철 교수 제공

 

돌 뒤에 쓰여 있는 글은 ‘순교자’, ‘성지’라는 표현과 거리가 있다. 글은 기이하게도 첫 문장이 “1901년 신축교난 당시 연락을 받은 두 척의 불란서 군함함장들이 사태수습을 위하여 제주도에 왔지만 교난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많은 천주교인들은 관덕정에서 피살되어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이다.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아, 무언가 떳떳하지 않는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당시 사건조사를 위해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조사팀의 조사결과는 천주교도들의 폐해가 심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기술하고 있고, 이 문제에 대한 교회 측의 문서에도 일정하게 이를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정당한 항쟁이었는가. 아니면 부당한 종교탄압이었는가. 이는 단순히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는 ‘관점의 차이’만은 아닌 중요한 역사적 사실 문제이다. 다행히 2003년 천주교 측과 1901년 제주항쟁 기념사업회는 화해했다. 천주교측은 서구제국주의의 한국침략기에 선교과정에서 “제주민중에 대한 과거의 잘못에 사과”했고 1901년 제주항쟁 쪽은 봉건왕조와 외세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인명살상의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했다고 한다.

이재수가 이끈 민군이 공격했던 제주성의 일부. 제주성의 대부분은 일제가 부셔서 항만공사에 사용해 얼마 남아있지 않다. 손호철 교수 제공

 

제주 시내에도 민란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중심가에는 항쟁의 원인이 됐던 제주관아와 성당이 있다. 새로 건축한 성당 자료관 벽에는 제주도 천주교의 역사를 요약한 연대표에서 1901년의 사건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일제가 제주항 건설을 위한 자재로 쓰려고 허물어 버렸지만 아직 일부 남아있는 제주성이 당시 제주민중들의 한을 증언하고 있다. 성을 쳐다보고 있자, 마침 성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마치 이 비극을 다룬 소설제목처럼 ‘변방에 우짖는 새’ 이재수의 혼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삼의사비에 쓰여 있던 충격적인 첫 구절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재정권과 손잡고 국민들을 우롱했던 일부 종교기관들, 나아가 우리 시대의 모든 종교에게 던지는 경고로 나에게 들려왔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비록 찾는 이 없이 제주도 대정마을 한 구석에 버려져 있지만, 삼의사비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아직도 살아있는 현재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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