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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정치철학연구회
■ [한국일보] 손호철의 발자국

<2> 서북 청년단의 광기는 끝났는가

by RGCPP-gongbang 2020. 8. 25.

원문 보기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81618280003909

 

손호철의 발자국 <2> 제주 4ㆍ3 항쟁, 세계에서 가장 큰 행불자 묘역

편집자주 -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서북 청년단의 광기는 끝났는가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4ㆍ3 행방불명자묘역. 타 지역형무소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학살당한 3,900여명의 행불자들의 시신없는 무덤이다. 손호철 교수 제공

 

“아니 이게 도대체 몇 개야?”

제주 4ㆍ3 평화공원을 가다가 지난번 왔을 때 못 봤던, ‘4ㆍ3 행방불명자 묘지’라는 팻말을 보고 산으로 차를 돌렸다. 별다른 안내판이 없어 묘역을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그 곳에 들어서자 끝없이 이어진 묘비를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세계의 많은 희생자 묘역을 가봤지만, 무려 3,953명의 묘역, 그것도 시신도 없는 행방불명자 묘역은 처음 봤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큰 행불자 묘역'일 것이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묘역이 영남, 호남, 대전 등 지역별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4ㆍ3과 관련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한 이승만 정부가 이들을 도내에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많은 혐의자들을 육지의 형무소로 보냈는데,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들을 집단학살했고, 이들은 낯선 외지의 혼이 되고 만 것이다.

여순, 대구 코발트광산, 대전 산내골, 거창, 광주 5ㆍ18 등 한국현대사에 학살의 비극은 많다. 비극의 정도를 따지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한국전쟁을 제외하면 4ㆍ3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일 것이다. 정부의 공식 집계만 해도 사망자 수는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가 1만 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1,764명 등 1만 4,032명이다. 행방불명된 사람 등을 합치면 제주도민의 8분의 1에서 10분의 1인인 약 3만명에서 6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정부의 공식 집계와 미군정보고서가 밝히고 있듯 희생자들의 80%는 토벌대에 의한 것으로 어린이와 여자, 노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경관뿐 아니라 역사의 현장, 역사적 기념물도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지역일 것이다. 4ㆍ3 때 골짜기마다, 마을마다, 학살을 당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섬 전체가 학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제주시내에 있는 해병대주둔기념비도 어떤 의미에서는 4ㆍ3의 현장이다. 이 비는 1949년 진해에서 해병대가 창설된 뒤 그 해 12월 제주도로 이동해 사령부를 설치한 것을 기념하고 있는데, 한국전쟁이 터지자 3,000여명의 제주도 청년들이 자원 입대해 ‘무적해병’의 전통에 기여했다고 쓰여 있다. 4ㆍ3의 광풍 속에서 빨갱이로 몰려 죽지 않으려면 해병대 입대가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었다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4ㆍ3 관련 학살을 형상화한 제주 4ㆍ3평화공원의 조각들. 손호철 교수 제공

 

해방정국의 모든 비극이 그러하듯 4ㆍ3은 분단과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에서 시작됐다. 미군정이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경찰과 관리를 계속 중용한 데다가 잘못된 경제정책을 편 결과 민생고가 매우 심각했다. 특히 대부분의 물품을 육지에서 가져와야 하는 제주 지역은 잘못된 정책에 따른 식량난 등 물품난에 허덕여야 했다. 게다가 미군정에 고용된 관리와 통역 등은 이와 관련해 엄청난 비리를 저질러 민심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ㆍ1절 행사 도중 기마경찰의 말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항의하며 경찰서로 몰려간 군중에 경찰이 총격을 가해 여러 명이 죽고 부상을 당했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모르는 미군정은 ‘좌파’ 집회 주동자들이 경찰서를 습격한 것으로 잘못 알고 이들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민심은 더욱 악화됐다. 남로당은 이 같은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민간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까지 파업에 참여하는 등 제주 직장의 95%가 파업에 나섰다. 미군정은 파업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다. 파업 참여 경찰들을 대량 해고하고,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단으로 빈 자리를 메웠다.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한 기독교 극우세력인 서북청년단이 경찰에 가세하면서 미군정과 친일 극우경찰 대 제주 민중들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어 갔다.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던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70%가 빨갱이라고 보고 극우세력의 강경책을 지지했다.

양자 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은 4ㆍ3항쟁에 의해서였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분단의 영속화를 의미하기에 많은 도민들이 반대했고, 제주도의 남로당원들은 그해 4월 3일 새벽 도내 24개 지서 중 12개를 일제히 공격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수 주둔병력을 제주도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들이 봉기하는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간신히 군을 제주로 파견할 수 있었다.

군은 해안선에서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고 발표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군에 대항해 게릴라전으로 승리하며 중국을 차지한 마오쩌둥은 일찍이 “게릴라가 물고기면, 대중은 물”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승만 정부는 ‘게릴라를 잡으려면 물을 없애면 된다’는 위험한 발상으로 작전을 벌였다. 정부는 우선 중산간지대에 살아온 도민들을 해안지대로 소개시킨 뒤 집을 불태워 오랜 생활 터전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이후 무차별 학살로 초토화시켰다. 이 같은 광풍 속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해야 했다. 광풍이 지나간 뒤에도 제주도민들은 ‘빨갱이’란 오명과 연좌제의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다.

'순이삼촌'의 무대인 오팡땅에는 학살당한 사람들을 상징한 돌들이 눕혀져 있다. 손호철 교수 제공

 

쉬쉬하던 4ㆍ3이 처음 공개적으로 논의된 건, 그것도 문학작품이란 우회 형태로 논의된 건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25년 이상이 지난 1979년에 이르러서였다. '순이 삼촌'을 쓴 현기영씨는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보안사에 끌려가 죽도록 맞고 고문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정부는 그를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하지 않았다. 재판을 통해 4ㆍ3이 공론화되는 걸 우려해서였다. 결국 4ㆍ3의 비극이 발생한 지 50년이 지난 1999년에야 진상조사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는 진상조사를 통해 2003년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을 인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이어 2014년 박근혜 정부가 4월 3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기독교협의회 역시 2018년 4ㆍ3 70주년에 맞춰 서북청년단의 악행과 관련해, 기독교인들도 학살에 참여한 것을 사죄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세력들은 4ㆍ3이 ‘좌익폭동’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국가기념일로 정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4ㆍ3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모험주의적이기는 했지만 분단에 저항했던 좌파들의 4ㆍ3항쟁이라는 ‘항쟁적 측면’과 이후 이루어진 ‘학살’이라는 두 측면을 종합적으로 인식해야 가능하다.

제주 4ㆍ3평화공원은 4ㆍ3의 배경인 해방정국서부터 4ㆍ3까지 아주 잘 정리해 놓은, 한국에서 손 꼽을 만한 역사기념관이다. 4ㆍ3을 하나의 관으로 상징한 조형물 등도 빼어나다. 그러나 진짜 감동적인 역사의 현장들은 제주 곳곳에 숨어 있다. ‘순이 삼촌’ 동네가 그 중 하나다. 제주시 동쪽에 위치한 조천 북촌마을 너븐숭이 4ㆍ3유적지에 들어가면, 돌로 원을 그려 놓은 도톰한 흙무더기 위에 놓인 작은 인형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부모들과 함께 학살당한 아기들을 위한 ‘애기무덤’에 묻힌 아기들이 저승에서라도 가지고 놀라고 놓은 장난감들이다. 이 어린 생명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조천 북촌마을의 애기무덤. 엄마와 함께 학살당한 애기들을 위한 토끼 인형이 애초롭다. 손호철 교수 제공

 

매년 1월 17일 북촌마을 곳곳에서는 슬픈 울음소리가 이어진다. 이승만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49년 1월 17일, 근처에서 토벌대원 두 명이 무장대의 공격을 받고 죽자, 토벌대가 그 보복으로 마을을 포위하고 어린이를 포함한 마을사람 400여명을 모아놓고 집단학살했기 때문이다. 한 마을의 제삿날이 똑같은 동네, 그곳이 바로 북촌마을이다. 거기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오목하게 파인 초미니 분지 같은 곳이 나타난다. 제주말로 옴팡밭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학살의 현장이자 '순이 삼촌'의 무대로 순이 삼촌비가 자리 잡고 있다.

제주의 해변길 등을 걷는 올레길은 제주의 인기 상품이다. 북촌마을에도 나름의 올레길이 있다. 학살현장 등 4ㆍ3의 현장을 걸어서 돌아보는 북촌마을 43길이다. 이 길에 있는 북촌포구를 걸으며 아름다운 바다로 눈길을 돌려 봤지만 눈에 어른대는 것은 너븐숭이 4ㆍ3기념관에 들어섰을 때 나를 압도했던 장면이다. 타오르는 한 자루의 촛불 뒤쪽으로 천정 끝까지 길게 늘어진 검은 천 세 조각에 끝없이 쓰인 희생자들의 이름들. 이들의 이름 사이에 보이는 검푸른 바다를 보면서 나는 물었다. 인간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 것인가. 맹목적 애국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세계적 기준으로 볼 때 중도우파에 불과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빨갱이’라고 거품을 품고 있는 일부 극우세력들의 광기를 보고 있으면, '서북청년단’이 과연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새로운 4ㆍ3’을 배태하는 증오의 정치는 이제 멈춰야 한다고 4ㆍ3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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