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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정치철학연구회
■ [한국일보] 손호철의 발자국

<11> 외눈박이 뉴라이트 환상 깨는 일제의 거대한 금고를 보라

by RGCPP-gongbang 2020. 10. 20.

원문 보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01609300004593

 

손호철의 발자국 <11> 군산과 목포

외눈박이 뉴라이트 환상 깨는 일제의 거대한 금고를 보라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일본으로 수탈해갈 쌀 등을 보관했던 군산부두의 한 창고. 벽에 그려진 안중근의사의 손바닥 벽화가 눈에 띈다. 손호철 교수 제공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쫘르르 쏟아져 버리면서/강은 다하고,/강이 다하는 남쪽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사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는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눈물.”

말년의 친일활동으로 빛이 바랬지만 뛰어난 작가 채만식의 '탁류'와 목포를 대표하는 유행가 '목포의 눈물'의 도입부이다.

최근 한 지역 국회의원 관련 의혹으로 문제가 됐지만, ‘근대로의 시간여행’으로 인기를 끄는 곳이 군산과 목포다. 한반도의 곡창인 호남의 항구인 두 도시는 원래 한양으로 쌀을 실어 나르던 작은 포구였는데,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쌀을 수탈해가기 위해 개발하면서 번창했다. 하지만 일제가 망하고 냉전으로 중국을 향하고 있어 교역항으로 의미를 잃으면서 낙후하고 말았다.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로 ‘서해안시대’가 열리면서 목포에는 대형 조선소가, 군산에는 자동차공장이 들어서는 등 기대를 모으기도 했지만, 최근 다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군산항 일대 모습. 손호철 교수 제공

 

세계경제의 국제분업 속에서 두 도시에 강제된 변화가 이 두 도시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것이다. 그 같은 역사에서 두 도시는 해방 후 경제발전과 도시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덕으로 일제강점기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어 ‘근대로의 시간여행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즉 일본제국주의 덕분에 발전했고, 일제의 최대 피해자중 하나인 위안부도 ‘자발적인 매춘’이며, 일제하에서 조선인에 대한 특별한 차별이 없었다는 극우적인 주장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 두 도시로의 시간여행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식민 경제지배의 전형적인 특징은 식민지의 식량과 광물 등 1차 상품을 싼 값에 수입하고 공산품을 식민지에 수출하는 것이다. 이 같은 식민주의 하에서는 ‘민족자본’이 중심이 된 ‘민족적인 산업화’는 어렵고 식민지를 1차 산업에 묶어두는 데 이해가 일치하는 식민제국주의와 지주계급의 지배동맹이 자리 잡게 된다.

이와 관련, 식민수탈의 창구였던 군산과 목포는 일제하에서 새로운 근대적인 건물과 제도 등의 이식과 식민지적 수탈이라는 이중적인 과정을 겪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것 자체가 폭력적 수탈을 동반하는 과정이지만, 식민지의 자본주의화는 식민지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특히 그 폭력성, 수탈성이 극심했다.

 

일종의 쌀 선물시장이었던 군산 미곡취인소. 손호철 교수 제공

 

군산의 일제지배의 흔적은 역시 쌀이다. 군산의 근대거리를 거닐다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미두장 터다. 미두장은 일제가 전통적인 쌀시장을 금지시키고 만든 일종의 선물거래식의 쌀 거래 시장으로 이를 통해 일제는 곡물시장을 독점했다. 일본은 단순히 쌀을 통제한 것이 아니라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쌀을 생산하는 농지자체를 통제했다. 일본인들은 군산지역 토지의 80%를 소유하고 있었고 동양척식회사 등을 통해 농지를 기업식으로 경영하면서 농민들은 날로 궁핍해져만 갔다.

박물관의 도표들은 일제수탈의 강도와 그 과정에서의 군산의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20년 우리나라의 쌀 총생산량은 1,270만석이었고 이중 14.5%인 185만석이 일본으로 수탈되어 갔다. 그러나 14년 뒤인 1934년에는 1,640만석이 생산되어 그중의 50%가 넘는 870석이 일본으로 갔다. 수탈량이 5배 이상 늘어났고 국내에서 소비할 수 있는 쌀의 양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지역별로 보자면 1914년 기준으로 군산이 무려 40%에 달했고 1926-33년의 평균도 전체 쌀 수출의 22%를 군산에서 수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군산앞바다에 정박한 일본화물선에 쌀을 실기 위해 만든 부잔교. 손호철 교수 제공

 

과거 쌀 등을 보관하던 일본식 쌀 창고, 조선을 수탈하던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는 것을 관장하던 군산세관 등을 거닐다 보면, 조선을 수탈해 군국주의의 몸통을 만들었던 일본의 지주 등과 이들에게 고통 받아야 했던 조선 민중의 슬픔이 대조되면서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군산의 쌀 수탈의 하이라이트는 부잔교이다. 부잔교는 부두에서 배로 쌀을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실을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이동식 부두이자 당시로는 최첨단의 수송시설이다.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느껴보도록 옛 항구에 재건해 놓은 부잔교를 보고 있자, 문득 군산이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지인 정읍으로부터 70㎞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일제가 군산을 쌀 수탈항으로 변모시키기 얼마 전, 호남의 농민들은 오랜 수탈과 신분적 차별에 저항해 혁명을 일으켰고 중앙의 정예진압군 3개 대대 800명이 바다를 통해 도착했던 곳이 바로 군산이다.

동학군은 이 진압군을 격파했지만 결국 일본의 개입으로 일본군, 정부군, 양반군들에 의해 처절하게 패배하고 다시 소작농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이 피땀 흘려 경작한 쌀들은 지주들을 통해 이곳 군산항으로 모였고 부잔교를 통해 일본으로 실려 갔다. 저 부잔교에는 동학농민의 눈물이 실려 있는 것이다.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목포근대역사관 1관. 옛 일본영사관건물이다. 손호철 교수 제공

 

군산에서 서해안을 따라 두 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만나는 곳이 목포다. 군산이 전북과 김제평야의 수탈창구였다면, 목포는 전남과 호남평야의 수탈창구였다. 목포 역시 군산만큼 일제 강점기의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목포근대역사박물관(2관)은 악명 높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이다.

이 회사는 원래 1908년 일본자영농을 한반도에 이주시키기 위해 설립했지만, 이주 희망자의 부족으로 농업경영회사로 변신하여 조선의 농민들을 가장 많이 수탈한 국내 최대의 지주회사였다. 이에 대한 분노로 나석주의사가 동척에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동척은 전국에 9개의 지점을 뒀는데 그 중 하나인 목포지점은 1921년에 건설했다.

 

원래 악명높았던 동양척식회사 건물은 이제 목포근대역사관 2관으로 변신해 일제의 목포수탈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손호철 교수 제공

 

목포는 1897년 10월 개항을 해 여러 나라들에 공동조계를 배분하고 근대적인 국제항으로 변신했다. 일본흥업주식회사는 목포근교의 농지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목포에는 일본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일본인은 ‘남촌’에, ‘북촌’에는 조선인이 사는 ‘식민지도시’, ‘이중도시’로 변모했다. 1914년에는 호남선 철도가 완성되면서 수탈의 인프라가 갖추어졌다. 1911-1929년 동안 목포를 통해 수탈해간 쌀의 양은 9배나 증가했고 일본은 헌병까지 동원해 면화를 강제 재배시켰다고 한다. 헌병까지 동원해 경작물을 강제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징용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갔음에도, 일부 뉴라이트 학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식민지라고 특별한 수탈이 없었고 징용이 ‘자발적인 취직’이라고 억지를 부리니 할 말이 없다.

 

한국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일찍이 노동파업을 벌렸던 목포제유 노동자들. 손호철 교수 제공

 

놀라운 사실은 목포가 한국근현대사에서 최초의 노동자파업이 발생하는 등 ‘초기 노동운동의 메카’, 즉 ‘일제 초기의 울산’이었다는 점이다. 1898년 2월, 목포항을 개항한 지 석 달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부두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일본선주들의 임금 인하 움직임에 반대투쟁으로 맞선 것이다. 이후에도 부두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이 계속됐고 1903년에는 일본이 허가한 낙패가 없으면 부두노동을 못 하게하자 노동자들은 반일패 반대운동을 벌렸다. 1924년에는 일종의 석유화학공장인 목포제유노동자 등이 18일간 파업투쟁을 벌렸고 1925년에는 1700여명의 노동자들이 목포노동총연맹을 결성했다. ‘수탈’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충격적인 것은 동척 주차장에 있는 작은 표시석이다. ‘5ㆍ18항쟁 유적지’라는 표시였다. 아니 동척과 5ㆍ18이 무슨 관계가 있나? 놀라서 읽어보니 엉뚱한 사연이 있었다. 정부는 일제가 망하자, 이 건물을 목포 제3해역사령부 헌병대로 사용했고 1980년 5ㆍ18항쟁이 발생하자 이곳에서 목포의 민주인사들을 체포해, 조사하고 고문해 5ㆍ18 유적지가 된 것이다. 조선의 민중들을 수탈하던 동척이 이후에는 민주인사들을 잡아넣는 곳으로 변신했으니 이 터에 무언가 나쁜 기운이 흐르는 것이 확실하다.

 

조선민중의 피땀을 착취해 보관했던 동양척식회사의 엄청난 규모의 금고. 손호철 교수 제공

 

근대역사박물관에서 꼭 보고 와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엄청난 크기의 금고다. 이 금고는 일본이 조선총독부의 물리력 등을 통해 조선 민중들의 피와 땀을 얼마나 수탈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같은 수탈을 단순히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한,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경제적 거래”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의 색맹 경제학자들에게는 이 금고의 벽을 이루고 있는 조선민중의 피눈물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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