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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정치철학연구회
■ [한국일보] 손호철의 발자국

<13>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회성, 우발적 투쟁이 아니었다

by RGCPP-gongbang 2020. 11. 2.

원문보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03009480004671

 

손호철의 발자국 <13> 학생 독립운동의 성지, 전남 광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회성, 우발적 투쟁이 아니었다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광주일고 교정에 세워져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손호철 교수 제공

 

11월 3일은 무슨 날인가. 모르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학생의 날’이다. 2차 대전 중 나치에 학살당한 체코 프라하대학의 1,200명 학생을 기념하기 위한 ‘세계학생의 날’(11월17일)이 있을 뿐, 따로 ‘학생의 날’을 기념하는 나라는 내가 아는 한, 없는 것 같다. 왜 우리는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기념하는 것인가.

"(조)센징!” 1929년 10월 30일, 광주를 떠나 나주역에 도착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광주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 박기옥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한국 남학생들의 항의를 일본학생들이 무시하면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역사적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투옥, 제적, 강제징집을 당한 ‘학생운동 출신’이지만, 부끄럽게도 ‘한국 학생운동의 기원’격인 광주학생운동이 나주역에서 생겨난 우발적인, 일회성 항일투쟁으로 알고 있었다. 뒤늦게야, 이것이 5개월간 지속됐고 전국 320개 학교의 5만 4,000여 명이 참여한, 지속적이고 전국적인 항일독립투쟁, 아니 간도·상하이·베이징·일본·미주에까지 번져간 국제적 투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그린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벽화.

 

광주의 명문인 광주일고에 가면 오래된 탑이 하나 있다. 1953년에 세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초반 전남대 근무시절 한번 찾아간 적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 찾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2004년 광주시가 새로 만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우발적 사건으로 끝날 패싸움이 역사적인 항일투쟁으로 발전한 것은 장재성과 장석천이라는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회성으로 끝날 한일학생 간의 패싸움을 국제적인 항일투쟁으로 발전시킨 장재성과 여동생 장매성. 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장재성은 광주일고의 전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인 1926년 광주지역 학생들의 사회과학 모임인 성진회를 만들어 민족해방과 계급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일본중앙대 예과로 유학을 갔지만 1929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여러 학교의 독서회를 조직하여 지도했다.

나주역 사건을 들은 장재성은 독서회를 통해 광주지역의 주요 학교 지도자들과 함께 11월 3일 항의시위를 열 준비를 했다. 특히 긴급회의를 통해 “우리의 적은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의 대상을 일제로 돌릴 것” 등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시위일로 11월 3일로 결정한 것은 이 날이 개천절이고, 성진회를 만든 지 3주년 되는 날이자 일본의 명치절(일왕 메이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지도자 장석천 수형기록표 사진. 손호철 교수 제공

 

명치절 기념식에 일본 국가를 부를 때 학생들이 침묵으로 저항하자 이상하게 생각한 학교당국은 학생들을 귀가 조치했다. 학생들은 거리로 나가 광주역에서 일본학생과 충돌했고 시위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몽둥이를, 호떡장사는 팔던 호떡을 가져다 줬다. 놀란 총독부는 광주지역 학교에 대해 일주간 휴교를 명하고 72명을 검거했다. 11월 12일 수업 시작종이 울리자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친구들이 잡혀있는 광주형무소로 쳐들어갔다. 2차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12월에는 투쟁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조선의 학생대중이여 궐기하라!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항적 투쟁으로써 광주학생사건을 지지하고 성원하자!” 12월 2일 경성제대 등에는 이 같은 격문이 배포됐다. 전남청년동맹위원장이었던 장석천은 변장을 하고 일본경찰의 철통같은 봉쇄를 뚫고 서울로 잠입, 신간회 사무실을 방문해 투쟁방향을 논의했다.

신간회, 그리고 좌파여성단체인 근우회 등이 지원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져갔고 해외에서도 동조시위와 지지가 이어졌다. 광주고보에서는 1930년 1월 개학날 치룬 기말고사에서 1980년대까지 광주진보운동의 큰 어른으로 활약해온 이기홍씨의 주도로 투옥중인 학우들을 위해 시험을 거부하고 퇴교하는 투쟁을 벌였다. 5개월간 계속된 투쟁 끝에 280명이 구속 기소됐다. 3·1운동 후 침체됐던 국내의 항일독립은 이 운동으로 다시 한 번 타오른 것이다.

 

1929년 11월 광주의 양림교를 건너는 여학생 시위대의 사진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교수 제공

 

‘소녀회’.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 있는 한 초등학교 벽에 붙어 있는 작은 금속패에 ‘소녀회’라고 쓰인 글씨를 보고 궁금해 다가가서 봤다.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 등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1929년 일주일에 한 번씩 뒷산에 모여 사회과학 책을 읽고 논의를 하던 독서회로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소녀회만이 아니라 여학생들은 전국적으로 이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중심적인 역할은 한 것은 허정숙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여학생들로 조직된 소녀회도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손호철 교수 제공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조선공산당운동의 중심인물들인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의 동지이자 파트너였던 주세죽, 하정숙, 고명자라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허정숙은 초기 페니미스트이자 자유연애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였다. 허정숙은 광주학생시위 소식을 듣고 광주의 현장을 보고 와서 이화, 배화 등 여학교를 조직해 1930년 1월 15일 대규모시위를 준비했다.

정보가 새면서 시위는 불발로 끝났지만, 서울의 13개 여학교가 수업 시작과 함께 일제히 만세를 부르는 만세운동을 벌여 허정숙을 비롯해 34명이 구속되고 55명 불구속 기소됐다. 이들 모두가 여자여서 사회적으로 큰 방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허정숙은 이 일로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석방 후에도 일본경찰이 계속 괴롭히자 1930년대 중반 중국으로 망명을 해 버렸고 해방 후에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조각. 손호철 교수 제공

 

해방 후 정부는 1953년 이 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해 11월 3일을 법정기념일인 ‘학생의 날’로 제정했지만, 박정희정권이 유신을 선포하면서, 1973년 ‘학생의 날’을 폐지시켜 버렸다. 자기에게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대해 보복을 한 것이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은 야당의 발의로 학생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부활시켰다. 학생의 날에 관한 한,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진취적’이었다.

나는 역사에게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영웅사관’에 매우 비판적이지만, 우발적인 젊은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끝나고 말았을 작은 사건을 거대한 항일독립투쟁으로 발전시킨 것은 장재성과 장석천의 지도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운동에 있어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장재성을 만나러 광주 지산동 야산으로 향했다. 지산동 야산 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자 나는 다시 한 번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회성으로 끝날 한일학생 간의 패싸움을 국제적인 항일투쟁으로 발전시킨 장재성의 가족사진. 장재성기념사업회 제공

 

장재성은 이 사건으로 관계자 중 최고형인 징역 4년을 선고받고 1934년 출감했다. 해방 후에는 청년동맹 전남총연맹의 의장으로 친일경찰 등이 계속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는 분단을 영속화하는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해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뒤 일본을 통해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학생운동으로 끌려갔던 광주교도소에 다시 수감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은 그를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이 야산으로 끌고 와 학살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3살이었다. 그에 대한 서훈은 장재성기념사업회(이사장 황광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익경력 때문에 거부되고 있다. 그와 함께 운동을 주도했던 장석천은 1년 6개월을 살고 나온 뒤 경성방직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키다가 2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결핵으로 옥사 직전 실려 나와 석방 며칠 뒤 숨을 거두었다. 그 역시 좌파란 이유로 서훈을 못 받다가, 해방 전에 죽은 덕분에, 장재성과 달리 뒤늦게나마 서훈을 받았다.

의열단장 김원봉이나 장재성이 보여주듯이, ‘좌파 독립운동가’는 해방 후까지 살아남은 경우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들에게 다시 고문을 당하고 투옥돼야 했고, 이후에는 좌파경력을 이유로 서훈을 거부당하고 있다. 하지만 장석천 등이 보여주듯이, 일제 강점기에 사망한 경우 좌파이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좌파 독립운동가’의 경우 차라리 일제하에 감옥이나 고문후유증으로 일찍 죽는 것이 ‘축복’인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대사이다. 반면에, 이기홍씨에 따르면,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투옥된 학우들을 위한 시험거부투쟁 때 끝까지 남아 시험을 본 8명은 “모두 잘되어 사회 고위직에 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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