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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25) 더 이상 목선을 만들지 않는 조선소, 이젠 ‘기억 문화’를 대패질한다

by 공방 RGCPP-gongbang 2020.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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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2082126005&code=960100#csidx0196367ef80e7a2aff0bb83b99899d6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25)

더 이상 목선을 만들지 않는 조선소, 이젠 ‘기억 문화’를 대패질한다

 

우찬제 |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속초 칠성조선소

강원도 속초의 복합문화공간 칠성조선소는 1952년 원산에서 피란 온 최칠봉씨가 세운 원산조선소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목선이 전성기를 누리던 1960년대까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으로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생생히 살아가는 문화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우찬제 교수 제공

 

작가 한승원의 등단작 ‘목선’(1966)은 갯내 물씬 풍기는 바닷가 사람들의 이야기다. 거친 파도와 씨름하며 김 채취선 일을 하는 양산댁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디 나는 배 없이 어떻게 살 것이오? 한시도 못 살어라우. 배 없이는 죽어도…….” 논밭이 농민들의 삶의 근거지였던 것처럼, 바다 일을 가능케 해주는 배가 삶의 발판이었던 뱃사람들의 한결같은 생각을, 양산댁은 매우 극적으로 표출한 셈이다. 양산댁이 결코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목선, 그 나무배를 만드는 배 목수들이 있었다. 그 목수들의 일터인 조선소가 있었다. 지금은 비록 나무배를 만들지 않지만 여전히 예전 그대로 조선소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곳. 속초 칠성조선소로 가보자.

예로부터 관동팔경으로 꼽혔으며, <택리지>(이중환)에는 마치 거울을 펴놓은 것처럼 맑다고 소개된 청초호에 자리 잡은 칠성조선소. 설악산 천불동에서 불어오는 천 개의 바람과 금강산 만물상에서 남하하는 만 개의 바람이 스치며 만나는 곳. 설악산을 등지고 청초호를 바라보면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면서 새로운 세계로의 항해를 꿈꾸게 하는 곳이다.

‘칠성조선소 살롱 오픈.’ 입구 간판 서체부터 우선 노스탤지어 모드를 불러일으킨다. 필경 배 옆에 그 배의 이름을 새길 때 썼을 서체 그대로다. 안으로 들어가면 1952년 원산조선소로 시작된 연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반세기 넘게 재래식 조선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웃고 울고 했던 배 만드는 현장의 이야기들이 관람객들로 하여금 20세기 후반기로 시간여행을 하게 한다. 배를 만들 때 사용했던, 누렇게 빛바랜 설계도면이며 작업일지 등등 다채로운 자료들이 배 만드는 일에 대해 흥미를 더하게 한다. 소박한 전시실이지만 실제 작은 목선을 재현한 배가, 이곳이 조선소였음을 생생하게 증거한다.

원산 출신 할아버지가 일제 징용 당시 포항의 배 목수로부터 배 만드는 기술을 배워 가업 시작
전쟁 끝나면 고향으로 빨리 돌아가길 꿈꾸던 북한 피란민들의 고기잡이배 만들며 전성기 누려
3대의 세월이 흘러 지금은 배를 만들지 않지만, 풍성한 기억을 바탕으로 문화공간으로 변신

살롱 전시장을 둘러보다 ‘나는 속초의 배 목수입니다’라는 영상을 보면 이곳에서 배를 만들던 목수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과거로 통하는 기억의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집 짓는 목수들과 달리 배 목수들은 굽은 나무 혹은 곧은 나무라도 구부려 배의 구조에 적합한 나무로 매만질 수 있어야 한다. 배 목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불현듯 목선의 의미를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배 만드는 데 많이 쓰였던 삼나무도 그렇고 한국에서 목선 건조에 쓰였던 금강송도 하늘과 땅을 잇는 우주목(宇宙木·cosmic tree)에 속한다. 땅과 하늘을 연결하고 회통하게 하는 신화적 나무로 꼽혔다. 땅에서 하늘로의 상승의 염원을 상징하던 수직의 나무로 수평의 항해를 가능케 하는 배를 만드는 목수는, 그렇다면 신화를 현실화하고 현실을 신화화하는 집단무의식의 장인이 아니었을까. 이쪽에서 바다 건너 저쪽을 향한 꿈을 꾸게 하는 배, 그 푸른 해원을 가로지르며 무한동경을 가능케 하는 배를 만드는 장인인 배 목수들은, 필경 나무의 수직적 꿈을 빌려 인간의 수평적 꿈을 돕는 이들이었을 게다.

하늘을 향한 수직의 기억을 수평의 기세로 바꿀 수 있는 배 목수들 중에서도 속초의 목수들은 남다른 사연과 기억을 보태 지닌 이들이 많았다. 바로 식민지와 전쟁과 분단 상황으로 이어진 한반도의 20세기와 관련된 기억들이다.

현재 칠성조선소를 운영하는 최윤성씨의 할아버지 최칠봉씨도 배 목수였다. 창업자인 그는 원산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남만주로 징용에 끌려갔을 때 만난 포항에서 온 배 목수로부터 배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흥남철수 때 부산으로 피란했던 그는 전쟁이 끝났다는 ‘카더라’ 통신을 듣고 북상하다가 속초에서 발이 묶였다. 청초호 근처에 터를 잡고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속초는 전쟁통에 함경도에서 피란 온 이들이 많았는데,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가능하면 고향 가까운 곳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북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많았고, 속초 앞바다의 어획량도 증가했다. 명태, 오징어, 꽁치, 양미리 등을 많이 잡을 수 있었기에 속초의 포구들은 흥성했다.

그럴수록 배 목수들은 진가를 발휘했다. 한승원의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배 없이는 고기잡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경도 ‘아바이’들에게 배는 일차적으로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삶의 터전이다. 이차적으로, 아니 어쩌면 더 근본적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편이 바로 배였다. 통일이 되어 귀향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 배로 항해하여 함경도로 간다면 육로로 고향 가는 것보다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김원일의 <비단길>에도 생생하게 제시되어 있거니와, 실제로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할 때 속초 항만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런 배를 만들어주는 배 목수가 어찌 아바이들에게 귀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렇게 배 목수들은 특히 196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70년대 초반에 조부가 타계하고 할머니가 운영하다가 2대인 아버지 최승호씨가 운영하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목선의 시기가 지났기 때문이다. 1990년대 아버지는 목선을 만들던 칠성조선소를 철선을 제작하고 수리하는 조선소로 탈바꿈하면서 위기에 대응한다. 조선소 바로 옆에 집이 있었기에 3대인 최윤성씨는 배 만드는 소리를 듣고 배 만드는 나무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제작 중인 배 위에서 망치질하는 소리, 전기 대패 소리, 만든 배를 선대에 올려 물로 내릴 때 마치 지진처럼 나는 육중한 소리 등 그를 키운 건 팔 할이 배 만드는 소리였고 냄새였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조선소 일은 힘드니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다. 속초고 시절 미술 선생님의 조언을 받아 미술대학 조소과를 다녔던 그는 졸업 후 기억에 관한 작업을 시도했다. 기억의 메타포를 조형적으로 형상화하여 기억의 심미성과 서사성을 모색해보려는 시도였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무배를 만들고 있었다. 작업실 근처에서 버려진 목재들을 주워모아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배의 모형을 만들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배를 형상화하다가 그는 진짜 목선을 만들고 싶어졌다. 하여 미국 메인주 케네번크 포트(Kennebunk Port) 소재 랜딩보트 빌딩스쿨에 가서 3년 동안 배 만드는 일에 몰입했다. 그 학교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는 훅 끼쳐오는 나무 냄새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고향집 칠성조선소에서 맡았던, 그를 키운 바로 그 냄새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진짜 배 만드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마다, 그래서 진짜 배 목수에 근접할 때마다, 그는 자기 안에 배 목수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절감했다. 조소가의 손에서 목수의 손으로 변해갔다.

목수의 손으로 귀국했지만 이미 배 목수의 시대가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는 아내 백은정씨와 함께 레저선박사업을 새롭게 시도하기도 했으나 시절을 만나지 못한다. 하여 그는 기억의 복합문화공간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배를 만들던 과거 조선소의 흔적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것이 단지 과거추수적인 박물관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열어나가는 기억이 되기를 바랐다.

그가 새롭게 조성한 칠성조선소에 초대된 사람들은 여러 시간과 공간, 여러 차원을 경험하게 된다. 배를 만들고 수리하던 곳에서 과거로의 기억여행을 하면서도, 살롱에서 커피를 마시며 지금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기획한다. 다채로운 전시와 공연에 참여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구체적 질료가 된다. 마치 아녜스 바르다와 제이알 감독이 함께 만든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두 감독이 눈에 띄지 않는 얼굴들을 그들의 기억과 더불어 현재에 새롭게 살려내듯이, 칠성조선소의 기억은 계속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창안물로 거듭나게 될지도 모른다. 가령 칠성조선소 서체만 하더라도 그렇다. 아버지가 배를 만들거나 고칠 때 칠성조선소의 시그니처로 썼던 글씨를 폰트회사 산돌과 함께 칠성조선소 서체로 개발한 것이다. 바다에서만 볼 수 있던 아버지의 글씨체를 이제는 육지든 하늘의 비행기 안에서든 볼 수 있게 했다. 지금 칠성조선소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아니다. 그 대신 기억 문화를 만들고 새로운 꿈을 만드는 조선소다. 기억의 고고학을 넘어 기억의 문화적 역동학으로 탈주한다. 오늘도 칠성조선소에는 천 개의 바람이 분다. 만 개의 기억 문화가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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