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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23) 외화벌이로 점철된 고난과 희생의 서사…그들은 부끄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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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23)

외화벌이로 점철된 고난과 희생의 서사…그들은 부끄럽지 않았다

 

이유재 튀빙겐대학교 한국학교수

 

파독 광부

1960년대 광산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 이들도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독 광부’행을 선택했다. 독일에 도착한 파견 노동자들이 현장 교육을 받고 있다. 출처 독일광산아카이브

 

‘파독 광부·간호사’에 대한 기억은 한국에서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들이 1960~1970년대 보릿고개 시기에 멀고 먼 타지에 가서 어려운 노동조건하에 외화를 벌어 고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서사가 지배적이다. 그들이 본인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고, 봉급의 대부분을 고국에 있는 가족에게 매달 송금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몇 년 전 크게 흥행에 성공한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도 ‘파독 광부’로서 겪은 고난과 희생의 서사를 잘 대변하고 있다. 이들만큼 극적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성공 신화와 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그룹이 많지 않기에,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세간의 큰 관심에 비해, 파독 광부에 대한 본격적인 생애사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다. 이에 필자는 독일에 남아 있는 파독 광부 10명에 대한 구술사를 진행한 바 있다. 그들이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본인의 삶은 어떠했을까?

파독 광부의 대다수는 당시 한국에서 처해 있었던 빈곤과 기회의 결핍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돌파구로서 이주를 선택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은 농촌에서 더 이상 미래를 찾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절대적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수단도 쉽게 찾지 못했다.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가정 형편 때문에 출세의 길로 원만하게 들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이나 부자간의 갈등 등으로 인해 어려운 환경에 처하기도 했고, 이런 환경으로 인해 가족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다수의 청년들에게는 군복무가 인생에서 최초로 가족과 단절되는 경험이었다. 동시에 당시 베트남 파병은 하나의 돌파구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베트남 파병은 첫 해외 돈벌이의 경험이었다. 파독 광부들 중에서도 군복무 시기 베트남 파병을 신청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파독 광부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문 광고나 친구의 추천으로 파독 광부 프로그램을 선택하는데, 이들은 이미 마음에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군대 제대 후에도 환경이 변한 사례는 거의 없었고, 베트남에서 벌어온 돈을 종자돈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례도 지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나 가족이 이미 그들의 돈을 다른 곳에 다 써버린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 냉전의 구조와 막장노동

막장서 착취적 노동관행에 맞서
1979·80년 집단적 인권운동으로
직장선택 자유·체류허가 얻어내
도둑질한 동료 ‘조국에 망신’ 응징

광부와 간호사가 서독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서방 자유진영이 개발원조를 도구로 개발도상국들을 자유진영에 편입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냉전의 구조가 없었다면 서독은 한국에서까지 광부와 간호사를 ‘손님노동자’로 모집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술원조의 틀을 갖춘 1963년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협정’은 공식적으로 한국 광부들을 서독에서 교육시켜 한국의 광산업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무 협상 파트너들이 각자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 바빴다. 서독광산협회는 한국 광부를 막장에만 투입하는 조건으로 협정을 받아들였으며, 한국 해외개발공사는 협정을 위반하면서까지 광부가 아닌 일반인을 파견했다. 광산 경험이 없는 파독 광부에게 성과제 막장노동은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막장의 지열과 먼지는 이들에게 생소한 경험이었고, 모든 노동기구는 독일 노동자의 체구에 맞게 만들어져 삽은 너무 크고, 옮겨야 하는 쇠기둥은 너무 무거웠다. 독일인 동료들은 키 작고 힘 약한 동양인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파독 광부들은 몇 차례 불법파업을 하면서 독일인과 동등한 임금, 체구에 맞는 노동분야, 외국인 혐오 금지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실제로 변하는 것은 별로 없었다.

막장에서의 착취적이고 불공평한 노동 관행과 제도에 맞서 많은 광부들은 정기적으로 유급병가제도를 역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파서가 아니라 너무 힘들어서” 꾀병을 부렸다고, 한 광부는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문서를 조작해 복지국가 혜택인 가족수당과 어린이 양육비를 매달 타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광부들은 이런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혹여 파독 광부의 자부심과 긍지에 누가 될까봐 이런 일들을 덮어서 숨기길 원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집스러운 행위에서 우리는 파독 광부가 노동 일상에서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면서, 어떻게 다치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결국 1979·1980년 파독 광부들은 집단적 인권운동에서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협정’의 해체를 요구해 이를 성공적으로 관철시켰고, 마지막까지 광부로서 일하던 800여명은 자유로운 직장 선택과 체류 허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한 파독 광부가 독일어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위 사진). 1963년 1차로 파견되는 노동자들이 한국을 떠나기 전 찍은 기념사진. 독일광산아카이브·이유재 교수 제공

 

■ 카메라 도둑과 민족주의

거의 모든 파독 광부가 이미 한국에서 지원할 때 광부 경력을 위조했기 때문에 서로 문서 조작은 용인했지만 도둑질은 용서하지 않았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이브에 파독 광부 한 명이 가게에서 카메라를 훔치다 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광산에서 일하던 200여명의 한인 광부들이 집단적으로 이 사람을 강제로 강에 뛰어 내리게 했다. 바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에 빠진 사람은 다행히 구출되었다. 물에 빠지게 한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이 사람이 도둑질을 함으로써 조국에 망신을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이런 식의 집단적 행위는 동료가 불공평한 일을 당했을 때도 나타났다. 막장에서 벌어진 몸싸움에서 주먹으로 눈을 맞은 한인 광부의 복수를 위해 30여명의 한인 광부가 가해자가 지상에 올라오기만을 기다린 후 가해자와 그 동료 50여명을 모두 순식간에 때려눕혀 병원으로 보냈다. 그들은 광산의 안전담당 부서가 막장에서의 몸싸움을 조사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처벌할 수 있고, 같은 민족의 동료를 지키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3년의 계약이 끝나고 많은 돈을 벌어 귀국해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이 파독 광부의 꿈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현실은 아니었다. 자세한 통계는 없지만 증언에 따르면, 1960년대에는 한국에 돌아가는 사람이 4분의 1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상당수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 북미로 이주하든지 독일에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에는 북미 비자를 받기가 어려워져 한국에 돌아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는 하나, 미국이 아니고 유럽 타 국가에 이주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독일에 정착하는 사람들의 비율도 증가했다. 한국에 돌아가지 않은 제일 큰 이유는 3년 동안 벌어서 한국에 보낸 돈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귀국했을 경우 파독 전의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셈이었다. 반면 한인 간호사와 결혼해서 비자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독일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 곧바로 귀국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사례도 많았다. 아이들이 생기면서 귀국 계획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하지만 정년을 훌쩍 넘긴 지금, 독일에서 손자 손녀를 본 지금도 언젠가는 귀국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 정착-도전의 연속

3년 계약 끝난 후 귀국 않고 정착
차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
현재 한인 사회 인프라 구축 ‘성과’

비록 화려한 영웅은 아닐지라도
독일서 살아남으려 노력했던 삶
고국서 더 기억해주길 바랄 것

사실, 막장을 벗어나 정착한 서독에서의 생활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주민의 기억에는 이 시기가 광산 시기보다 더 어려운 시기로 기억된다. 인종차별 때문에 가족이 월세로 아파트에 입주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자기에게 맞는 직장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맞벌이 부부로서 육아와 양육은 더욱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들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예컨대, 월세 입주가 어려우면 아파트를 구매한다든지, 직장을 못 찾으면 자영업을 시작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결책들은 동시에 또 다른 힘든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어렵게 살고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현재 독일 한인사회의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점도 그들이 이룩한 매우 중요한 성과이다. 사실 ‘파독 광부·간호사’의 외화벌이는 많이 강조되지만 그들이 한국인 유학생 및 한국 기업 진출을 위해 마련한 토대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민간 외교관으로서, 디아스포라 경제인으로서 그리고 해외선교를 하는 종교인으로서 한국의 지구적 네트워크 형성에 그들의 공과 기여는 작지 않다.

‘파독 광부·간호사’는 한평생 독일에서 살았어도 그들의 불안하고 불편했던 이주민 삶에 대해서는 독일 사회보다 한국 정부와 사회에서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원한다. 이는 여전히 한국에 대한 애정이 더 커서 그렇기도 하지만 한국이 자신의 생애사를 더 잘 이해해준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비록 화려한 영웅은 아닐지라도, 일상의 노고를 버티고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한 부끄럽지 않은 아집의 보유자로 고국에서 기억되길 바랄 것이다. 되돌아보건대, 그들은 한국의 성장과 함께 중산층에 진입한 한국의 가족들과, 그사이 학계에 자리 잡은 유학생과 한국 기업과 함께 해외로 진출하는 전문직 뉴커머 사이에서 또 다른 소외감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2021년 6월부터 시행할 예정인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이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기억하는 고국의 따뜻한 관심과 위로로 받아들여지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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