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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21)
뒤늦게 반전주의 면모 드러난 전쟁영웅…어느 쪽을 기억할 것인가
김영주 |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이디스 카벨 기념비
1914년 독일의 벨기에 침공 직후
적십자병원서 환자 돌보던 간호사
영국·프랑스 군인 200여명을
피신시킨 죄로 독일군에 총살
영국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 인근은 영국의 역사와 문화가 공간적으로 집약된 곳이다. 국립초상화미술관과 영국국립미술관을 북쪽으로 두고, 광장 남서쪽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국회의사당, 정부청사들과 버킹엄 궁전으로 이어진다. 런던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을 들여놓았을 트래펄가 광장의 이정표는 단연 거대한 네 마리의 청동 사자상에 둘러싸여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넬슨 제독 기념비다. 나폴레옹에 맞서 해상 승리를 이끌었던 넬슨을 포함해 트래펄가 광장에는 영국의 전쟁영웅들을 기리는 동상이 여럿 있다.
인도 최초의 독립 항쟁인 세포이 반란을 진압했던 네이피어 장군과 해브록 장군의 동상이 19세기 중반 건립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전함을 지휘했던 젤리코 제독과 비티 제독, 커닝햄 제독의 청동상이 1940년대에 더해졌다. 이 지역을 바쁘게 둘러보려는 사람들의 눈길은 높이 50m가 넘는 위용으로 압도하는 넬슨 기념비와 그 왼편에 자리한 유서 깊은 교회 세인트 마틴스 인 더 필즈 사이에 서 있는 비교적 아담한 크기의 이디스 카벨(Edith Cavell) 기념비를 놓치기 십상이다. 게다가 한쪽 어깨를 살짝 비틀고 곧은 자세로 서 있는 여성의 형상을 한 하얀 대리석상은 남성적 권위와 군사적 위용을 뽐내는 광장의 다른 청동상들에 비해 다분히 이질적이다. 넬슨 제독 기념비를 중심으로 영국의 전쟁영웅들의 조각상, 그리고 화이트홀 거리를 따라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을 기리는 전몰장병위령비로 이어지는 일련의 기억의 공간, 전쟁을 기억하고 기리는 공간 한쪽에 자리 잡은 여성 이디스 카벨은 과연 누구인가?
1915년 10월12일, 49세의 영국인 간호사 카벨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독일군에게 처형당했다. 1865년 영국 노리치에서 태어난 카벨은 서른 살에 간호사 수련을 받았고 1907년부터 벨기에 최초의 간호사 실습학교를 브뤼셀에서 운영했다. 1914년 8월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한 직후 적십자병원으로 전환한 자신의 학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던 카벨은 점령된 도시에 남게 된 영국 군인과 프랑스 군인 200여명을 독일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로 피신시키거나 연합군 진지에 합류시키는 데 일조한 혐의로 1915년 8월5일 독일군에게 반역죄로 체포되어 10월12일 총살당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선 이례적으로
트래펄가 광장에 기념비 조성
전쟁 중 가련한 여성 이미지에서
영웅 면모 강조 기념비로 탈바꿈
국가가 원한 여성상 변화 보여줘
카벨의 죽음은 영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 정부는 그해 10월29일을 카벨의 추모일로 지정하고 알렉산드라 왕비가 주최하는 추모식을 런던의 세인트폴 성당에서 진행했다. 여성이자 민간인인 간호사의 죽음을 국가 차원에서 기리며 추모하는 이러한 행사는 전시 중에 이례적인 경우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정부는 브뤼셀 교외에 묻힌 카벨의 유해를 수습해 영국으로 송환한 후 1919년 5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카벨의 장례식을 치렀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은 해외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에 이와 같이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가며 카벨의 유해를 발굴하고 확인해 송환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1920년 트래펄가 광장 인근에 세워진 카벨 기념비는 민관의 공동 노력으로 완성되었다. 1915년 카벨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카벨 기념비 건립을 위한 공공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웨스트민스터시는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했으며, 조각가인 조지 프램프턴(George Frampton)은 보수 없이 조각상 제작을 자청했다. 카벨 기념비는 첫째, 여왕을 제외하고 실존 여성 인물을 기리는 조각상이 거의 없던 시대에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둘째, 국가의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던 빅토리아조의 가치관이 여전히 남아 있던 시대에 중산층 출신의 미혼 여성 개인을 공적인 기억의 장으로 호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셋째, 여성의 전쟁 중 역할이 주로 후방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참여하거나 전방의 군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것에 제한되던 당시에 여성 간호사의 죽음을, 전쟁을 기억하고 기리는 의례에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요컨대, 카벨은 여성이자 민간인 간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국가의 공식 기억 속에, 남성적 공간으로 체화된 기념비 문화 속에 당당히 기입된 것이다.
“애국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구에게도 증오 품지 않아야”
카벨의 마지막 말이 밝혀지며
남성 중심적 민족주의 벗어난
여성으로서의 목소리도 새겨져
카벨 기념비는 전쟁과 여성, 특히 전쟁을 경험하고 추모하는 공동체가 한 여성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관해 더욱 많은 점을 시사한다. 1915년 카벨의 군법 처형부터 1920년 카벨 기념비 건립 이후까지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전시에 카벨의 죽음은 독일군의 야만성을 부각하고 영국과 연합군 남성들의 분노를 일깨우는 기제로 활용되었다. 카벨의 죽음은 엽서나 잡지에서 흰색 간호사복 차림의 앳된 여성이 독일 군인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는 이미지로 그려졌으며, 에식스 지역에서 발행한 참전 독려 포스터의 한가운데에는 단정한 간호사복 차림의 카벨의 옆모습이 실렸다. 군사재판을 받을 때 한 번도 간호사복을 입지 않았고 총살될 당시 49세였던 실제 모습과 달리, 대중의 상상력 속에 카벨은 앳되고 연약한 여성이자 희생과 돌봄을 실행하다 유린당하는 간호사의 모습으로 새겨졌던 것이다.
특히 카벨의 처형 장면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 중 카벨이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독일 군인들을 마주하고 기절했다는 이야기는 신체적으로 연약한 여성 카벨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널리 회자되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독일 점령 치하에서 연합군의 비밀조직 일원으로 활동했던 카벨의 정신적 담대함을, 다른 한편으론 의식을 잃고 쓰러진 여성을 잔인하게 총살한 독일 장교의 비열함을 되새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에 반해 전후 제막된 프램프턴이 만든 조각상은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카벨을 부각한다. 차갑고 단단한 대리석의 질감과 어울리게 단순하고 곧은 선으로 형상화된 카벨 조각상은 우아한 강인함을 드러낸다. 전시와 전후에 부각된 카벨의 이미지는 서로 상반된 여성상을 담고 있으며, 이는 카벨을 기억하는 과정에 당시의 국가공동체가 각각 필요로 했던 여성성을 주조하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후 제막된 프램프턴이 만든 기념비는 전쟁영웅 카벨의 면모를 강조했다. 카벨 조각상의 배경이 되는 화강암 기둥의 네 면에는 각각 “자애, 희생, 헌신, 인내”라는 문구가, 그리고 전면 상단에 배치된 십자가 문양 아래에는 “국왕과 조국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처형되기 직전 카벨이 남겼다고 알려진 유언, “내 나라를 위해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이 말은 자기희생적인 애국심의 토로로 여겨진다. 그러나 제막식 이후에 카벨의 유언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카벨의 투옥 중 성찬식을 집도했던 영국인 성공회 사제는 성찬식 후 카벨이 “애국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 누구를 향해서건 증오도 비탄도 품지 않아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1922년 영국 국립여성협의회는 카벨의 유지를 바로 새겨야 한다고 관련 기관에 제기했고 다음해인 1924년 이 문구는 카벨 조각상의 대좌에 새로 새겨졌다. 이로써 카벨 기념비에는 헌신적인 애국심의 토로와 편협한 애국주의에 대한 질타가 모두 새겨지게 된 것이다. 카벨은 불굴의 강인함으로 전쟁 중인 국가에 헌신한 여성의 표상인가? 아니면 남성 중심적인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반전과 평화주의를 주창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인가?
이디스 카벨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다음으로 영어권 문화에서 가장 유명한 간호사였다. 영국 런던뿐 아니라 벨기에 브뤼셀, 호주 멜버른, 뉴질랜드의 리프턴에는 카벨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영국·아일랜드·캐나다·미국·호주·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는 카벨의 이름을 기리는 간호사학교나 병원이 있다. 캐나다의 로키산맥에는 장엄한 카벨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뉴질랜드의 험준한 산악지역에는 카벨교가 아찔한 협곡을 잇고 있다. 1915년 전쟁 중에 죽음을 맞은 카벨은 기념비로, 거리명으로, 기관명으로, 자연 풍경의 일부로 여전히 호명된다. 그러나 영미 문화권에서 실제 인물 카벨은 거의 잊혀졌고, 우리에게는 더욱 낯선 인물이다. 전쟁과 성, 전쟁영웅주의와 반전주의, 여성의 몸과 직업, 국가정체성 수립과 제국주의 영토 확장, 숭엄한 자연이 얽힌 기억의 공간에 남아 소환되는 카벨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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