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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8) 태국 초유의 왕실 공개 비판…‘입헌정치’ 대중운동 시작한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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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012215005&code=960100#csidxc15abbab386707bb9a26be87073dec6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8)

태국 초유의 왕실 공개 비판…‘입헌정치’ 대중운동 시작한 청년들

 

서지원 | 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되살아난 태국 입헌혁명

태국에서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방콕에서 시위대들이 태국 의회 해산과 새로운 선거 개최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며 정권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스리핑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방콕 로이터·연합뉴스

 

인민당, 1932년 왕정 타도에도
엘리트집단이라 대중 기반 약해
선거민주주의 시절도 인기 없어

사남루엉은 방콕 구도심 왕궁 맞은편의 광장이다. 원래는 왕실의 화장터이지만 평소에는 공원처럼 활용되며 왕실이나 정부, 민간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1940년 이래 이 광장의 한쪽 길가 바닥에는 지름 30㎝가량의 맨홀 뚜껑 같은 동판이 박혀 있었다. “2475년(서기 1932년) 6월24일 새벽, 인민당은 민족의 번영을 위해 헌법을 세웠다”라는 간단한 글귀가 적혀 있는 이 수수한 동판은 1932년 태국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로 가는 길을 열었던 인민당 지도자가 입헌민주주의를 선언했던 바로 그 자리를 수십년간 지켜왔다. 2017년 4월 초 어느 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입헌혁명을 기념하는 동판을 몰래 떼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충효와 불심을 강조하는 글귀가 새겨진 새로운 동판을 박아 넣었다.

입헌혁명의 기억은 오랫동안 화제에서 멀어져 있었다. 1957년의 쿠데타로 수립된 사릿 장군의 군부정권은 왕실 신격화에 공을 들였다. 인민당의 입헌혁명 기념일로서 떠들썩한 행사가 열리곤 했던 6월24일은 국경일에서 제외되고, 대신 푸미폰왕의 생일인 12월5일이 가장 중요한 국경일로 등극했다. 사릿은 한때 사남루엉의 입헌혁명 기념 동판을 제거하기도 했으나, 그가 사망한 후 의회의 사무총장이 동판을 같은 자리에 다시 설치했다.

이제는 과거가 된 태국의 선거민주주의 시절에도 인민당의 기억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좌파들이 보기에 서구에서 교육받은 장교와 민간 공무원들로 이루어진 인민당은 대중적 기반이 없는 엘리트 부르주아 집단이었다.

더구나 인민당 출신으로 오래 집권했던 피분 총리는 국수주의,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일본 및 추축국과 협력한 탓에 파시스트로 불리기도 했다.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왕실을 상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군부독재에 저항하려 했다. 그들은 피분과 인민당이 아닌, 인민당이 퇴위시킨 라마 7세 쁘라차티뽁왕을 민주화운동의 원조로 삼았다. 라마 4세는 나라의 독립을, 라마 5세는 근대화를 이루었고, 라마 7세는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렇게 파열 없이 순탄하게 진행된 역사적 서사의 끝에 1990년대의 민주화된 태국이 있었다.

1938년 피분 총리가 태국 헌법의 탄생을 기념해 세운 민주기념탑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태국 인민당이 1932년 입헌민주주의를 선언하며 만든 기념 동판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군부독재 저항하려 왕실 활용
왕실 정치화 불러 믿음에 균열
2010년 붉은셔츠 시위 진압 때
유혈사태 침묵 왕실 신뢰 상실

왕실의 역할에 대한 의문은 왕실이 본격적으로 정치화된 2005년 탁신 반대 시위와 2006년의 쿠데타를 거치면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입헌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태국 왕실은 사릿 군부정권 이래 내내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푸미폰왕은 자애로운 아버지이자 여러 정치세력의 위에 군림하는 자로서 그들의 다툼을 중재하여, 거역할 수 없기에 평화로 이어지는 해결책을 이끌어내곤 했다.

그래서 2005년 탁신 반대 시위대가 노란 셔츠를 입고 왕실을 찬양하며 선거로 뽑힌 탁신 총리를 퇴진시키려 했을 때, 탁신의 지지세력도 똑같이 왕실을 찬양하며 탁신을 지키려 했다. 왕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탁신을 못마땅해했던 왕실 인사들이 배후조종했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던 2006년의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탁신 지지세력은 공공연히 왕실을 비난하지 않았다. 택시기사 등 도시의 서민과 가난한 농민 위주로 이루어진 탁신 지지세력 상당수는 그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교육받은 대로 왕실을 진짜로 사랑했다. 그들을 무지렁이 취급하며 포퓰리즘이 되어버린 민주주의를 엘리트 정치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던 반탁신 노란 셔츠 ‘민주주의민중연대’에 맞서 1인 1표와 평등의 원칙을 주장해 온 친탁신 붉은 셔츠는 민중을 자애롭게 사랑한다는 왕실이 그들의 요구를 지지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왕비가 노란 셔츠 시위대의 장례식에 참가하는 것을 보며 그들은 ‘눈을 떴다’. 더욱이 2010년 방콕 도심에서 붉은 셔츠가 벌인 시위에 대한 진압이 90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형 유혈사태를 낳았는데도 침묵하는 왕실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적 중립이나 자애로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사라졌다.

왕실의 개 모독했다고 기소 등
‘모독법’ 남용 정부 반대파 처벌
푸미폰 승계자 왕실자산 사유화
정부는 새 왕실 통제 능력 잃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왕실은 이미 예전의 왕실이 아니었다. 왕정주의는 점점 더 극단적인 형태를 띠었다. 왕실모독법은 정부의 반대파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었다. 왕실모독죄로 살인죄보다 더 가혹한 70년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왕실이 키우던 개에 대한 모독적인 글을 게시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노동자도 있었다. 왕실모독법의 남용을 비판한 역사학 교수는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 파리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외국 국적자를 포함해 수백명이 왕실모독법으로 기소되어 고난을 겪었다.

기관으로서의 왕실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2005년부터 병상에 누워 있던 푸미폰 국왕은 2016년 세상을 떠났다. 입헌혁명 이후 외국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즉위하여 70년간 왕위를 지킨 푸미폰 국왕은 자신이 신격화되기 이전,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방식으로 국정이 운영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와치랄롱꼰왕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신왕은 ‘포브스’지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실로 꼽은 태국 왕실의 자산을 왕실자산청의 관할에서 꺼내와 자신의 개인 소유로 만들었다. 왕실 칙령에 대한 의회의 인준 절차는 폐지되었다. 태국 정치는 입헌혁명 이전의 전근대를 향해 후퇴하고 있었지만 2014년의 군사쿠데타로 본격적인 군부통치가 시작된 이후 왕실을 지킨다는 명분에 더욱 기대게 된 정부에는 이러한 변화를 통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1932년 인민당의 기억은 왕실에 대한 실망과 극단적 왕정주의에 대한 불만으로 ‘눈을 뜬’ 저항자들에 의해 되살아났다. 활동가들은 매년 6월24일 사남루엉의 동판을 둘러싸고 입헌혁명 기념식을 열었다. 2017년의 동판 도둑질은 오히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각지에서 철거되어 가던 입헌혁명 기념물들과 인민당 정부 시절의 건축물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왕실에 대한 공개적 저항도 잦아졌다. 푸미폰왕의 초상화에 불을 붙였다는 혐의로 5명이 체포되는가 하면, 독일 뮌헨의 와치랄롱꼰왕 자택을 찾아가 1932년 인민당의 성명서를 낭독하며 현재의 왕은 왕의 자격이 없다고 공개 비난한 활동가들도 있었다.

“진정으로 민주주의 실현 안 돼
헌법 개정·의회 해산·왕실 개혁”
20대 청년들 저항운동 힘 실려

동판이 사라진 2017년 이래 6월24일의 입헌혁명 기념식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2020년 7월, 어느 민주화운동 단체가 방콕의 민주기념탑 주변에서 피분 전 총리의 123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민주기념탑은 1938년 피분이 태국 헌법의 탄생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지은 기념비다. 1948년 헌법을 상징하는 중앙의 조형물이 쁘라차티뽁왕의 동상으로 대체될 뻔했으나 이 계획은 취소되었고, 민주기념탑은 예전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민주기념탑에 모인 활동가들은 피분이 1930년대에 민족적 전통으로 발명했다고 알려진 볶음국수 팟타이를 먹으며 “독재는 무너진다, 팟타이여 영원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피분에게 파시스트적 면모가 있었을지언정 태국 입헌정치의 발전에 대한 피분과 인민당의 공로는 기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분의 생일잔치가 열린 그 주의 토요일 밤, 2000여명의 젊은이들이 민주기념탑 앞에서 헌법 개정과 의회 해산, 총선 재실시, 정치적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사회활동가 완찰럼이 망명지 프놈펜에서 납치된 후 행방불명 상태이고, 티와꼰이 ‘왕실에 대한 내 믿음은 끝났어’라는 문구가 박힌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등 최근의 탄압 사례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한 달 만에 시위대는 10배로 불어났다. 시위대의 주축을 이루는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군부통치 시대에 성장한 세대로서, 1990년대의 선거민주주의도 겪지 못했고 노란 셔츠와 붉은 셔츠가 대립하던 시대의 대중정치 경험도 전무하다.

“인민당이 혁명적 전환을 초래한 이후 인민은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정치 위에 있는 왕을 국가수반으로 갖는 민주주의가 되기를 소망해왔다. 그러나 왕은 위로부터 정치에 개입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해왔기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8월의 어느 날 밤, 21세 학생운동가 파누사야가 시위대 앞에서 낭독한 선언문의 첫머리다. 왕실 개혁과 입헌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10개 의제를 제시한 이 선언은 태국 정치사상 최초의 왕실 공개 비판으로 기록된다. 1932년 6월24일을 기념하는 동판은 강제실종되었지만, 인민당의 기억은 젊은이들과 함께 돌아왔다. 대중운동으로서의 입헌혁명이 이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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