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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9)
일본은 국가의 책임을 은폐…한국은 고통의 기억을 삭제
허윤 | 부경대 국문과 교수
‘위안’ 문화의 기억 지우기
오키나와의 ‘히메유리’ 위령비
무고한 소녀들의 죽음을 통해
전쟁의 무서움을 기억하지만
국가에 대한 책임 논의는 부재
히메유리의 희생을 상찬하면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비난해
일본 식민지 정복 전쟁의 결과인
패전과 미군 주둔의 책임을 회피
1974년 오키나와에서 살고 있던 배봉기는 영주권을 신청하기 위해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혔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될 때,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추방당할 뻔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민족과 국가, 전쟁과 섹슈얼리티 문제를 한꺼번에 소환한다. 20세의 배봉기가 끌려갔던 섬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과 미군이 지상전을 벌인 유일한 장소였으며 일본 본토를 수호하기 위해 다수의 민간인이 전쟁에 동원되거나 자결한 곳이다. 지도상으로는 일본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외부’였던 오키나와에서 배봉기는 시민권 없이 30년을 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위안부’, 날품팔이 정도였다. 이 섬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바다 반대편에는 집단자결지와 위안소, 캠프타운이 있다. 그래서 섬 곳곳에는 전쟁의 역사를 기억하는 전시관이나 기념관이 많다.
오키나와의 기념관 중 일본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히메유리 위령비다. 이곳은 전쟁의 무서움과 평화의 소중함을 배우는 공간이다. 히메유리 자료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무고한 소녀들의 죽음을 통해 전쟁을 기억한다.
학도대에 참여했던 두 학교의 교지 이름을 따서 만든 히메유리는 ‘히메’(공주)와 ‘유리’(백합), 즉 순수하고 고결한 소녀를 상징한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이들은 종군 간호사로서 전쟁에 참여했다가 전체 223명 중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상당수는 자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히메유리 학도대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순결한 소녀들로서 영웅시되었다. 히메유리는 완전무결한 희생자이자 국가를 위해 싸운 애국자로 기념되었지만, 전쟁이 ‘꽃다운’ 소녀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평화 담론에는 이들을 자결로까지 몰고 간 책임에 대한 논의가 부재하다.
히메유리를 죽인 것은 자결을 명한 일본인가, 오키나와를 침략한 미국인가. 오키나와의 바다에 전함을 몰고 나타난 것은 미국이지만, 그 미군을 불러들인 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욕망이다. 오키나와 역시 일본에 병합된 국가라는 점은 책임의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한다. 그래서 전면에 강조되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소녀들의 죽음이다.
히메유리를 국가의 영웅으로 만드는 뒤편에 또 다른 소녀들이 있었다. 패전 후 일본은 각지에서 미군 ‘위안부’를 모집하고 “1억엔으로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킬 수 있다면 싼 편이다”라는 식의 말을 서슴지 않았다. 타락한 여성은 미군 상대로 돈을 버는 성매매 여성인 ‘팡팡’으로 재현되었다. 마루카와 데쓰시는 <냉전문화론>에서 포스트 워, 혹은 포스트콜로니얼 자장에서 ‘타락한 여인’이라는 테마가, 전쟁에 패배하고 식민지를 상실한 남성의 ‘거세’를 부인하고 그것을 대리보충하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즉 히메유리의 희생과 애국심을 상찬하는 한편, ‘위안부’ 여성을 비난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정복 전쟁의 결과로 인해 발생한 미군 주둔 문제를, 일본의 패배를 가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젠더와 포스트콜로니얼 문제를 연구하는 다마시로 후쿠코는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 전시의 개·보수 과정에서 위안소의 지도가 빠지고 A사인바(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위한 술집)의 사람 모형이 없어지는 등 군대와 ‘위안’ 문화에 대한 재현을 축소시킨 문제를 지적한다(다마시로 후쿠코,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 전시 조작 사건 재고’, 장수희 옮김, 여성문학연구 47호, 2019).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의 이야기는 기념의 자리에서 언제나 뒷전으로 밀린다.
한국에서도 미군 위안부 여성은
어리석고 타락한 여성으로 매도
국가 안보 해치는 ‘간첩’ 오명도
동두천 도시재생 프로젝트에서
한복 입은 소녀 그린 그라피티
위안부 둘러싼 기억을 지우고
현재화된 고통을 외면할까 우려
이러한 기억의 삭제는 한국에서도 나타난다. 국가의 관리하에 이루어지는 군인을 ‘위안’하는 제도는 사라지지 않고 한국 사회에 뿌리내렸다. 군인이 있는 자리에는 젊은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빠지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군 ‘위안부’는 한국과 미국의 동맹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였고, 이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는 경제 안보의 바탕이 되었다. 해방과 함께 남한 전역에 미군의 주둔이 확정되었고, 기지촌을 중심으로 특수엔터테인먼트 시설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공론장은 언제나 이들을 타락한 여성이라고 여겼다. 양공주, 유엔마담, ‘위안부’ 등으로 불렸던 여성들은 사치와 허영 때문에 ‘위안부’가 된 어리석은 여성으로 재현되었다. 때로는 영화 <운명의 손>(한형모, 1955)에서처럼 공산주의자로 지목당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 새로 이사 온 ‘수상한’ 사람은 공산주의자일지 모르니 관공서에 신고하라는 의심이 뒤따르던 시절이었다. 외국인과 어울리는 여성은 국가 안보를 해치는 간첩이라는 상상은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다. 공무원들은 ‘당신들은 애국자’라고 치하했지만, 미군 ‘위안부’에 대한 폭력과 통제, 감시는 계속되었다.
미군기지 내 흑인과 백인의 인종 간 갈등도 기지촌 여성들의 책임이었고, 기지촌 여성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한국인 출입금지’의 땅에서 기지촌 여성들은 국민이 아니었다.
이제 동두천 미군기지가 축소되고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지금 동두천시 곳곳에는 그라피티가 있다. 동두천시와 경기도 미술관 합작으로, 그라피티를 통한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복을 입은 소녀가 누워 있고 그 옆에 꽃이 놓인 작품이다. 미술관은 동두천의 역사를 위로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고 작가는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인터뷰한 뒤 “당신의 인생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뜻을 담아 작업을 완성했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반미 문화운동을 하는 작가가 남한을 여성으로 표상하여 희생자로 재현한 민중미술인 줄로만 알았다. 언제나 ‘조국’은 한복 입은 여성의 몸을 통해 식민의 역사를 기억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동두천 한복판에 있는 ‘꽃보다 예쁜’ 한복 입은 소녀는 동두천의 이미지를 진작시키기 위해, 즉 기지촌의 이미지를 벗고 문화관광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선택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동두천의 미군 ‘위안부’를 위로하기 위해 젊은 한국 여성을 꽃으로 재현하는 것은 기지촌과 기생관광의 기억을 가진 한국 사회에서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당신의 인생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었다며 위로하는 데 꽃과 같은 젊은 여성을 등장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아이러니하다. 그 여성의 젊음과 바꿔 동두천이 번영했고, 오늘날 그들의 생존권과 바꿔 재개발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미군에게 위로와 위안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며 해외에서 인정받은 그라피티 아티스트의 작품을 내놓은 도시 재생 사업은 미군기지와 군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을 이미 지난 일로 삭제한다. 현재화된 고통도, 생존 투쟁도 사라지고, 젊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관광도시가 되는 일만 남는다.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에 위안소 지도나 A사인바를 걷는 팡팡이 필요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한 외국의 예술 전문 사이트에서는 이 작품을 두고 “달콤하고 몽환적이다(sweetness and dreaminess)”라고 평한다. 동두천과 젊은 여성의 역사적 맥락이 소거된 이 작품은 유명한 그라피티 아티스트의 한복 입은 여성 연작이 될 뿐이다. 그래서 지금 문화관광도시 동두천에는 만화캐릭터와 꽃이 넘실거린다. 하지만 한복을 입은 젊고 예쁜 여성을, 심지어 누워 있는 여성을 관광도시의 아이콘으로 삼는 것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며 기지촌과 기생관광을 홍보하던 한국의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서도 안 된다. 군대와 ‘위안’ 문화에 대한 반성 없이, 동두천의 기억이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을 ‘꽃보다 예쁜’은 오히려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군대와 ‘위안’ 문화는 ‘당신은 애국자’라는,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로 치환될 수 없다. 여성의 기억을 재현하고 해석하는 그 방식에서부터 바꿔내야 하는 것이다. 이 경험을 함부로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라. 지금도 누군가는 기지촌에서 바로 그 ‘꽃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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