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96984.html
※ ‘강민혁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 한겨레신문 '책과 생각' 섹션에 철학에서 정치경제학까지 다양한 인문서를 4주마다 소개합니다.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자기 되기
강민혁 / <자기배려의 책읽기> 저자, 철학자
오래 전 나는 제법 큰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회사도, 나도 한껏 열의가 컸다. 그러나 그 열의가 불행을 부른 걸까, 프로젝트는 삐걱대더니 심각한 곤경에 처한다. 갖가지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제각기 진실을 말했고, 모두 그럴듯했다. 너무 많은 말 앞에서 누구도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자리를 힘센 의견과 다수 의견이 차지했다. 그러자 의견에 반하는 말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분노를 일으켰다.
말의 평등이 보장된 민주주의에서 진실 말하기는 번번이 위기에 빠진다. 말의 행상들이 무분별하게 돌아다니고, 진실은 잡풀처럼 쓰러진다. 이 틈을 타 가짜뉴스와 혐오 발언이 말 사이를 돌아다니고, 이내 공론장이 거짓으로 자욱해진다. 나쁜 말이 할퀴고 지나간 민주주의는 한없이 아프다. 그와 함께 공동체도 끝없이 병든다.
미셸 푸코는 이 진실의 문제를 좀 다르게 전해준다. 그는 어떤 말이 진실인지 알기 위해서 참·거짓을 식별하는 기준을 아는 것보다, 그 진실을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그가 어떻게 그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시절이 있었음을 계보학적으로 보여준다. 그리스 시대 ‘파레시아’(parrhesia)는 바로 그 ‘진실 말하기’를 뜻한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자’를 ‘파레시아스테스’(parrhesiastes)라고 불렀다.
묘하지 않은가. 우리는 진실의 말인 ‘로고스’가 그 자체로 진실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파레시아의 세계에서는 그 진실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값어치가 달라진다. 진실은 말을 얻어도 그 말만으로는 진실이 되기에 모자라다. 진실은 그것을 행할 주체에 스며들어서야 온전하게 진실이 된다. 즉, 파레시아는 파레시아스테스와 함께 비로소 파레시아이다.
학교에서 진실의 말을 가르친다고 파레시아라고 하지는 않는다. 또 어떤 진실을 폭로한다고 그 자체로 파레시아인 것도 아니다. 반면 철학자가 왕에게 군주정은 정의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파레시아이다. 파레시아는 구체적 비판이고, 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상대 마음에 상처 주고 분노를 일으킬 위험. 그러므로 파레시아는 자기가 자기를 걸고서야 가능하다. 그것은 시작부터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자, 여기서 우리는 파레시아 저 밑에 아틀란티스처럼 잠겨 있던 장엄한 대륙, 자기배려의 세계와 만난다. 자기배려(epimeleia heautou)는 진실을 따라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통치하고, 자기가 자기를 돌보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배려는 이기심과 나르시시즘, 그리고 안락함으로 매번 위태롭다. 그때마다 내 존재에 대해 비수 같은 시선이 필요하다. 파레시아는 바로 그 비수이다. 파레시아를 통해 자기배려는 인간의 작은 자아로 퇴행하지 않고 타자와 진실의 관계를 맺는다. 그 순간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자기 되기’라는 철학의 격투가 새 주체의 애벌레로 태어난다.
민주주의와 진실, 진실과 주체, 통치성과 자기배려, 자기배려와 파레시아. 이 심연의 주제들을 풀어놓고 푸코는 너무 이르게 우리 곁을 떠났다. 푸코의 말들이 미처 발효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우리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깊은 음지에 봉인된 푸코의 말들을 한 무더기 걷어와 양지 녘 공동체의 언덕에 심어보자. 그곳에 꽃필 삶과 민주주의의 새로운 미학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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