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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
‘기억을 학살하라’…그들이 비극의 역사를 부정하는 법
임지현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장
부정론을 부정한다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의 프로젝트 연구팀 ‘지구적 기억의 연대와 소통’이 기획시리즈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를 시작한다. 이 시리즈는 한반도를 포함해 전 지구적 기억공간에서 과거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기억전쟁이 미래에 대한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국가 중심의 공식적 기억에서 민중의 풀뿌리 기억으로, 자국 중심의 일국적 기억에서 국경을 넘는 초국가적 기억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은 20세기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족쇄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해방하고 기억의 연대를 향하는 첫걸음이다. 미래를 바꾸는 것은 과거를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부정론의 핵심은 기억을 죽이는 데 있다. 기억을 죽이는 것은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부정론자들은, 인간적 존엄성을 무시당하고 비통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도덕적 결단으로서의 기억을 부정함으로써, 응답 책임을 회피하고 ‘타자의 정의’를 부정한다.
홀로코스트가 한창이던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학살자들은 이미 부정론의 토대를 닦기 시작했다. ‘걸어 다니는 살인자’라는 별명의 게슈타포 설계자 하이드리히는 홀로코스트 학살 현장의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했다. 강제수용소 주변에 촘촘히 세워진 ‘사진 촬영 금지’ 팻말은 학살의 기억을 학살하기 위한 나치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수용소 촬영금지·공문서 파기 등
부정론 토대 닦은 나치 학살자들
유대인 학살을 ‘최종해결책’ 기록
나치 친위대장이었던 힘러 역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였다. 그는 학살을 지시한 공문서를 파기하고 수용소의 학살 흔적을 폭파해버리는 등 홀로코스트의 증거인멸에 앞장섰다. 휘하의 친위대원들은, 단 한 명의 증인도 수용소를 살아서 걸어 나가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가스실을 살아서 걸어 나온 증인은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독가스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학살을 넘어서, 학살의 법의학적 증거인 희생자 시체들마저 말살하려 했던 나치의 그로테스크한 안간힘은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치의 체계적인 증거인멸 작업을 보면, 홀로코스트에 대한 히틀러의 책임을 입증하는 최종명령서를 발견할 가능성도 극히 희박해 보인다. 히틀러의 ‘학살명령서’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1000파운드의 상금을 주겠다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데이비드 어빙의 허풍은 이런 사정을 엿보여준다. 부정론자인 자신을 역사적 진리의 수호자로 포장하는 싸구려 실증주의 수법이다.
학살작전을 ‘화려한 휴가’로 포장
전두환 “발포 명령 존재 안 해”
홀로코스트·광주 빼닮은 부정론
1980년 광주로 눈을 돌려보아도, 상황은 매우 유사하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오랜 수고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발포명령서’를 찾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현재로서는 ‘전 각하’가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강조한 군 지휘관 수뇌 회의에 참가했다는 자료가 전두환의 학살책임을 입증하는 가장 근접한 증거이다.
엄격한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정황증거일 뿐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다. ‘스모킹 건’이 없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전두환 장군이 자필로 서명한 발포명령서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법적 처벌을 넘어서 끈질기게 그의 책임을 응시하는 사회적 기억이 필요한 이유이다.
“발포 명령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며 학살책임을 부정하고 자기야말로 광주의 비극을 치유하기 위한 희생자였다는 전두환씨의 도착 심리는 홀로코스트 부정론과 놀랍도록 닮았다. 단순무식한 범죄자라고 차치해버리기에는, 부정론자들은 훨씬 교활하고 논리적 무장도 잘돼 있다.
이들은 단순한 증거인멸에 만족하지 않고, 간접적 정황증거들조차 잘 기획된 언어 조작을 통해 흐릿하게 만든다. 역사를 모르면, ‘최종해결책’이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를 의미한다고 알아채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우슈비츠의 시체 처리반을 ‘특공대’라고 불렀으니 알 만하다.
광주시민들에 대한 학살 작전인 충정작전을 속칭 ‘화려한 휴가’라고 부른 것도 문제다. 참혹함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위안부’도 일본군 성노예 제도의 실상을 은폐하기는 마찬가지다. 가해자들의 완곡어법은 기억을 지우기 위한 언어적 장치이다. 멀쩡한 말부터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부정론의 가장 큰 역설은 역사적 증거를 인멸한 자들이 엄격한 실증주의자로 자처한다는 데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증거, 증거, 증거!’를 외치는 것은 ‘증거’가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사실 부정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실증주의는 희생자들의 기억이 부정확하고 정치적으로 왜곡되거나 조작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자주 소환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최근 ‘미투’ 운동에서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된 사회적 저명인사들이 피해 당사자들의 희미한 기억을 믿을 수 없으니 확실한 증거 자료를 대라고 큰소리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미투 운동의 주 무기인 피해자들의 증언은 성폭력 가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음모라고 일축되기 십상이다.
일본에서 ‘미투’ 운동의 약세는 위안부 부정론의 득세와 한 쌍이다. 주변화되고 침묵을 강요당한 피해자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남성주의가 그 핵심고리이다. 이들 남성주의 가해자들은 문서로 입증하지 못하는 증언은 증거가 아니라는 방어 논리 속에 꼭꼭 숨어 있다.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자 중 한 명인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일본군이 강제로 조선 여성을 연행했다면, 명령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알리바이를 제시한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최종명령서가 없는 히틀러도 전두환도 모두 면책되어야 마땅하다.
“강제 연행 문서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군 성폭력 ‘강제 연행’ 왜곡
그마저 증거가 없다며 부정한다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성폭력’이라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느닷없이 강제 연행으로 제한해버리고는, 강제 연행을 지시한 군의 공식 문서가 없으니 피해자들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몰아붙인다. “저 할머니들이 정말로 위안부였다고 보증할 만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식이다.
권력 쥔 가해자 역사적 서사 독점
증거 없애고 실증주의자 자처
“증거 가져와라” 부정론의 역설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문서와 역사적 서사를 독점한 상황에서 힘없는 희생자들이 가진 것은 기억과 증언뿐이다. 그런데 증언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부정확하다. 실증주의로 무장한 부정론자들이 죄인 다루듯 증인을 압박하고 증언의 가치에 흠집을 내려고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피해자의 기억·증언엔 “조작”
폭력적인 언어로 몰아세우고
‘실증’이란 이름으로 정당화
‘거짓말’ ‘조작’ ‘왜곡’ ‘날조’ 등의 언어폭력이 역사적 비극의 생존자들에게 가해지고, 이는 ‘실증’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기억이 흐릿하다는 이유로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빼앗긴다. 자신의 내밀한 아픔이 타자의 실증적 언어로 규정될 때, 이들은 자신의 아픔을 인정받지 못한 데서 오는 극심한 소외감과 고통을 겪는다.
미래, 과거 바로잡는 데서 시작
기억 연구는 역사학의 미투 운동
국경 초월 ‘기억 연대’ 시급하다
현재 동아시아의 기억전쟁은, 호메이니의 이란과 미국의 백인우월주의 KKK단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의 연합전선을 구축했듯이, 일본과 대만의 부정론자들이 한국의 부정론자들과 극우적 연대를 결성하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부정론을 부정하는 작업이 국경을 넘어 밑으로부터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억의 연대를 모색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 공통의 ‘과거’를 지배하는 게임의 규칙 또한 ‘역사교과서’ 논쟁 시기의 ‘역사’에서 ‘기억’으로 바뀌어야 한다. 역사를 윤리적 판단이 배제된 회계장부처럼 생각하는 역사가들과는 달리, 기억 연구자는 역사적 기록에서 지워진 희생자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이다.
부정론의 인식론적 무기가 단세포적 실증주의라면, 부정론을 부정하는 무기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부름에 응답하는 기억의 책임인 것이다. 기억 연구는 부정론을 부정하는 역사학의 ‘미투’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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