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2)
한 공간, 어긋난 기억…‘정치의 격투장’
정일영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효창공원 미래를 기억하는 공간을 위해
장소에는 기억‘들’이 깃든다. 기억들은 퇴적층처럼 쌓이기도 하고, 같은 장소 속에서 상이한 기억들이 갈등을 거듭하기도 한다. ‘역사문화 특화형’ 도시 재생지역에 새롭게 선정된 효창공원 일대도 여러 기억이 다양한 방식으로 공존하는 공간이다. 서울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와 함께 ‘효창 독립 100년 공원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며, 5년간 사업비 200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라 한다.
효창공원의 역사는 복잡하기 그지없다. 효창공원은 조선 후기 왕실의 묘지였고, 이름도 공원이 아닌 ‘효창묘’ 혹은 ‘효창원’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이곳에 골프장을 만들거나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했고, 1940년에 정식 공원으로 지정했다. 해방 후 효창공원의 위상은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일본군 숙영지 철거 후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장소로 조성된 것이다. 1946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의 묘가 만들어진 것을 시작으로, 1949년에는 김구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이후에도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등 독립운동가의 유해가 안장되었으며, 안중근의 가묘(假墓)도 설치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의 묘역 옆에는 백범김구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말 왕실 묘, 일제 때 군사지역, 광복 후 김구 등 묘역
‘민족의 터’ 자리 잡나 했지만…
반공 위령탑·노인회관·운동장 등 여러 상징 이상한 공존
얼핏 보기에 해방 후 효창공원은 ‘민족의 터’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곳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묘소 외에 ‘북한반공투사 위령탑’ ‘원효대사 동상’ ‘고 육영수 여사 경로송덕비’ ‘대한노인회관’ 등 실로 다양한(?) 기념물과 시설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효창운동장’을 빼놓을 수 없다. 효창운동장은 건립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1950년대 중반, 이승만 정부가 독립운동가 묘역을 이장하고 운동장을 지으려고 하자, 의회와 독립운동가 및 유족회가 거세게 반대했다. 당시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 회장을 맡았던 심산 김창숙은 ‘효창공원에 통곡함’이라는 한시를 지어 “독재의 공과 덕이” “일순간에 뒤집힐 것”이라 경고하기도 했다. 결국 묘역을 이장하지 않은 채 운동장을 짓는 것으로 타협 아닌 타협을 했는데, 이는 하나의 장소가 여러 기억들의 ‘전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억전쟁’은 과거와 과거의 전쟁이 아니다. 기억이라는 상징을 앞세운 현실 정치 투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2000년대부터 효창공원을 두고 벌어졌던 논란을 보면, 효창공원의 ‘기억전쟁’은 현실 정치 투쟁임이 더 명확해진다. 같은 장소에서 호명되는 대상은 동일하지만 갈등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2000년대엔 현실 투쟁의 장…
‘투철한 역사관’ 이미지 노린 정치인들 국립묘지 조성 시도했으나
‘님비 현상’ 주민 반대로 무산
2000년대 들어, 국회에서는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만들기 위한 법안이 수차례 발의되었다. ‘민족정기’를 강조한 법안을 발의하면 ‘역사관이 올바른 정치인’이란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인지, 다양한 소속의 의원들이 법안을 발의하거나 지지했다. 하지만 정작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2005년 정부도 ‘효창공원 민족공원화 사업’을 추진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역 주민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2013년 다시 효창공원 국립묘지화 관련 법안이 발의됐을 때에도, 일부 용산구 구의원들과 주민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용산구청장도 2018년 언론 인터뷰에서 효창공원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선열들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국립묘지화는 안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데 국립묘지화에 반대하는 구청장의 입장은 확고한 반면, 그 이유는 참으로 애매하다. 효창공원 국립묘지화의 이유가 도리어 반대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국립묘지화를 반대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결국은 돈의 문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묘지는 기피시설 혹은 혐오시설이고, 아무리 독립운동가의 묘역이라 할지라도 묘지는 묘지일 뿐이다. 효창‘공원’이 아니라 국립‘묘지’가 들어서면 개발 이슈가 사라져 땅값·집값은 하락할 것이 뻔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민들이 국립묘지화에 반대했던 것이다. 심지어 온라인상에서는 차라리 김구 묘역을 옮기라는 주장까지 대두되었다.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성지로 숭배하는 민족주의와 묘지를 감추거나 추방하려는 자본주의의 갈등이 나타난 셈이다.
‘효창 독립 100년 공원’ 추진하는 서울시,
여러 집단 요구 다 수용하기보다 누가·무엇을·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해야
이 와중에 지난해 4월10일, 서울시가 2024년까지 ‘효창 독립 100년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효창공원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데다,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상이하고, 국립묘지화에 대한 주민들의 거부감이 심했던 터라 쉽지 않은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모든 요구사항을 몰아넣는 것으로 ‘협의’를 이끌어내려는 행정편의주의적 기획이라는 기우를 지우기 힘들다. 아직 초기 단계라 할지라도 서울시가 제시한 계획에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기억 행위의 기본 문법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 거대한 개발주의 앞에서는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조차 무기력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편의주의’인가? 계획의 의도대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사업이 진행된다면, 개발주의를 ‘국가’와 ‘민족’ 그리고 ‘시민’의 이름으로 포장한 ‘멀티테마파크’가 완성될 것이다.
장소에는 기억이 깃드는 한편, 삶의 모습도 반영된다. 복잡다단한 효창공원의 기억과 그것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삶의 재현인 셈이다. 모든 요구사항이 백화점식으로 들어간 효창공원 재조성 계획도 결국 우리네 삶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초라한 반영이 아닌,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를 상상하고 기획하는 장소를 마련할 수는 없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보다 몇 발짝 앞서 나아가 일상을 환기하는 공간이 아닐까? 효창공원의 새로운 공간은 주민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는 동시에, ‘미래를 기억하는 장소’여야 한다.
이를 위해선 침묵보다 논쟁이 필요하다. 새로운 100년을 내다보며 기획한다면 개발의 이름으로 모두를 침묵시킬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의 충돌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이해당사자는 물론이고 각 분야의 전문가, 시민사회의 뜨거운 논쟁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왜 ‘독립’인지, ‘100년’인지, ‘공원’인지, 계획명부터 문제 삼아 이야기해야 한다. 논쟁의 수위가 높아지고 피로가 쌓이더라도, 심지어 그 결과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또 다른 자양분이 될 것이다. 부디 효창공원이 수많은 재개발 사례의 하나로 기억되기보다는, 우리가 기억할 미래의 새로운 시작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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