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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6)
기지촌에서 투기촌으로 바뀐 이태원, 혐오와 망각의 여성착취사
김주희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기지촌 여성에 대한 새로운 추방령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안에서 여성이 된다. 그러므로 ‘여성의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활동은 여성을 사회적 존재로 만들어낸 역사와 제도를 드러내고 질문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이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배제된 여성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이 측은하기 때문이 아니라, 혐오와 추방의 성별화된 역사를 통해 그간의 담론장을 지배해온 보편 이론에 관한 인식론적 전환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한국 현대사에서 망각된 여성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태원을 소환한다. 특히 서울의 대표적 번화가 이태원을 기지촌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누군가에게는 낯설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이태원은 가장 손쉽게 ‘세계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다양한 세계요리 전문점, 수입식품 마트, 펍, 클럽, 잡화점과 같은 “색다른 감각의” 상점 외에도 각국 대사관,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아프리카 미용실 등을 드나들거나 그곳에 거주하는 다인종 외국인들이 이태원의 상품성 있는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태원 전성기로 알려진 1988년
반미시위가 가장 많이 열린 해
미군 범죄 피해자로 드러날 때만
기지촌 여성들은 같은 민족 대우
현재와 같이 상업 공간으로서 이태원 지역이 번성한 배경에는 인근 용산기지에 외국군이 주둔한 역사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1908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병참 기지화되어가던 시기에 용산기지는 현재와 같은 규모와 형태로 자리 잡았는데, 일본군이 사령부로 사용하던 용산의 군사시설은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에 그대로 인수되었다.
특히 1953년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기지로 이전하면서 용산에서는 미8군의 역사가, 인근의 이태원에서는 기지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창녀들의 언덕(hooker hill)”이라 불리는, 이태원 소방서 인근에 소위 “양키 바” 밀집 지역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1950년대 후반이었다. 덧붙이자면, 루인의 논문 ‘캠프 트랜스: 이태원 지역 트랜스젠더의 역사 추적하기, 1960~1989’가 밝히듯 이태원 기지촌 여성들의 역사는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경향신문 1971년 6월28일자 기사 ‘서울 새 풍속도 외국인촌(36)’에 “50년대 중반에는 남영동 일대에 있던 위안부들을 당국이 수도 관문 노상에서 북적대는 것이 미관상 좋지 않다고 이태원 쪽으로 옮겨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태원이 미군 기지촌으로 형성된 배경에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있었다. 달러 수입 때문이다. 특히 1970년대 초 미8군 병원이 용산으로 이전해오면서 기지촌 이태원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빈곤한 기지촌 여성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성과 사랑, 때로는 죽음의 가격은 한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를 이루었다.
여성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각종 미제 상품을 남대문시장을 통해 한국 사회로 유통시켰다. “양공주”를 멸시하던 중산층 가정에 “미제는 똥도 좋다”며 ‘미제 상품’이 팔려나갔다. 박정희 정권이 “건전한” 중산층을 육성하고자 한 시기였다.
이태원의 전성기라고 알려진 1988년은 반미시위가 가장 많이 열린 해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 미국이 빼앗아간 것을 되찾으려는 열망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이때 기지촌 여성들의 몸이 매개한 “양키”와 ‘미국적인 것’에 가장 손쉽게 추방 명령이 떨어졌다. 기지촌 여성들은 미군 범죄의 피해자로 드러날 때만 오직 같은 민족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강남에 룸살롱이 우후죽순 등장하고 대호황을 누린 것을 되돌아보면, 이러한 반미 민족주의는 이태원에서 소비자가 되길 거부당한 한국 남성들의 식민주의적 콤플렉스가 여성혐오와 결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군 남성들의 주둔국 여성에 대한 성차별, 인종차별 의식은 기지촌에서 지속적인 성 구매를 가능하도록 만든 요인이었고,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한국인의 멸시는 폭력을 방관하며 이들을 기지촌에 고립시켜 달러 경제를 촉진한 동력이었다.
90년대 문화 관광 상품화 거쳐
“돈의 메카”로 떠오른 이태원
여성들은 과거의 존재로 남아
이태원을 기지촌으로 기억해야
대안적 미래에 대한 상상력 가능
1990년대 한국 사회 전반이 국제화되면서 이태원의 특수함은 희석되었다. 기지촌 경제에 의존하던 지역 상인들은 불황에 대비한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고 ‘미국적인 것’을 ‘국제적인 것’으로 빠르게 번역하여 호주머니 사정이 좋아진 내국인 소비자를 유치하고자 했다. 동시에 1997년 이태원은 서울시에서 최초로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경기도 기지촌 지역 역시 관광특구로 지정되었음을 볼 때, 구시대 식민화되고 여성 착취적 역사의 흔적들은 지자체와 상인들의 노력을 통해 새로운 문화 관광 상품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곳을 떠나지 못한 여성들은 생존의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2001년 9·11 이후 미군 본부는 테러에 대한 대책을 강화하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태원 “양키 바”는 감시의 표적이 되었다. 얄궂게도 매년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이태원 지구촌 축제는 그 직후인 2002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2012년부터 미군 부대가 점진적으로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이태원에서 기지촌 경제는 저물고 상품성 있는 다문화 경제가 부상하였다.
오랜 시간 주민이었던 기지촌 여성들은 이제 이태원에 머물러 사는 것도 어려워졌다. “후커힐” 골목은 2017년 재정비 촉진구역에서 해제되었으나 이미 이태원은 2016년, 2017년에 걸쳐 전국에서 가장 땅값이 많이 오른 투자 유망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금융 전문가들은 이태원을 “돈의 메카”로 부르며 투자 유망 지역으로 꼽았다.
임대료 상승으로 경리단길 상인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들렸지만, 기지촌 여성들은 소리조차 낼 수 없다. 강유가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이태원>이 잘 보여주듯, 기지촌 여성들은 그저 현재를 살고 있을 뿐이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미래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이후 이들은 과거의 존재로 남게 된다. 과거 오랜 시간 배척되거나 탈환되어야 했던 “점령지”는 이제 영리한 투자자들의 신대륙이 되었다.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청량리 성매매 집결지의 재개발 과정을 기록한 <청량리: 체계적 망각, 기억으로 연결한 역사>에는 청량리의 일부 업주들이 보상금 액수를 문제 삼으며 ‘전국철거민연합회’에 가입하고 투쟁에 들어갔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업주들은 심지어 “성매매는 불법”이라는 논리로 업소에 남아 일하는 여성들에게 퇴거를 요청했다.
최근 부동산 투자자 커뮤니티에서 “집창촌을 따라가면 부동산이 보인다!”는 말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투기적 열망 속에서 “이태원 프리덤”은 늙고 가난한 기지촌 여성들의 영원한 추방을 염원하는 주문인 것만 같다. 성매매 집결지의 부동산 소유주, 건달, 포주는 때로 여성운동의 구호들을 탈취하고 있다.
기억은 언제나 사건 이후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후적이다. 그것은 기억을 촉발하는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고자 하는 의지와 분리될 수 없다. 이태원을 기지촌으로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여성의 안전 공간에 대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진 현재, 대안적 미래에 대한 확장적 상상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군의 재생산 비용을 기지촌 여성 개인에게 전가해온 한국 사회는 민주화된 신개발주의 아래서 다시금 주변화된 여성 개인의 희생과 추방만을 요구하고 있다. 미군 주둔이 초래한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때로 “불건전한” 기지촌 여성을 겨냥한다.
기지촌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기억이 가부장적 민족주의를 벗어나 여성주의적 분배 정의의 프레임으로 전환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태원의 미래를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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