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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7) 강제징용? 강제동원?…올바른 기억은 올바른 명명에서 시작된다

by RGCPP-gongbang 2020. 4. 1.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3312152005&code=940100#csidxe72e2bb3aa08efd9669540fc1817ad1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7)

강제징용? 강제동원?…올바른 기억은 올바른 명명에서 시작된다

 

강정석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강제동원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2017년 서울 용산역 광장 앞에 설치된 ‘강제징용노동자상’은 일제강점기에 동원된 노동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연구자들은 ‘강제징용’이란 표현이 일제의 ‘국민징용령’에서 나온 것인 만큼 ‘강제동원’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위 사진). 일제 강제동원 장소 중 한 곳인 일본 교토의 ‘단바광산’을 사람들이 둘러보고 있다(아래). 김영민 기자·단바망간기념관 제공

 

한·일 간 기억전쟁이 갈수록 태산이다. 전장의 한복판에는 일제 강제동원 문제가 있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로 이어지는 날선 공방 속에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무장한 주장이 고개를 든다.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검정 교과서를 확대하는 사이, 한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부정한다. 일제 강제동원을 둘러싼 한·일 간 기억전쟁의 정국은 코로나19 시국만큼이나 오리무중이다.

국가 대 국가의 문제는 외교로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외교는 늘 신통치 않았다. ‘외교상의 고려’ 때문에 한국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문서 공개를 수십년간 미뤄왔다. 국유지나 일본 총영사관 주변에 강제동원 기념비 건립도 허용하지 않았다. 일제 전범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은 5년이나 미적대다 2018년에야 확정되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산물인 화해·치유재단, 2019년 국회의장이 제안한 ‘기억·화해·미래재단 법안’(이른바 1+1+α안), 이런 시도들은 모두 국가 간 외교 우선주의 아래 ‘사태’를 더 꼬이게 만들면서 ‘사죄 없이 배상 없다’는 피해 당사자와 시민사회의 요구를 기각해왔다. 정부는 ‘피해자중심주의’를 중시하겠다고 화답했으나,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 입장을 단순 대리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추체험으로 나눠 갖는 일이다. 곧 개인의 기억을 공동의 기억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공 기억의 장소인 ‘기념비’는
그 자체로 기억을 구성하기도
징용이냐, 동원이냐…명칭 고민은
가장 올바른 표현 찾기 위한 노력

개인의 기억을 공동의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공적 형식은 기념비이다. 공공장소에 들어선 대표적 강제동원 기념비는 ‘강제징용노동자상’이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은 2016년 교토 단바광산 터를 시작으로 국내에서는 서울 용산역 광장을 비롯한 8개 도시에 세워졌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남성 노동자를 형상화한 ‘강제징용노동자상’은 기념비가 되어서도 수난을 면치 못한다. 국유지에 임의 시설물을 설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용산역 기념비엔 벌금이 부과되었다. 일본 총영사관 부근 기념비는 외교상 문제로 설치와 철거가 거듭되었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노동자 형상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노동자상 조각가는 특정 인물이 아닌 보편적 인권을 표상하는 ‘창작품’임을 밝히며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으나,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섬으로 1940년대 조선인 강제동원이 대규모로 이뤄진 곳이다.

 

2015년 이른바 ‘군함도 사진’ 사건 역시 조작과 왜곡의 홍역을 한바탕 치르며, 강제동원을 둘러싼 사회적 기억의 재구성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줬다.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라는 문구가 적힌 이 사진은 강제동원을 다룬 소설 <수난이대>의 해설에도 인용되었다. 또한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도 등장했으나, 결국 영화 <을사년의 매국노>(1965년) 촬영 소품으로 판명되었다.

소송이나 사진 조작 사건은 단순한 에피소드일 수 없다. 이 일화들은 공적 기억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함축한다. 그것은 무엇을 기억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억의 장소가 지니는 공적 효과는 단지 기억을 붙잡아두거나 불러내는, 보존과 회상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억의 장소는 그 자체로 기억을 구성한다.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가 중요한 이유이다.

성인 남성의 형상인 ‘노동자상’엔
채탄 함께한 부인·돌 캐는 소년 등
다국적 강제노동자가 안 드러나

‘강제동원 역사, 노동자가 기억하고 바로잡겠다.’ 올해 2월 양대 노총은 용산역 광장 노동자상 앞에 맹세했다. 지지하고 응원한다. 그런데 강제동원의 역사를 바로잡으려면 우선 명칭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인가 ‘강제동원노동자상’인가. 이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하다.

강제동원이 널리 사회화된 표현이지만 연구자들은 ‘강제연행·강제노동’ ‘강제노력동원’ ‘강제노동’ 등 다양한 표현을 써왔다. 역사적 상황을 가장 ‘바르게’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강제징용’은 일제 ‘국민징용령’을 참조한 표현이기에 일본 입장에서는 징용의 합법성을 주장하고, 법적 책임 외에는 다른 책임이 없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강제동원 기억전쟁의 핵심 사안인 전범기업을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권이나 미지불 임금 청구권과 관련해 일본 정부가 책임질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기억은 올바른 역사적 표현에서 시작할 텐데, 교토 포함 9개 도시에 세워진 노동자상 가운데 ‘강제동원’ 명칭을 쓰는 곳은 창원뿐이다.

공공 기억의 장소로서 노동자상이 놓치고 있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곧 기억의 다양성과 다방향성이다. 노동자상이 건립된 조각 형상은 지역마다 다르나, 공통된 노동자의 이미지는 바로 ‘성인 남성’이다. 강제동원은 일제가 ‘모집’(1939), ‘관알선’(1941), ‘징용’(1944)이라는 이름 아래 실행한 노무동원과 여성동원, 군인·군속동원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 안에는 성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미성년 남녀들이 있다.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곡괭이를 짚고 서 있든, 강제동원 노동자의 형상은 왜 성인 남성이어야만 하는가? 여성들은 어째서 소녀의 형상으로 표상되어야만 하는가? 좁은 막장 안에서 남편과 함께 채탄 작업을 했던 부인, 비행장 공사장에서 돌을 캐고 나르던 소년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의 다방향적 기억과 과거사는
개별 민족의 수난사가 아니기에
초국경적 기억의 연대가 필요하다

강제동원은 조선, 일본, 사할린, 만주, 중국, 남양군도 등 일본제국권 전역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내지인을 비롯한 제국의 모든 강제노동자들이다. 다국적인 강제노동자들의 기억은 다방향적이다. 따라서 그들의 과거사는 개별 민족의 수난사에 국한될 수 없다. 국경을 넘는 풀뿌리 기억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에 이름을 싣지 못한 무연고 유골을 발굴하고,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호응해 행동에 나서 정부와 기업 문서고의 빗장을 풀어 헤친 것은 일본의 풀뿌리 기억활동가들이었다. 1970년대 일본의 공식적인 국가 기억에서 누락된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역사를 파헤친 ‘민중사발굴운동’, 1980년대 홋카이도 탄광지역의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을 발굴한 ‘소라치민중강좌’, 30여년간 일본 정부와 우익의 거센 공격을 무릅쓰고 강제동원 자료를 추적하고 발굴한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과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위원회’의 자료 발굴과 수집, 한국과 일본, 타이완 젊은이들의 강제동원 유해 발굴 연대 네트워크인 ‘동아시아공동유해발굴단’의 밑거름이 됐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 그 연대는 화해를 표어로 내걸지만 국가주의의 틀 안에서 단락과 불통을 거듭하는 위로부터의 수직적 연대의 형식은 아니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기억공간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고, 그들이 들어서야 마땅한 기억의 자리를 마련하고, 부재의 기억을 공동의 기억으로 나누는 연대의 행동이어야 한다. 올해 500회를 돌파한,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 집회를 이끌어온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은 동참을 요청한다.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함께 힘을 모으자!”

기억전쟁의 한복판에서 필요한 것은 아래로부터의 기억의 연대, 국경을 넘는 기억의 수평적 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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