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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8) 억압에 맞선 노동쟁의 사북항쟁, ‘집단 린치 가해자’란 기억의 굴레

원문 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142149005&code=940100&s_code=as254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8)

억압에 맞선 노동쟁의 사북항쟁, ‘집단 린치 가해자’란 기억의 굴레

 

김정한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가해와 피해, 갈림길에 선 저항의 윤리

1980년 4월 일어난 사북항쟁은 ‘일한 만큼 임금을 받고 인권을 존중받고 싶다’는 광부들의 요구로 시작됐다. 당시 사북 탄광 농성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탄광 주변에 모여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역사적 항쟁들을 읽을 때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곤혹스러운 일들이 있다. 항쟁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폭력행위가 일어나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때, 저항하는 사람들은 가해자가 되고 그 피해자는 항쟁의 대의를 부정하게 된다. 사북항쟁도 마찬가지이다. 40주년이 다가오고 있지만, 광부들의 사적 폭력이 만든 가해와 피해의 상처는 난감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신경이 동원탄좌에 입사한 것은 1969년이다. 고향 경주에서 한학을 배워 잠시 서당 훈장을 했던 그는 종갓집의 7남매 중 맏아들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최대 규모의 민영탄광이 있는 사북에 맨손으로 돈 벌러 왔다. 탄광의 임금체계는 광부가 한 달 동안 채탄한 양만큼 임금을 주는 도급제였다. 더구나 탄을 캐오면 진탄을 눈대중으로 계산하는 ‘작도’라는 검수 과정에서 생산량을 ‘부비끼’(삭감)당했다. 절반을 까는 일도 흔했다. 많이 캐도, 명목 임금이 올라도 생계비에 못 미쳤다. 노동조합의 대의원이 된 신경은 대표라는 책임감을 갖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1972년 봄 고무줄 임금에 항의하는 파업을 한 후 집행유예를 받고 해고됐다. 돈 벌러 왔다가 전과자가 된 것보다 살길이 막막한 게 난처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싶어 사택을 안 비우고 억지로 버텨서 겨우 어렵게 복직이 됐다.

1970년대 민영탄광 동원탄좌
돈벌이 소문에 광부들 몰렸지만
판잣집·상하수도 없이 열악
노조는 어용, 지부장 파행 일삼아

이원갑은 제대 후 장성광업소에 석공으로 취직해 3대째 광산 생활을 잇다가 1973년에 동원탄좌로 와서 감독(반장)을 했다. 장성에서 퇴직하며 탄광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식구가 많았다. ‘손이 끊어지면 안된다’는 할머니의 원망으로 딸을 여덟 낳고 아들을 하나 얻었다. ‘벌이가 괜찮다’는 소문을 듣고 사북에 와서 보니 사택은 ‘하꼬방’이라 불리는 판잣집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얇은 합판 문이 떨어져나가면 가마니를 걸쳐놨다. 상수도와 하수시설도 없고 탄을 캐고 나서 씻을 공용 목욕탕도 없었다. 미개인 같은 삶이었다. 광산 재해율은 전 산업에서 가장 높았고 동원탄좌에서도 사고가 빈번했지만 안전시설에 대한 투자는 없었다. 그는 ‘고쳐야겠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노동조합에 발을 디뎠고 한국노동운동사와 노동법 책들을 봤다. 몇 년 동안 사람들을 모으고 은밀하게 방안을 모의했다. 사측에서는 친·인척들로 ‘암행독찰대’를 만들어 광부들의 일상을 밤낮으로 사찰했다.

1979년 4월 이원갑은 노동조합 지부장 선거에 전격 입후보했고 신경은 그를 지원했다. 대의원 간선제였던 선거는 사측이 사실상 지부장을 지명한다고 해도 될 정도로 부정이 심했다. 결과는 두 표차의 낙선이었지만, 다행히 부정선거가 밝혀져 전국광산노동조합이 재선거를 지시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사측과 경찰의 방해로 재선거는 없었다.

사북항쟁 진압에 나선 경찰들이 광부들과 대치한 채 앉아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광부·마을주민 6000여명 모여
도급제·비인간 처우 개선 요구
계엄사령부, 공수부대 진압 명령
주동자 149명 불법구금·고문

1980년 4월은 박정희가 사망하고 ‘민주화의 봄’을 기대하던 시국이었다. 12·12쿠데타로 전두환이 수장인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노동쟁의가 활발했다. 지금이 기회라고 여겨졌다. 4월16일과 17일 이원갑과 신경 등 노조원들은 광산노조 사무실에서 농성하며 지부장 직선제를 요구했다.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4월21일 억눌렸던 광부들이 파행을 일삼은 지부장을 성토했고 사북지서로 몰려갔다. 다음날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광부와 여성들, 마을 주민 6000여명이 모였다. 광부를 다 합해도 3500여명인 시절이었다. 도급제 개선, 지부장 직선제, 비인간적 처우 개선 등 마땅한 요구를 외쳤다. ‘안경다리’에서 경찰의 무리한 진압을 막아냈다.

계엄사령부는 4월22일 11공수부대 2개 대대를 보내 진압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렸다. 병력 투입시점은 4월25일 새벽이었다. 공수부대가 인근에 대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원갑과 신경은 많은 사람들이 총칼에 의해 해를 입을 것을 염려했다.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탄광의 화약고와 예비군 무기고를 점거했다. 대신에 지키기 만 하고 ‘뜯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화약고가 터지면 사북 전체가 다 날아갈 수 있었다. 공수부대의 공격을 막을 최후의 방법이었다.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면 사북은 ‘5·18 이전의 5·18’이 될 뻔한 상황이었다. 작전 명령서에는 총기 사용에 관한 협조지시까지 담겨 있었다. 사측은 위기감으로 적극 협상을 시도했고 4월24일 새벽 타결됐다. 하지만 합의사항은 이행되지 않았다.

계엄사 합동수사단과 강원도경은 149명의 난동 주동자 명단을 작성해 5월6일부터 연행을 시작하고 불법구금한 채 갖은 고문으로 빨갱이 혐의를 찾고 싶어 했다. 머리가 터지면 꿰매주고 다시 때렸다. 여성들에게는 성적인 가혹행위까지 저질렀다. 임시로 칸을 나눈 조사실에서는 비명이 다 들렸다. 이원갑은 그때 차라리 죽고 싶었다고 했다. 곧이어 광주항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고문 조사는 더 심해졌을지 모른다.

항쟁 끝난 후 세상에 알려진 건
지부장 아내에 분풀이 폭력 보도
일한 만큼 임금 받고 싶었던 저항
올해 40주년, 어떤 윤리를 가질까

항쟁이 끝나고 세상에 알려진 것은 ‘무식한 광부들의 난동’ ‘부녀자 집단 린치’ 등의 언론 보도였다. 보안사는 3월 중순부터 ‘K-공작계획’에 따라 비판적 언론인들을 솎아내고 검열하고 있었다. 철기둥에 묶여 있는 지부장의 아내 사진이 인권 존중 없이 실렸다. 그러나 린치 사건은 사북항쟁의 또 다른 비극이었다. 4월22일 오전 광부들과 여성들은 지부장 사택에서 지부장 나오라며 살림을 부수고 내팽개쳤다. 이웃집에 숨어 있는 지부장의 아내를 발견하고는 집단 폭행하고 광업소 기둥에 묶어놓고 성적인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다음날에는 손을 묶고 인질로 삼아 지부장을 찾기 위해 사북 시내를 끌고 다녔다. 지부장의 아내는 협상이 타결된 후에야 억류에서 풀려났다. 애꿎은 여성이 분풀이 폭력을 당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훗날 이원갑은 ‘없어야 했을 일’이라고 회고했고, 대표자로서 지부장의 아내를 찾아가 사죄했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가 지부장의 아내와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2018년 12월 강원 정선군 사북읍 사북뿌리공원에 세워진 석탄산업전사기념비. 김정한 제공

 

사북항쟁은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사이에 있었다. 일한 만큼 임금을 받고 인권을 존중받고 싶었다. 하지만 사측만이 아니라 군사반란세력이 장악한 정부와 행정당국, 경찰, 정보기관, 계엄군, 어용간부와 싸워야 했다. 사북항쟁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훗날 신경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배운 게 있어요, 가진 게 있어요. 우리가 가진 것은 오직 한데 있는 노동자들이 한목소리를 내서 기업주가 정신을 퍼뜩 차리게 하는 거지. 안 그러면 정신 차려요? 노동자들이 무섭구나, 이러면 안되겠구나, 이렇게 해야 기업주들도 깨친다고. 사람이 깨쳐야 한다니까.’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갈림길을 만나 패배했다. 그들은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되었고 한 여성에 대한 가해자가 되었다.

 

후세대는 사북의 저항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나도 가해자’라고 도덕적으로 반성하는 가해자의식도,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나도 피해자’라는 피해자의식도 기억의 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절망스러운 조건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은 어떤 윤리를 가질 수 있을까. 가해자의식과 피해자의식에 갇히지 않는 저항의 윤리를 고민할 때 사북항쟁의 기억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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