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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0) 요란한 ‘문화 스펙터클’이 지우려 했던 기억은 ‘5·18 광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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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122145005&code=940100#csidxf4120ce2df4a6e4acf873c1f364f05f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0)

요란한 ‘문화 스펙터클’이 지우려 했던 기억은 ‘5·18 광주’였다

 

배주연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국풍81’과 프로야구 출범

‘국풍81’은 관제행사로 기획된 대규모 문화축제로 1981년 5월28일부터 1주일간 열렸다. 행사장인 서울 여의도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우리 문화에의 애착이 뿌리내릴 터전을 마련하고, 젊음의 지성과 낭만을 펼칠 마당을 마련하여 ‘국풍81’이라 이름하고 전국 대학생과 시민이 동참하는 큰 잔치를 열고자 합니다. 5월의 대지 위에 신록과 훈풍이 나부끼는 젊은이의 광장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5월28일(목)부터 6월1일(월)까지 다채로운 행사와 젊음의 열기 속에 이 축제는 펼쳐질 것입니다.”(경향신문 1981년 4월24일자 1면)

 

전두환 신군부, ‘광주 1주년’ 의식
인력·예산 쏟아부어 ‘국풍81’ 치러
실패했지만 ‘3S’ 문화정치 신호탄

1980년 광주에서 5·18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같은 해 8월27일 제11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 지 꼬박 1년이 지난 1981년 5월28일 전국 대학생 민속·국학 큰 잔치 ‘국풍81’을 개최한다. 전년도 한국방송공사(KBS)에 통합된 동양방송(TBC)의 ‘전국대학축제 경연대회’를 확장하여 KBS가 주관하는 모양새를 띠었지만, 당시 청와대 정무제1비서관 허문도가 기획한 관제행사였다.

총 5일간 개최된 이 행사에는 주최 측 발표에 따르면 연인원 1000만명이 참여했고, 총 250여개의 대학 공연팀이 참가했다. 각종 민속놀이와 더불어 굿판, 팔도명산물시장, 연극제, 씨름판 등이 벌어졌고, 카퍼레이드와 불꽃놀이 등의 이벤트, 국내외 가수들의 초청공연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건 젊은이 가요제였는데, ‘잊혀진 계절’로 유명한 가수 이용(금상 수상)이 이 대회를 통해 데뷔했다. 주변 버스 노선이 여의도까지 연장 운행됐으며, 여의도 주변에는 통금도 일시적으로 해제되었다.

이 행사는 날짜 선정에서부터 기획 의도까지 다분히 5·18 1주년을 의식한 것이었다. ‘소요사태’의 주범이던 대학생들이 ‘창조와 활력의 원천’(‘전국 대학 총학장을 위한 만찬 격려’ 대통령 연설문, 1981년 1월13일)이 되어 문화의 한마당을 펼치는 그림이 필요했다.

그러나 연일 성황이라는 뉴스 보도와는 달리, 정작 대학생들의 참여는 저조해 군대에 가 있는 대학생들이나 농악반, 탈반 출신의 공무원 등이 동원되기도 했다. ‘민속문화’를 내건 행사에 걸맞지 않게 외국 그룹사운드를 초청해 언론으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고, 대학생 출연 독려나 공연팀 섭외에 막대한 예산을 사용해 행사 직후 야당으로부터 공세를 받기도 했다.

특히 5·18 1주년이 되는 시점에 진행된 행사라는 점에서 그 시기와 성격이 문제시되었다. 하지만 언론은 ‘국풍81’ 반대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을 축제를 망치려는 ‘극소수의 한심한 대학생들’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몹시 성공적이었다는 자체 평가에도 ‘국풍81’이 1회로 끝난 데에는 이런 이유들이 있었으리라.

프로야구 출범 2년을 알리는 포스터(왼쪽)와 원년 개막전에 시구하는 전두환씨.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중을 ‘스펙터클 소비자’로 호명
소비 부추기고 프로스포츠 출범
재벌들에겐 88서울올림픽 맡겨

그러나 비록 단발성으로 끝나긴 했지만 ‘국풍81’은 1980년대 3S(Sex, Sport, Screen)로 대표되는 5공화국 문화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5공화국이 내건 ‘창조적 민족주의’의 ‘창조’는 소비의 판타지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5공화국은 ‘새 시대, 새 질서’에 걸맞은 새로운 감각을 요구했고, 스펙터클의 소비자로서 대중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KBS를 통해 생중계되다시피 한 ‘국풍81’에서 ‘젊은이들’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운집한 대규모의 군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스펙터클이 되었다.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의 출현’이라는 이미지는 전파를 타고 안방으로 전해졌다. 1980년 12월31일 언론 통폐합을 통해 ‘거대 방송왕국’이 된 KBS는 TV 프로그램을 대형화하기 시작했다. ‘국풍81’ 역시 이런 기획의 일환이었다. 당시의 가구당 TV 보급률은 85%에 달했다. 게다가 1981년엔 컬러TV의 시대가 열렸다. 컬러TV는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 생산되어 해외에 수출되고 있었지만, 사치 심리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러다 1980년 8월1일을 전후하여 삼성전자, 금성, 대한전선의 시판규제 기한이 끝남과 동시에 국내 판매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12월1일 KBS 1TV는 대한민국 최초의 컬러TV 방송을 시작했다. 고가의 가전제품이었지만, 판매 시작 후 1년 만에 100만대가 팔렸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국풍81’ 역시 총천연색 화면을 타고 전국 방방곡곡에 중계되었다.

한편, 축제가 한창이던 1981년 5월 프로야구 출범도 함께 논의되고 있었다. 지역 연고의 재벌을 구단주로 하여 이듬해 정식 출범한 프로야구는 졸속 준비에도 불구하고 출범과 동시에 연일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 1983년에는 프로씨름이 출범했다. 프로스포츠는 큰 인기를 얻었고 박철순, 이만기와 같은 스포츠 스타들은 광고주들의 캐스팅 1순위였다.

그리고 그 절정에 88 서울 올림픽이 있었다. 1981년 9월30일 구(舊)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후, 5공화국의 시계는 1988년을 향해 있었다. 당시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노태우는 이명박, 이건희, 김승연, 김우중과 같은 재벌 총수들을 불러모아 각종 스포츠 협회와 연맹의 회장직을 맡겼다.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는 국민이 대다수였지만, 국민들은 외국인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길 요청받았고, 원곡을 부른 가수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던 “강물에 유람선이 떠 있는” 풍경을 상상해야만 했다. 그리고 88 서울 올림픽을 하루 앞둔 밤, 성공적 대회를 기원하는 축포가 5공화국의 또 다른 도심 스펙터클의 상징이었던 63빌딩의 화려한 유리 외벽 위로 뜨겁고도 화려하게 투영되었다.

복원된 기록영화 ‘국풍’에선
화려함 아닌 을씨년 풍경에 당혹
전두환, 재판서 헬기사격 또 부인
그 당혹감, 여전히 현재진행형

그러나 시각적 쾌락을 극대화한 5공화국의 스펙터클은 ‘가시권의 단속’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국풍81’이 개막하던 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생이던 김태훈 열사의 투신 소식이 몇몇 신문에 실렸지만, 그의 죽음을 광주와 연결짓는 언론은 없었고, 그마저도 ‘국풍81’ 기사에 묻혀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력과 시민들의 저항은 5공화국 내내 ‘광주사태’ ‘북괴의 획책’이라는 의도적 유언비어들 속에 발화가 금지된 주제가 되었다.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이후에 서울 도심은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에 들어갔다. 동시에 ‘미관상 좋지 않은 것들’은 모조리 정비사업의 대상이 되었다. 고작 1분도 안 되는 성화봉송을 위해 성화가 지나는 길 주변 판자촌 사람들은 한겨울에 거리로 나앉아야 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해외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어지러운 집안 사정’을 보여줄 수 없다는 말로 진압되었다.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화려한 스펙터클’은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자본’ 창조의 심상을 심어주었지만, 그 스펙터클의 이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짓밟히고, 울분을 삭이고, 싸우고, 죽어갔다.

작년 말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의 8㎜ 기록영화 <국풍>이 약 40년 만에 복원되어 공개되었다. 공개된 영상 속에 그려진 ‘국풍81’은 TV에서 보던 화려한 모습이 아니었다. 젊은 배우의 웃음도 없었으며, 활기 넘치는 대학생들도 필름 속에는 없었다. 대신 장터를 지키는 이들의 무료한 표정과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낮은 녹음 품질 때문에 현장 인터뷰를 녹취해 다시 읽어가는 대학생들의 목소리에서는 국풍의 기치였던 ‘청년의 열(熱)과 의지와 힘’이 아닌 냉담함과 무력감과 당혹스러움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당시 그들이 느꼈을 당혹감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4월27일 광주지법에서 재개된 사자명예훼손 재판에 1년여 만에 출두한 전두환은 헬기 사격을 다시 한번 부인했다. 다가오는 5월18일은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다. 1980년대의 화려한 스펙터클 뒤로 가리려 했던,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진실이 드러나고, 새롭게 5·18의 기억이 열리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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