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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2) 5·18 그리고 철의 폭풍…국가폭력 생채기 안고 살아가는 광주와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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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2)

5·18 그리고 철의 폭풍…국가폭력 생채기 안고 살아가는 광주와 오키나와

 

이영진 |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조교수

 

 

광주와 오키나와, 그리고 희생의 연대들

2017년 당시 일본 오키나와현 미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에 참가한 주민들을 일본 경찰이 한 명씩 끌어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7년 가을 광주에서 열렸던 국제포럼의 한 세션 ‘국가폭력과 인권’의 발표자로 오키나와의 작가 메도루마 슌을 초청한 적이 있다. 일면식도 없었고, 또 한국에 온 적도 없는 메도루마에게 e메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유일하게 믿었던 구석은 포럼이 열리는 도시가 ‘광주’라는 것이었다. 몇 번의 연락 끝에 겨우 승낙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초청을 고사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헤노코 기지 투쟁의 긴박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는 포럼의 장소가 바로 ‘광주’이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류큐대학 재학 시절인 1980년 당시 그는 문화제에서 ‘광주 비디오’를 상영한 적이 있다고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20대 시절에 보았던 오월 광주의 풍경은 그에게 어떤 앙금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다만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 광주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고, 마침내 그는 초대를 승낙했다.

메도루마의 발표 주제는 ‘얀바루(やんばる)의 자연과 문화, 오키나와 전투, 미군기지 문제’였다. 간간이 뉴스 국제면을 통해 들려오는 헤노코 기지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사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핑계로 주워 넘겨듣고 있던 차에, 현장의 슬라이드 사진과 함께 투쟁 현장을 열정적으로 보고하는 메도루마의 강연을 듣고 있노라니, 오래전 보았던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의 첫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스페인 내전의 슬라이드를 영국의 노동자 집회에서 보여주며 이 전쟁이 결코 스페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며, 우리의 전쟁을 당신들의 전쟁으로 만들라고 호소하던 한 민병대 장교의 모습이.

통과 금지(No Pasaran)! 매일 기지 정문 앞에서 자재 반입 트럭을 몸으로 막아내며 연좌농성을 하는 주민들, 해상에서 카누 투쟁을 하는 어민들의 싸움은 실로 전쟁 그 자체였다. 데모 주동자에 대해 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150일간 구류를 행하는 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 상황은 전후 일본이 자랑해온 ‘평화헌법’의 정지, 즉 ‘예외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예외상태의 공백지대를 채우고 있는 것은 오키나와에 대한 본토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과 편견, 그리고 경찰 기동대의 언어적, 물리적인 폭력이었다.

하지만 발표가 끝나고, 강연장을 뒤덮었던 것은 ‘침묵’이었다. 아니 ‘연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침묵과 연민의 정체를 규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결코 폭력에 대한 분노, 그리고 오키나와의 현실에 대한 무언의 공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현장에서 그의 발언은 ‘오키나와 문제’로 정리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픔과 관련한 경험을 한정된 사람들에게 숙명처럼 떠맡기고는 양심이나 연민에 근거해서 혹은 때로 정치적 슬로건과 함께 아픔을 이야기하는 구조로서의 ‘- 문제’ 말이다. 그 속에는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살아온 이들의 말들 혹은 침묵들과, 펜스의 바깥에서 이들을 관찰하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말들 사이의 균열, 불협화음, 어쩌면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깃들어 있다.

왜 당신들은 모른 척하고 있는가. 1980년 5월 이후 한국 사회에서 광주라는 도시가 이야기되어온 방식, 소위 ‘광주 문제’가 구성되어온 방식과 동일하지 않은가. ‘우리’도 똑같은 외로움을 견뎌내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발표를 마친 그의 표정에 깃든 왠지 모를 피곤과 고독을 훔쳐보면서, 한동안 나는 다시 그를 “지치고 상처받고 침묵의 늪에 빠져들게” 만들어버렸다는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한때 우리 역시 느꼈던 고독과 상처가 광주에서도 여전히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45년 3~6월 일본 오키나와
미군과 일본군의 이중폭력에
섬 인구 3분의 1이 무차별 희생된
비참한 역사 속에 조선인이 있다

메도루마와 같은 오키나와 작가들에게 80년 오월 광주의 학살, 나아가 항쟁에 대한 동시대적 공감이 있었던 것은 근현대사에서 그들이 겪은 비극적 역사에 대한 오랜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막바지인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전개된 전투에서 오키나와는 섬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이른바 ‘철의 폭풍’에 휘말려 희생된 비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광주의 오월이 그러하듯 경험이 말을 압도해버리는 이러한 엄청난 사건 이후, 그 사건을 언어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의 출발은 항상 ‘문학’이었다.

전후 오키나와 문학의 이채로운 지점은 일본 본토·미국(가해자) vs 오키나와(피해자)라는 이분구도에 빠지지 않고, 자신들의 전쟁체험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중첩되는 폭력과 그 연루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켜왔다는 점이다. 메도루마 외에 많은 오키나와 작가들의 작품에는 당시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끼어 이중의 폭력을 감내해야 했던 오키나와인 외에 어둠 속에 가려진 또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이 등장한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최소한의 은신처마저 찾지 못한 채 ‘철의 폭풍’에 휘말려 죽어간 조선인 ‘군부’, 조선인 ‘위안부’ 등과 같은 존재들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인종적·종족적 위계구조 속에서 중첩된 폭력의 최대 희생자는 조선인 ‘위안부’ 여성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를 상기한다는 것은 결코 내적 성찰이나 회고와 같이 평온한 행위가 아니다. 상기한다는 것은 오히려 현재라는 시대에 아로새겨진 정신적 외상(外傷)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조각난 과거를 다시 일깨워(re-membering) 구축한다고 하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다. 그 상기의 과정을 통해 오키나와의 순수한 희생을 재확인하는 것을 넘어, 조선인 위안부 유령의 원한 서린 목소리를 들으면서,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고자 하는 힘든 싸움을 계속해서 전개해온 것이야말로 전후 오키나와 문학장의 성실함이다.

뿌리 깊은 차별의식과 맞서며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지금도 싸우고 있는 이들은
광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안다
똑같은 상처를 견뎌야 하기에…

비행장의 헤노코 이전을 두고 갈등을 빚고 있는 후텐마 미군기지 전경. 이영진 조교수 제공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히메유리 위령비’ 앞에 참배객들이 서 있다. 이영진 조교수 제공

 

다가오는 6월23일은 75주년 오키나와 위령의날이다.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했던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가 자결함으로써 일본군의 조직적 저항이 끝난 이날을 오키나와는 ‘위령의날’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이후 7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오키나와는 여전히 미군기지 문제를 둘러싼 투쟁이 진행 중이다. ‘태평양의 요석’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일본 ‘본토’의 0.6%에 불과한 면적에 전체 미군기지의 74%를 떠맡고 있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일본이 오키나와에 속한다”는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말은 이런 모순적 상황에 대한 풍자, 그리고 본토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의 표현처럼 들린다.

왜 지금 오키나와인가. 그러한 물음을 갖게 된 것은 광주행을 주저하던 메도루마가 털어놓았던 80년 광주를 향한 마음을 떠올리면서부터였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를 폭격하기 위해 자신들의 섬에서 출격했던 미군기를 바라보며 공포를 느꼈던, 그리고 20여년 후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무차별 폭격에 자신들의 섬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가장 거센 반미투쟁을 전개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80년 오월 당시 신군부를 지원하기 위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미군 함대는 어떻게 비쳤을까.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80년 오월 광주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80년 이후 광주는 한국 사회, 나아가 전 세계에 많은 부분 빚져온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광주는 오월 이후 만들어진 전 세계적인 ‘부끄러움의 공동체’가 기꺼이 내주었던 진정성의 선물(gift)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광주를 기억하게 하는 동시에, 광주 역시 지금 한국 사회, 나아가 전 세계의 약자들, 소수자들에게 기꺼이 품을 내주고, 또 이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새로운 의무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의무를 수행해나갈 때 비로소 광주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박제화된 화석이 아니라, ‘영원한 청춘의 도시’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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