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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9) ‘이름’이 없어 ‘북한군 광수’로 몰린…풀뿌리 항쟁의 진짜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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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282035005&code=940100#csidx5a7ff0877f4002ea2d253bd2ffb6905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9)

‘이름’이 없어 ‘북한군 광수’로 몰린…풀뿌리 항쟁의 진짜 주역들

 

김정한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5·18민주화운동 40주년…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들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의 한 장면. 1980년 5월 사라진 신원미상의 한 청년의 행방을 쫓는 이 영화는 시민군으로 싸웠지만 역사가 기록하지 않았던 수많은 ‘김군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011 Films 제공

 

영화 <김군>의 반전은 아무도 ‘김군’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북한군 광수로 지목된 사진 속 인물은 무등갱생원 출신의 고아로 다리 밑에서 넝마주이를 하다가 시민군으로 활동했고 계엄군에 의해 사살됐다. 그는 당연히 북한군이 아니었지만,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이었다. 항쟁이 진압된 후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은 사상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고, 가족과 친지가 없는 이들은 실종자 명단에도 등록되지 못했다. 한때 ‘구두닦이, 넝마주이, 술집 웨이터, 부랑아, 일용품팔이’는 민중론을 입증하는 항쟁의 주역이라고 여겨졌지만, 1980년대식 민중운동이 쇠퇴한 후에 밑바닥 하층민이었던 그들은 복면을 쓰고 총을 든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올해에도 여전히 정상적인 시민이 아닌 ‘시민 이하의 존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어 있다.

신군부는 무등갱생원에서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항쟁에 참여했는지 의혹을 갖고 빨갱이들의 결부로 조사하고 싶어 했지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무등갱생원에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살았던 박래풍은 구두닦이, 자개공, 식당 종업원 등을 떠돌다가 1980년 스물셋에 화순 버스터미널에서 구두닦이와 매표소 일을 했다. 버스터미널에 있어서 소식이 빨랐다. 5월18일 광주에서 온 사람들에게 공수부대가 사람들을 때리고 잡아간다는 말을 듣고 분해서 다음날 친구와 함께 광주로 갔다. 금남로에서 처음 시체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데모를 하고 군인들과 맞섰다.

고아·구두닦이·넝마주이…
‘시민’으로 함께 싸웠지만
실종자 명단에도 없는 사람들
‘빨갱이 낙인’찍힌 채
역사의 그림자 속에만 존재
국가의 기억이 비켜간 그들
5·18 정신도 함께 바래져간다

하지만 ‘돌도 던지고 몽둥이도 던지면서 힘껏 싸웠지만’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고 겁이 나서 화순으로 돌아가려다가, 5월21일 상무관 앞에서 한 여학생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는 계엄군이 철수한 도청으로 들어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사람들과 경찰이 모두 떠난 화순 역전파출소로 가서 총을 나눠가졌다. 도청에서는 시신들을 옮기고 옷을 입혀 관에 넣는 일을 했다. 5월27일 새벽 도청 2층 강당에서 지키고 있다가 수류탄을 던지며 쳐들어오는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상무대, 화순경찰서, 교도소에서 빨갱이라 불리며 비인간적인 만행을 수없이 견뎌야 했다. 그는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무엇 때문에 죄 없는 시민을 무참히 죽였을까’라는 억울한 마음으로 시민군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염동유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를 그만두고 열넷에 광주로 와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양장점 일과 중국집 배달을 하다가 이곳저곳에서 다방 주방장을 했고 돈을 벌면 으레 시골집에 보냈다. 먹고살기에 급급해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1980년 5월에는 삼화다실에서 숙식하며 주방장을 했다. 손님들이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무참히 때린다는 얘기를 했지만 믿지 않았다.

5월20일 선배가 있는 양지다방에 갔다가 공수들이 사람들을 방망이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것을 직접 보고 나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공수부대 철수를 외치며 시위에 참가했다. 하지만 밤에는 공수들이 언제 들이닥칠까 무서워 잠을 제대로 못 잤다. 5월21일 전남매일신문 앞에서 총을 맞아 피를 흘리는 청년을 목격하고 ‘이제는 정말 공수들을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청에 가서 무기 회수도 돕고 시체를 지키기도 하고 외곽 지역 순찰도 했다. 5월27일 새벽 도청 정문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가 계엄군의 총소리에 기가 질려 총을 던졌다. 상무대에서 장작개비로 구타를 당하고 숱한 고문에 다리가 불편해졌다. 5·18을 겪은 후에는 의식에 변화가 생겨 정치를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고 학생들이 데모하면 관심 있게 바라보고 동참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군과 차량. 민주화운동기념회 제공 
도청 앞 광장에서 희생자들의 관을 옮기고 있는 유가족들. 민주화운동기념회 제공

 

‘김군’과 마찬가지로, 박래풍과 염동유는 기동타격대를 모집할 때 신청했다. 5월26일 수습파를 몰아내고 항전파가 도청을 장악한 후 결성된 기동타격대는 외곽 지역을 순찰하며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시내 치안을 담당했다. 대부분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다. 계엄군은 A급 폭도로 분류했고 무조건 빨갱이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들은 빨갱이와 무관했고 북한군은 더욱 아니었다.

 

단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변변한 돈벌이라도 찾아야 하는 고단한 삶을 살다가 공수부대의 폭력과 마주했다. ‘우리나라 군대가 시민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되는데도 오히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군인들이 우리 편이 아니고 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기동타격대는 도청 상황실에 제보가 들어오면 가서 확인해 조치를 취하고 조사실에 인계했다. 간첩이 나타났다고 신고가 들어와 출동하기도 했고, 강도 신고가 들어와 급히 가보기도 했다. 기동타격대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들의 역할은 ‘극렬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고 총을 쏘는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고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항쟁이 끝난 뒤 무등갱생원은 폐쇄되고 그 많던 넝마주이와 부랑자는 광주에서 사라졌다. 현재 광주시에 행방불명자로 242명이 접수되었지만, 연고자가 없는 사람들은 신고 자체가 불가능해 정확한 인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계엄군에 의한 암매장 의혹이 수차례 제기되었지만 유해 발굴은 미궁에 빠져 있다. 1983년경부터 알음알음 만들어진 ‘기동타격대 모임’은 무엇보다 행방불명자를 찾고 암매장 시체를 발굴하는 데 힘을 모았지만 보람은 없었다.

지난 40년 동안 ‘김군’과 같은 익명의 사람들은 서서히 잊혀졌고,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로 구성된 기동타격대는 국가의 기억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명명할 때 그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밀려났다. 대학생들은 신원이 확실했지만, 그들은 누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 무장세력으로서 민주화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불투명했다. 5·18의 민주화 담론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오늘날 북한군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이유이다.

<녹두서점의 오월>에 실린 증언을 보면, 5월21일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학살이 일어나자 윤상원을 비롯한 녹두서점 사람들은 ‘투쟁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살아서 만나자’고 약속하며 뿔뿔이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시외로 도피하는 도중에 트럭에 탄 사람들이 총을 들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발길을 돌려 다시 녹두서점으로 모였다. 구두닦이, 넝마주이, 갱생원 출신들이 흩어지지 않고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5월27일 최후의 항전이 가능했다. 광주의 하층민들은 그저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라 항쟁의 마지막 주체였다.

 

하지만 5·18에 대한 정부의 보상정책이 집단 보상이 아니라 개인 보상으로 귀결하고 개별적으로 희생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과정에서 항쟁의 주체라는 역사적 가치와 진실은 적합하게 평가되지 못했다. 국가의 기념이 화려해지고 사회의 기억이 빈곤해질수록 5·18의 저항정신은 소리 없이 사라져 더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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