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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1)
‘교과서로 무장하라’…때로는 신화가 역사를 물리치기도 한다
정면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조교수
국사 파동과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
“… 아까 ‘유리’와 ‘불리’를 말씀하셨는데, … 그 지도를 통해서 우리 역사를 해석하고 구성하는 것입니다. 유리하고 불리하다는 게 어떤 기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역사적 사실, 팩트에 대한 접근이라는 것이 모든 학문의 가장 기초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332회 국회-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회의록 제32호(2015년 4월17일), p.12, 참고인 임기환 답변 중]
때때로 전설 혹은 신화가 역사를 이길 때가 있다. 신화나 전설을 역사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국사교과서’는 늘 수복해야 할 고토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교과서는 때때로 역사적 기억들이 경쟁하는 큰 전쟁터가 된다. 전쟁터 안에서도 지도의 영역은 더욱 첨예한 최전선이 되곤 한다. 아마도 이차원 평면을 가르는 선이 보여주는 강력한 가독성 때문일 것이다. 토끼나 호랑이로 상상되는 ‘지리적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오염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대중의 욕망 또한 이 싸움을 더욱 부추겨왔다.
‘민족문화 창달’을 내걸고 여의도 광장을 달구었던 ‘국풍 81’의 열기가 늦가을 한기와 함께 기억 속에서 식어갈 무렵, 여의도 한쪽에서는 ‘민족사 복원’을 위한 새로운 이벤트가 벌어졌다. 1981년 11월26일과 27일 이틀에 걸쳐 국회에서는, ‘국사찾기협회 회장 안호상 등의 국사교과서 내용 시정 요구에 관한 청원’으로 인해 공청회가 열렸다. 진술인으로 소환된 당시 내로라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수모를 안긴 이 공청회는 학계의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상대편에는 작은 승리를 안겼다.
교과서는 역사적 기억의 전쟁터
지도 영역선 더욱 첨예한 최전선
1981년 ‘국사교과서 공청회’ 계기
논란 속 ‘단군신화’ 역사로 서술
당시 한 국회의원의 취지 설명을 통해 소개된 안호상 등의 청원 요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현 국사교과서는 국조 단군을 부정함으로써 민족과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할 우려가 있고, 둘째로 현 교과서에는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사실이 있어 민족적 자긍심의 형성에 심한 해독을 끼치고 있으며, 셋째로 1974년 국사를 바로 찾으려고 했으나 역시 식민사관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른바 ‘국사(교과서) 파동’은 1980년대 내내 역사학계를 괴롭혔고, 이후 전설이 승리하는 발판을 놓았다. 1984년 초판 사회과부도에는 한반도 북부를 점거한 ‘한군현의 위치’라는 지도가 게재되었는데, 이후 교과서나 사회과부도에서 한사군을 명시한 지도는 사라졌다. 그리고 제7차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국사교과서(국정)가 2007년에 일부 수정되었는데, “<동국통감>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라는 이전의 서술이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년)”로 바뀌었다. 단군신화가 역사로 서술된 것이다.
2016년에도 역사는 반복되었다. 학계의 관심 속에 2008년부터 2015년까지 8년간 야심차게 진행되었던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이 결국 무산되었다. 이 사업은 2015년 말 내려졌던 ‘폐기’ 결정이 번복되어 재수정과 재심사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2016년 6월29일 D등급(최종 점수 44점)이라는 결과가 통보되면서 공식적으로 중지되었다. 이러한 평가의 주된 이유는 지도학적인 문제로 설명되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역사학자는 드물다.
뉴라이트 계열로 의심되는 인사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으로 부임하고, 2014년 7월 낙랑군 평양 위치설을 부정하는 신념을 지닌 운영실장이 사업단 편찬실을 방문한 뒤, 지도편찬 사업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이후 몇몇 국회의원실의 자료 요청이 쏟아졌고, 2015년 3월20일에는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의 요청으로 동북아역사재단과 지도편찬사업단의 보고가 이루어졌다. 이후 지도 사업을 ‘동북공정’이나 ‘식민사관’과 연결해 비판하는 언론 기사들이 쏟아졌다.
2016년엔 ‘동북아역사지도’ 추진
동북공정·식민사관 비판에 ‘무산’
급기야 2015년 4월17일 열린 국회 제32차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는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 관련 논의’를 안건으로 다루었다. 규모가 작았을 뿐 회의 형식은 1981년 ‘국사교과서 공청회’의 재판이었다. 사업단 측 역사학자와 이 사업을 비난하는 측 인사를 한 명씩 참고인으로 불러서, 양측의 입장을 듣고 질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회의는 양측의 입장을 공평하게 듣고 토론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특히 이상일 의원의 의사진행발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참고인 이덕일씨가 준비한 자료가 회의 전날 사업단 측에 전해진 것을 문제로 삼았는데, “그렇게 되면 문제지를 보고 본인이 답을 만든 상황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저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업단 측을 ‘수험생’에 비유한 것인데, 참고인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추궁의 대상으로 불렀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동북아역사재단의 운영실장은 이 회의에서 4월2일에 이미 “서강대학교 지도편찬위가 제작 중인 지도집은 발간하지 않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고 발언했다. 회의장에서 주로 논쟁이 된 부분은 ‘한사군’의 위치를 비롯한 고대사 문제였다. 당시 회의록 내용도 낙랑군의 위치를 둘러싼 공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결국 한사군 문제를 비롯한 고대사 관련 공격이 대한민국 최초의 역사지도집 발간사업을 좌초시킨 셈이다.
신화가 역사를 이길 순 있어도
이들은 결코 ‘역사’가 될 수 없어
역사가, 특히 고대사가 ‘신화화’하거나, 전설이 ‘역사화’한 예는 한둘이 아니다. <삼국지>의 이야기들이 대표적이다. 225년 남만 정벌에 나선 제갈공명은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불모(不毛) 깊숙이 들어갔다”. 노수는 현재 쓰촨(四川)성과 윈난(雲南)성 사이를 가르는 금사강 상류를 가리키고, 불모는 중국인들이 오랑캐 땅을 지칭하는 상투어로 ‘풀 한 포기 안 나는 땅’이라는 뜻이다. 당시 제갈공명이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준 전장은 윈난성 동북부 지역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이 전쟁을 기념하는 기념물이나 유적지들 그리고 민간 전설은 윈난성 서부 지역뿐 아니라 미얀마와의 국경 너머까지 퍼져 있다.
바모(Bhamo·八莫)는 윈난성과 인접한 미얀마의 도시인데,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불모’와 ‘바모’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제갈공명의 군대가 이곳에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중화민족주의의 망상적 해석으로 치부될 일이지만, 여기에는 보다 복잡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현재 바모에 사는 많은 미얀마 사람들은 제갈공명을 사당에 모시고, 과거에 제갈량의 군대가 그곳에 왔었다고 믿는다. 또 중국과 미얀마 국경 지대에 걸쳐 사는 ‘소수민족’ 와족은 제갈공명을 ‘농경과 건축 기술 그리고 의류와 농기구 등의 물질문명을 전해준 영웅’ ‘사람 머리 사냥(獵頭) 습속을 멈추게 한 은인’으로 여기는 전설을 구전해왔다.
이러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넘쳐나고 관련 유적이 아무리 많아도 제갈량의 군대가 225년에 윈난성 서부 지역과 미얀마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전설일 뿐, 역사가 될 수 없다. 물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러한 믿음을 갖게 된 계기나 과정, 관련 기념물을 축조하는 행위와 그 사회적 맥락은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조선시대 널리 퍼진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자조선’ 이야기는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 단군신화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역사를 이겨도, 역사가 될 수는 없다. 물론 역사를 이겼던 그 사건들은 역사의 일부를 구성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아무리 애써도 신앙의 세계에서만 통한다.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열정이 중요한 가치가 되는 세상이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세계도 아직 남아 있다. 맹목적 애국애족이 초래하는 해악도 문제지만, 이에 영합한 정치권력의 개입은 더 끔찍하다. 학문의 세계는 이제 연구를 밥벌이로 삼는 이들에게 맡겨두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5000년 가까운 세월 이 나라와 민족을 살피느라 애쓰신 단군 할아버지는 이제 다시 신전으로 모셔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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