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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工房 강좌/₁푸코 '81년 루뱅 강의 강독

푸코 '81년 루뱅 강의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의 강의정황 (2/3)

미셸 푸코,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 1981년 루뱅강의

강의정황


파비엔 브리옹(Fabienne Brion) & 베르나르 E. 아르쿠르(Bernard Harcourt)



II. 인식과 그 주체

 그러니까 고백이다. 푸코의 작업에서 고백의 기능은 어떤 것일까? 간결하게 대답하자. 그것은 경첩, 논문 「주체와 권력」에서 푸코가 자기 작업의 두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경첩이다. 즉, “‘분할하는 실천’ … 에 있어서 주체의 객체화”,1) “주체를 객체로 만드는” 과정의 연구와, “인간 존재가 주체로 변형하는 방식”2)인 주체화 과정의 연구 사이의 경첩이다. 이것을 전개하면, 두 계열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대상의 계열에는 ‘객체적’3) 분할, 지배의 테크닉의 계열이 있고, 주체의 계열에는 주체적 분할, 자기의 테크닉이 계열이 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예속화assujettissement를 한편으로는 객체적 날조forçage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주체적 재건reprise subjective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이 재건 탓에 예종servitude이 자발적이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예종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재건의 술책[속임수]leurre에서 이탈의 요청으로, 유순함에서 숙고에 기반한 비유순함indocilité réfléchie으로, 예종에서 자발적 비예종으로 이행하는 문이 열린다.


요구사항이 많아 까다로운 임무

객체와 주체를 분절시키는 것. ―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인식에 있어서 이것들의 분절을 문제화하는 것. 푸코가 “인식형태”4)와 “‘주체-대상’ 규범”5)이라고 부르는 것을 동시에 심문하는 것. ― 이것은 [1961년의 박사부논문인] 「칸트의 『인간학』에 대한 서문」 이후, 푸코가 끈기있게 뒤쫓았던 기획인 것만은 아니다. 억압의 저편에 있는 철학적 전통과 과학의 담론을 비판한 것에서 나오는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려움도 따라다닌다. 계보학자〔푸코〕가 밝히려는 것이 ‘정신질환자’나 ‘범죄자’의 역사성일 뿐 아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인식 주체의 역사성이기도 하다면, 철학적 장과 과학적 장에 있어서 그 저항(réluctance)도 셈에 넣어야 한다. 1973년의 「진리와 사법적 형태들」에서 말하듯이, 정신분석의 실천과 이론은 분명히 “서양적 사유에서 수립된, 주체에 거의 신성시될 정도로 부여된 우선성을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재평가”했다.6) 그래도 “인식의 이론 … 의 영역에서, 혹은 인식론épistémologie의 역사의 영역에서, 혹은 과학사의 영역에서, 혹은 여전히 사상사의 영역에서”7) 주체가 이해되는 방식은 “여전히 매우 철학적이고, 매우 데카르트적이며 매우 칸트적이다”8)(푸코는 여기서 “내가 스스로 위치하는 일반성의 수준에서 나는 데카르트적 개념화와 칸트적 개념화를 분간하지 않는다”9)고 명확하게 말한다). 더욱이 “대학이나 학계의 맑스주의의 어떤 전통은, 이런 전통적인 철학적 개념화와 아직 관계를 끝맺지 못했다….”10) 즉, 10년 정도 지난 후에 푸코가 그렇게 회상하듯이, 그는 애초부터, 주체의 이론을 재정교화한다는 임무에 골몰한 것이다.

 요구사항이 많아 까다로운 임무이다. “주체가 진리와 맺는 관계, 혹은 단순하게는 인식의 관계는 실존의 조건에 의해 교란되고 흐릿해지고 흐리멍텅해져 있다”11)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원래 이 주장은 전통적 맑스주의의 분석에서는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일종의 부정적 요소”12)로서 번역됐다. “자신이 믿고 있는 관념을 자유롭게 형성하거나 자유롭게 승인하는 곳인 의식을 갖춘 주체”13)라는 통념은 “완벽하게 이데올로기적인 … 장치dispositif14)라고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주장하고, 개인들과 이들의 실존 조건 사이의 상상적 관계의 이런 양태는 인식의 주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낙인이라고 (알튀세르에게서 연역되듯이) 주장하더라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이데올로기를 말한다는 것은, 인식에 선행하여, 주체와 객체가 존재하며, 이것들 사이에는 제거할 수 있는 장막이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허위의식과는 별도로, 또 다른 의식이 있는데, 이것의 작업은 진리에 열려 있으며,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리를 해방하는 작업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가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은 “실존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은 인식의 주체에게 장막이나 장애물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 인식의 주체들이, 따라서 진리의 관계들이 형성되는 바로 그것”15)이라는 것이다. 니체로의 회귀 ― 진리에 덧붙여, 과학의 담론이 전제하는 주체의 역사를 기술하고, 의식이라고 하는 사건의 계보학을 구축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무의식은 영원하다”는 프로이트를 따라, 이데올로기 일반은 영원하다고 말하면서, 두 개의 명제 사이에는 “이론적인 상호 접근을 부과하는 유기적인 연결”16)이 있다고 말하는 알튀세르에 맞서) 주체를 만들고 분할하는 것의 역사성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문제는 주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망각하고 있는 것의 역사성이며, 달리 말하면, 의식되고 있는 것과 무의식적인 것의 역사성이다.

 이 미끄러지기 쉬운 땅 위를 푸코는 천천히 나아간다. “인식의 뿌리에 있는 것은 의식이 아니다”17)라고 푸코는 「니체에 관한 강의」[1971년 3월]에서 말했다. 거기에 있는 것은 힘의 의지이며, 이것은 “실체, 이해 가능한 본질, 자연, 창조 등의 형태 하에서”18) 대상에 다시 돌려진다. 이런 의지에서 주체 ― “왜곡déformations원근법perspectives의 시스템”19)이자 “지배의 원리”20)이며, 대상을 “자신의 동일성과 현실성réalité의 표식”21)으로 받아들이는 것 ― 는 출현한다. 분명히 철학적 전통에 있어서, 인식의 관계는 “진리를 위해 빈 장소가 아닌 모든 것”,22) 즉 “개인적 성격, 욕망, 폭력의 모든 것”23)을 의지가 스스로 지워버린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니체의 가르침은, 인식에 있어서 의지와 진리의 관계가 자유(진리의 자유와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폭력을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다. 푸코의 니체 독해가 가르치는 것은, “인식하다의 폭력에는 인식활동이 실현하는effectuer 동시에 전개할 것인 불변적, 본질적, 서곡적préalable 관계”24)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인식하는 활동을 정초하게 되는 ‘주체-대상’의 관계는 실제로 인식활동의 ‘산물’25)이며, ‘첫 번째 환영illusion26)이다. “아프리오리, 객관성, 순수인식, 구성적 주체 같은 그 모든 파생물”27)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철학적 전통과 과학적 담론의 주체에 동일시되는 사람들에게 (『정신의학의 권력』에서 논한, 파스퇴르가 의사들에게 끼친 충격에 관한 푸코의 언급을 바꿔 말한다면) “가공할 만한 나르시시즘적 상처”28)이다. 주체가 인식되는 방식은, 그들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의식’의 대행자agents29)이기를 꿈꾸는 지식인들은 이 꿈의 주체가 “인식이라고 하는 지식-권력의 형태”30)의 착각효과의 대열로 폄하되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힘겨워한다. 데카르트를 본 따서 명증성에 매달린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저항 없이 굴복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그들의 확신을 날려 보내기 위해 푸코가 휘두른 첫 번째 무기는 용어법을 정확히 하는 것이다. 그는 매우 빠르고도 신경을 써서 “어휘를 고정한다.”31) “인식”이란 “욕망과 지식에 전제적[서곡적] 통일성, 상호 귀속, 공통의 본성conaturalité을 부여할 수 있는 믿기 어려운 fabuleux 시스템”32)을 가리킨다. “지식”이란 “인식의 내부로부터 탈취하여arracher 거기에 의지의 대상, 욕망의 목적, 지배의 도구, 투쟁의 쟁점enjeu을 다시 찾아내야 하는 것”33)이다. 그러나 용어를 이렇게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필요하기는 해도 충분하지는 않다. 말할 뿐만 아니라 행해야 한다. 인식으로부터, 힘의 의지와 (주체의 의지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그 대상 사이의 경합(agôn)의 흔적을 탈취해야 한다. 주체의 물음을 제기하기 위해, 푸코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의 테마들 중 하나를 다시 거론한다. 이항구조로 이루어진 ‘시련-진리vérité-épreuve’, 삼항구조로 이루어진 ‘사실확인-진리vérité-constat’의 테마이다.

 1974년, 푸코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의학, 정신의학, 형사사법justice pénale, 범죄학은 인식의 규범을 통한 진리의 표명manifestation과 시련의 형태를 통한 진리의 생산 사이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다. 후자의 진리는 전자의 진리 아래에 항상 은신해 있으며, 그것에 의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한다.”34) 정신의학의 예에서 출발해 그는 파스퇴르의 병원에서 희미해지기를 그치지 않는 진리의 생산 기능이 어떻게 해서 이와는 반대로 19세기의 정신의학 병원에서 비대해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곳은 “진단과 분류의 장소”35)이지만, 이와 비슷한 정도로 “설전을 벌이는 장소이며, 승리와 복종soumission이 문제가 되는 제도적 장”36)이다. 이어서 푸코는 자신이 설정한 무대 위에 샤르코를 등장시킨다.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주인인 샤르코는 “의학적 지식-권력의 요구를 받아들여”37) 현상들(혼수상태와 긴장성 분열증 … )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히스테리를 어떻게 과학에 대한 대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지를 보게 해준다. 또한, 질병학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권력관계가 어떻게 피암시성suggestibilité(“히스테리의 최고 미덕, 비할 데 없는 유순함, 진정한 인식론적 신성함”38))이라는 특수한 징후적 특질 속으로 사라지는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구성된 대상에 의해, 인식의 순수 주체라는 신분이 샤르코에게 어떻게 수여되는가이기도 하다.

 『감시와 처벌』에서는 형사사법과 범죄학이 새롭게 다시 다뤄진다. 그것은 반복이지만, 범죄자와 억압의 관계는 대상과 인식의 관계에 등치되어 있으며, 억압은 빙산의 보이는 부분일 뿐이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다. 푸코의 강의를 듣고 읽은 사람들은 “분할적 실천”에 관한 분석에 바쳐진 작업으로부터 지식-권력 개념을 끄집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자주 “인식이라고 하는 특이한 형태의 지식-권력”39)이 탄생시키는 주체를 잊어버린다. 푸코가 연구한 인물들 중에서도 그들은 “분할적 실천”이 타자들로부터 분리시킨 사람들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소홀히 한다. 즉, 푸코가 『라스 메니나스』를 평하면서 이야기한 것인데,40) 그림 안쪽에 매달린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는 재현의 주체와 관람자들les représente을 재현하는 동시에 주권적 주체의 반영된 모습le reflet을 재현한다. 식별(discernement)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 인식의 차원에서는, 판별(discrimen)과 범죄(crimen)가, “분할적 실천들”이 객체화하는 주체들을 여백으로 물러나게 억압refouler하면서, 또한 주체적 분할의 물음까지도 억압하는 것인 양 모든 것이 이뤄진다. 정신질환자나 범죄자의 계보학은 전이transfert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푸코가 철학적 전통의 주체와 과학의 담론의 주체(코기토, 재현의 주체, 의식, 혹은 어떤 양태이든)를 조준할 때, 전이는 저항으로 변형된다.


망설임

어려운 점이 있다. 형사사법의 위기 또는 범죄학의 위기, 정신의학의 위기 ― 즉, 범죄(crimen)와 판별(discrimen)을 자신의 전문분야로 삼는 ‘분과학문’의 위기 ― 가, “인식의 장에서 이런 분과학문들의 한계나 불확실성을 의문에 부친다”41)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어떤 철학자한테는 너무도 손쉽다. 이런 위기가 더 나아가 “인식을, 인식의 형태를, ‘주체-대상’의 규범을 의문에 부친다”42)〔이 철학자가〕 받아들일지 어떨지가 된다면, 틀림없이 난이도는 올라가겠지만, 아무튼 이건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분과학문들”이 분리해버린 대상에서부터, 분할된 주체로 나아가게〔초점을 옮기게〕 되면 어떨까! 철학과 과학의 주체에 관해, 그 통일성을 의문에 부치는 것. 인식의 주체에 있어서, 주체에게 버거운 욕망을 명백히 하는 것. 철학적 전통과 과학의 담론에 있어서 “욕망의 주체와 인식의 주체가 하나일 뿐이다”43)는 것은, “욕망이 그 효력efficace과 더불어 사라지기44) 때문임을 ―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 보여주는 것…. 파레르레시아스트[파르레시아를 실천하는 자]인 푸코에게 ― 푸코는 파르레시아(parrêsia)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부터 이를 실천했다 ―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주체와 그의 분열schize을, 그리고 이것들의 비가시성을, 그리고 이것들의 비가시성의 비가시성을 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도전이 ― 진리의 용기라는 게임의 규칙이 그렇다 ― 푸코에게 귀를 기울이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에게도 던져졌다. 즉, 방어기제를 구사해서 자신이 무엇을 보호하고 있는가를 다시 묻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인식이라는 형식을 넘어서서, 자신의 향락을 의문에 부치는 것을 흔쾌히 승낙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큰 상처. 만만치 않은 도전. 푸코는 작업을 여러 차례 수정한다. 『감시와 처벌』에서 1년 후인 1976년에, 『성의 역사』 1권이 출판된다. 주체의 물음을 다시 던지기 위해서일까? 『성과 진리(Sexe et vérité)』45)라는 제목이 어떨까 생각하다가 푸코는 『지식의 의지』를 고른다. 1970-1971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이미 사용됐던 제목이다. 8년 후의 『쾌락의 활용』의 서문에 적혀 있듯이, “당시는 욕망 또는 욕망하는 주체라는 통념이 하나의 이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널리 받아들여진 이론적 주제를 구성했다.”46) 그는 주권적 주체를 “사건화하기”47) 위해서 자신의 동시대인들의 갑옷에 이 약점을 투자〔투여〕한다. 거기에서 제시된 기획은 “근대의 서양사회에서 〔지금은〕 친숙하지만 19세기 초 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통념인 ‘섹슈얼리티’의 ‘경험’으로서 어떤 것이 스스로를 구성하는 방식을 파악한다”는 것이다.48) 그는 욕망 또는 욕망하는 주체의 계보학을 쓸 생각이었다. 다만 1984년에 명확히 말했듯이, 그것은 “욕망, 색욕concupiscence, 리비도 같은 잇달아 생겨난 개념화의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판독하도록 하고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하며 고백하도록 만드는, 더 나아가 개개인들이 자신들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그것에 의해 자신의 존재의 진리를 ― 자연적 존재이든 타락한 존재이든 ― 욕망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실천들을 분석하는 것”이다.49)

 이 책의 중심은 “<성의 과학(Scientia Sexualis)>”이라는 제목의 장이다. 거기에서 푸코는 우선 사실확인-진리의 모티프와 시련-진리의 모티프를 분리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내내 성(sexe)은 두 개의 변별적인 지식의 등록부에 기입됐다. 생식의 생물학과 성의 의학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실제의 거래는 전혀 없었고, 상호적 구조화도 없었다. 전자는 후자와 관련해 먼 거리의, 그리고 완전히 허구적인 보증[증명]의 역할밖에는 맡지 않았다.”50) 이어서 시련-진리에 관해 푸코는, 보기와 듣기의 거부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 거부는 “명확하게 세상에 내놓거나 혹은 정식화가 긴급하게 요구되는 바로 그것”51)에 대한 거부이다. 여전히 샤르코의 차례이다. 그는 막대기를 환자의 자궁 위에 대고,52) 히스테리성 위축contracture hystérique을 나타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러나 G라는 여성 환자가 “그 어떤 은유도 담고 있지 않는 말로, 성기인 막대기bâton-sexe를 요구했을”53) 때, 사라진 것은 그녀였다. 조작opération의 결과, 두 개의 새로운 계열(serie)이 생겨나, 낡은 모티프들이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결합된다. 〔첫째〕 사실확인-진리의 계열. 인식의 주체, 그리고 “서양에서 과학적 담론의 제도를 지탱했던 지식의 거대한 의지”54)의 계열이다. 〔둘째〕 시련-진리의 계열. 욕망의 주체와, 그것이 담고 있는 ― 장갑처럼 학자의 담론을 배가시키고, ‘오래된 고지식함’과 ‘철저한 맹목55)을 축재하는 ― “비-지식의 집요한 의지”의 계열이다. 전자의 계열이 ‘생물학’과 ‘생식’의 기표들에 의해 재현된다면, 후자는 ‘의학’과 ‘성’이라는 기표들에 의해 재현된다.

 그러나 푸코는 샤르코가 욕망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주인인 샤르코가 열정을 갖고 행사한 의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중에 프로이트가 간파했던 대로, 섹스이다. 그렇지만 물론, 샤르코는 생식의 생물학에도 통달했다. 조작manipulations을 할 때,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참조한다(막대기를 G양의 자궁 위에 댄다). 이것은 은유일까? 분석의 목적에는 구별된 계열들이 서로 겹쳐져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까? 이것이 사르코의 실천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샤르코와 G양의 관계는 〔우선은〕 인식의 관계이다. 이런 인식에 의해 관계하는 두 개의 항은 각각 d/S와 d/O로 기입할 수 있다. 아니 Hd/Sc와 Fd/Oc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샤르코는 과학의 담론에 의해 인식의 주체(Sc)로서 호명된 개인이며, 또한 욕망에 의해 움직여지는 남성(Hd)이기도 하다. G양은 인식의 대상(Oc)이다. 동시에 샤르코가 억지로 흡입하게 한 아질산아밀의 증기 속에서 그녀가 기억했듯이, 그녀는 욕망하는 여성(Fd)이기도 하다. 샤르코의 욕망이 G양의 욕망과 같지 않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샤르코의 편에서 지식과 권력의 욕망인 것은 G양의 편에서 섹슈얼리티의 장치dispositif에 있어서 (생식을 향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와 관련 없이) 성적 욕망이라는 형태를 명백히 취하는 것을 대신하고 있다. 인식의 관계에 있어서 효력을 낳는 것은 이렇게 오인된 욕망들의 마주침이다. 욕망에 의해 활처럼 휜 신체가 샤르코와 제자들을 매료시키고, 이들의 주목을 끈다. 욕망이 낳은 환상illusion이 그들을 다시 모이게 한다. 샤르코에게 욕망은 지식-권력의 축적 원리에 속하지만, G양에게는 착란적 영합complaisance délirante 원리에 속하는 것이다.

 첫 번째 교훈. 인식의 주체와 대상은 두 사람 모두에게 욕망의 주체이다. 다만 욕망을 ‘지닌du’ 주체라기보다는 욕망을 ‘따르는au’ 주체이다. 왜냐하면 샤르코와 G양의 행동[품행]이 의지에 의해 방향이 정해졌다고 해도, 이 의지는 개별 주체의 선택이나 결정의 형태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가 권력관계에 관해 말하듯이, 의지는 의도적인intentionnel 동시에 비주체적non subjectif이다.56) 두 번째 교훈. 이 욕망은 인식에 있어서 맹목의 원인이 아니라 중계를 담당한다. 그렇지만 욕망은 히스테리적 위축contracture에 의해 주어진 예에서 드러나는 합선court-circuit의 형식을 통해서, 그 맹목을 대리보충한다. 세 번째 교훈. 이 대리보충은 보증과도 같다. 재현représentation의 세계에서는 신이 보증을 대신하지만, 이 세계를 떠나면, 욕망에 시달리는 인식의 주체에게 유일한 보증은 그가 인식의 대상으로 간주한 자에 의해 주어진다. 즉, 그의 욕망과는 변별적인 욕망에 시달린, 그러나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가 부여하는 보증 말이다. 네 번째 교훈. 살페트리에르의 남편인 샤르코는 수육한incarne 히스테리 환자라는 ― “권력관계는 신체의 내부로 통과한다”57) ― 보증밖에는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이 보증에 관해서는 G양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므로 G양이, 샤르코가 자신에게서 보고 싶어 하고 인식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보게 하고 인식하게 해줄 때, 그녀는 자신을 권력의 공모자로 만든다. 그녀는 지식이라는 동기와 수단에 기초하여 자신에게 행사되는 권력의 공모자가 된다. 진실로, 그리고 실제[현실]로.

 이것은 주체의 재건일까? 아니다. 개별 주체의 선택도 없고, 결정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도 하다. 히스테리 환자의 “인식론적 신성함”58)을 낳는 이런 재건의 원동력은 욕망이기 때문에. 확실히 히스테리 환자는 인식의 대상이지만, 히스테리 환자가 복종하는 것은 욕망이다. 그렇지만 자발적 예종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푸코가 그것에 대해 ‘유순함’59)이라는 말을 쓰고, 떠맡고 받아들이는 ‘책임’60)을 말하기 때문이다. 샤르코가 G양에게 귀속시킨 정체성의 산출에 의해, 이렇게 만난 무대의 주인공들 사이에 지배관계가 생겨난 것이다. [지배관계의] 현실화actualisation 조건은 [G양에게] 귀속된 정체성의 유효성을 G양이 인정하는 것이다.61) 다섯 번째 교훈으로,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의 신체를 “완전한 형상에 있어서”62) 즉, “완전한 지식과 완전한 무지에 있어서”63) 받아들인다는 점, 그리고 샤르코도 G양도 사태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모른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즉, 권력은 의식에 내부화되기 전에 신체를 건드리는atteindre 것이다. 힘의 관계들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재현에 의해 중계되어서는 안 된다.64) 더욱이 여섯 번째 교훈으로, 19세기 후반의 병원들에서 “히스테리의 폭발적 증가”65)가 나타났다는 점, 이것은 “정신의학적 권력의 행사 자체에서 오는 여파”66)라는 점을 지적해두자. 여기에는 샤르코와 G양이 종속된 욕망, 의식의 바깥hors에서 권력행사의 중계로서 작용하는 욕망의 역사성이 있다.

 여기서 주체와 그 분열schize이 보이게 된다. Sc와 Oc는 그 의식적 부분을 상징하는데, 철학적 전통과 과학의 담론은 〔오로지〕 이것〔만〕을 떠올린다. 〔그리하여/그렇게〕 그 무의식적 부분인 Hd와 Fd는 억압되고 망각된다. Hd/Sc와 Fd/Oc의 관계에서는 소문자 d가 H와 F(섹슈얼리티의 장치dispositif에 있어서 적절하게 성화되어sexués 있다)를 촉발한다[영향을 미친다, affecte]. 조종〔진두지휘〕하는 것은 이 소문자 d이다. 이 소문자 d는 해독해내야 할 비밀이라기보다는 담론이 개인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이 담론이 개인을 주체로서 생겨나게 한다causer. 가설적으로 얘기한다면, d의 해독을 목표로 하는 실천에 의해 오히려 d의 암호화가 진행되고, 그래서 d는 욕망의 진리로서 구성된 것과 연결된다. 구성은 해독/암호화 조작(시련)을 통해서 이뤄지지만, 진리는 실재에 부합하는 정체성이라는 형식(확인)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기획된 작업의 관건enjeu은 억압refoulement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 이 결과(Hd/Sc와 Fd/Oc), 그리고 이 주체의 방정식의 항들 각각에 관한 역사를 만들기. 이것에 덧붙여 푸코가, 의견doxa이 “역사적 장의 바깥hors에”67) 뒀다고 말하는 욕망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1976년에 예고된 『성의 역사』일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 발상idée은 “성적 행동comportement을 기화로 삼아 … 어떻게 개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그리고 타자들에 대해 욕망의 해석학을 행사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하는”68) 것이다. 물론 『성의 역사』가 “그 배타적 영역이 분명히 아니었다”69)고 하지만. 그러나 푸코는 곧바로 어떤 필요성을 결론으로 끌어낸다. 진리 게임들 중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맺는 관계를 연구하고 더 나아가 권력관계들과 관련시켜 진리 게임들을 연구한 후, “진리 게임들을 자기에 대한 자신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의 구성 속에서”70) 연구하는 데 몰두해야 한다. 『성의 역사』도 역시 주체의 역사인 것이다.


정치와 윤리

 정치와의 관련은 어떨까? <성의 과학(Scientia sexualis)>을 둘러싸고 분석에 무게의 중심을 둔 『지식의 의지』는 권력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한다. [사회적] 억압(répression)은 “[무의식적] 억압(refoulement)을 규정하는 사회적 윤곽을 보이게 한다”71)는 발견적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서양에서 작동하는 권력 메커니즘은 이 차원에는 없다. 신체의 해부정치와 인구의 생명정치의 접합부jonction에 있는 섹슈얼리티가 그것을 보여줄 채비가 되어 있다. 권력은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작동하는 동시에, 말하는 것을 의무로 부과함으로써 작동하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권력은 우리에게 그리고 또 다른 우리에게 ‘진리’를 말하도록 하는 의무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의 진리를 말이다. 시련의 의례를 통해 그렇게 구성된 진리를 말이다. 우리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그 역방향으로 우리라는 주체에 대해 효과를 위해서이며, 그 효과란 할당된 정체성의 감옥 속에 우리를 가두는 것이다. 더욱이 가령 G양처럼 남편이 알고 싶어 하는 대상을 남편을 위해 구현하고incarnons, 자신을 가둬버리는 문의 열쇠를 자신이 마지막으로 돌리는 경우, 도대체 어떤 향락이 우리의 품행conduite을 인도하는conduit 것일까…. 아무튼, 우리는 자신들이 억압되고 있다고 열심히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억압을 따라 통치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진리를 따라 통치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권자-법> 시스템”72)을 넘어 권력의 실효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에 대한 분석론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사법적 모델을 전략적 모델로 대체할 필요성이다. 억압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억압에 맞설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선 한편으로, 권력 메커니즘이 변형되었다. 징수prélèvement ― 이 조작에 관해 푸코는 「마오쩌둥주의자와의 대화」에서 페니 레비에게 주목하라고 촉구했다 ― 는 “권력의 주요형태가 더 이상 아니고, 다른 많은 것들 중 하나이게 되는 경향이 있다.”73)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유순함’ ― 우리의 아첨, 비굴, 결기 부족 ― 은 악(le mal)을 진부하게 만든다. 

 윤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기하자. 푸코는 책상 위에서 권력만 아니라 마차가지로 주체도 묻는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지식의 의지』는 맹목이라는 주제를 공들여 다룬다. 「니체에 관한 강의」 이후의 것이다(다음의 한 구절을 유념하자. “왜 인간은 사물들을 보지 않는가? 인간 자신이 이것을 방해하고 있다. 인간이 사물들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74)). 이 검토élaboration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고찰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관한 논의를 통해 이뤄진다(이 경합agôn에서는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싸우도록 만들어진다. 그리고 주체와 진리는 그 효과이다). 모든 것은 마치, 알튀세르의 예속화 테제를 반박하는 것처럼 읽힐 수 있다(그래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필요할 경우 국가 (억압)장치의 이러저러한 별동대의 개입을 유발하는 나쁜 주체”와 “‘혼자서’ 잘 걷는 주체,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그 구체적 형식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appareils로 실현된다)에 의해 작동되는 (좋은) 주체”75) 사이의 구별은 무엇을 사유하지 못한 채 내버려두는가? 신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 좋은 주체는 “주체들로의 호명, <주체>에로의 예속화, 보편적 승인reconnaissance, 절대적 보증이라는 네 종류의 시스템”76)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이데올로기라는 통념을 사용하지 않고 이런 물음을 어떻게 개진할까?).

 푸코가 마찬가지로 달콤하고 여린 소리로 몰래(Sotto voce) 라캉과 대화했을 수도 있다. 알다시피 푸코는 1969년의 강연에서 사무엘 베켓에게서 정식화를 차용해 하나의 문제를 검토했다. “누가 말하는가는 상관없다. 누군가가 말했다, 누가 말하는가는 상관없다.”77) ― “저자라는 기능fonction-auteur78)의 문제이다. 이런 분석을 전개하는 것은, 그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담론의 유형론”79)에 들어가게, 그리고 “주체의 특권들을 재검증하게”80)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주체에게서 (혹은 그 대리substitut에게서) 근원적 기초라는 역할을 빼앗고, 주체를 담론의 가변적이고 복잡한 기능으로서 분석하기”81) 위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라고 제언한다. “어떻게, 어떤 조건에 따라, 어떤 형식 아래에서, 주체로서의 어떤 것이 담론의 질서에 등장할 수 있을까? 담론의 각 유형 속에서 주체로서의 어떤 것은 어떤 장소를 차지할 수 있고, 어떤 기능을 행사하며, 어떤 규칙에 복종하는가?”82) 한편으로, 이것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 강연을 들은 라캉은83) 1969년부터 1970년의 세미나에서 어떤 짝짓기relation를 제출한다. 욕망의 주체와 인식의 주체라는 관계relation도 아니고,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의 관계도 아니다. ― 따라서 Hd/Sc와 Fd/Oc의 관계가 아니라, 행위자agent/진리와 타자/생산이라는 네 개의 장소를 네 개의 항(S1과 주인기표, S2와 지식, S/과 주체, 와 잉여향락)이 차지하는 관계이다. 이런 항들이 교대로 순환한다[차지하는 장소를 번갈아간다]는 것이 네 개의 담론을 구조를 정의한다. 주인의 담론,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 대학의 담론, 정신분석가의 담론이다. 이것이 예속화의 양태를 설명해준다. 즉, 주체가 자신의 욕망과 맺는 관계의 양상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결국 이들 네 개의 담론을 『진실의 용기』에서 정의된 네 개의 진리진술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특히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의 윤리와 푸코가 말하는 철학의 윤리에 관해 정신분석적 담론과 파르레시아적인 ‘진실-말하기dire-vrai’를 비교하면 무엇을 깨우치게 되는지를 보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라캉과 대화했든 하지 않았든, 푸코도 라캉처럼 다음을 알았다. “말해지는 것이 이해되고 나면, 말한다는 것은 잊힌 채로 머문다Qu'on dise reste oublié derrière ce qui se dit dans ce qui s'entend84)는 것이다. 1977년의 푸코는 무엇이 말해지고 있다고 이해되는가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억제refoulement의 효과에 의해 무의식에 머물러 있는 것에 표시를 하고, 맹목적이게 만드는 맹목적인 임무의 윤곽을 분간하려 한다. 어떤 인터뷰에서 그가 말하길, 『지식의 의지』에는 “증명 기능이 없다.”85) 이 책은 “전주곡prélude과도 같은 것이며 …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어디서 비판 받게 될지, 어디서 몰이해가 생겨날지, 어디로 분노가 쏠릴지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나올 책을, 아무튼, 이 책에 대한 모든 반응을 미리 담아둔perméables 책으로 만들기”86) 위한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더욱이 들을 수 있는 것을 탐구한다. “‘이게 제 생각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제가 무엇을 개진할지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걸 말해도 될까, 그리고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를 보고 싶었습니다. … 이 때문에 이 가설적 담론이 산출한 효과를 대충 훑어보면서en survol 듣고 싶다고 소망했던 것입니다.”87) 푸코는 이렇게, 1977년 7월에 행한 라캉파 분석가들, 전-프롤레타리아좌파 활동가들, 전-감옥정보그룹 활동가들과의 인터뷰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도 또한 머뭇거림이 [새롭게] 생기는 것일까? 당황한 알랭 그로스리샤르Alain Grosrichard는 “당신〔푸코〕이 하고 싶었던 것에 못 미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라며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책들이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에 관해 생각이 바뀐 것입니까?”88) 푸코는 이렇게 답한다. “질문이 [표적을]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이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맙시다. 제 주제가 빗나감을 증명할 테니까요.”89) 대화 상대와 푸코 사이에, 오해는 철저하다. 권력에 관해, 알랭 그로스리샤르는 이렇게 개탄한다.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억압적이거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행사되는 것으로서 이렇게 권력을 표상하는 것이 속임수illusion였다고 생각하세요? … 여하튼, 꽤 끈질긴 속임수이죠. 사람들은 이런 유형의 권력에 맞서 싸워 왔으며, 그렇게 해서 사물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90) 사회계급에 관해, 카트린 미요Catherine Millot는 놀라워한다. “그런데 사회계급은 어떤 역할을 하겠죠?”91)(푸코는 말하기를, “그것이 문제의 중심, 틀림없이 저의 고유한 담론이 가진 모호성이죠. 지배계급은 추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선결 여건도 아닙니다…”92)). 주체에 관해, 자크 알랭 밀러Jacques-Alain Miller는 화를 낸다. “그러나 이론적 장이 아니라, 실천적 장을 논할 때에는 어쩌면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힘관계가 있으며, 투쟁combats이 있습니다. ‘누가 싸우는가. 누구에 맞서 싸우는가’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됩니다. 여기서는 당신도 주체 혹은 어쩌면 주체들의 물음을 외면할 수 없죠”93)(푸코는 말하길, “물론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 관심사이죠. 이로부터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94)) 등.

 『악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다』는 이 점과 관련된다. 이 강의에서는 진리의 표명manifestation과 생산이라는 테마가 또 다시 새롭게 다뤄진다. 인식의 차원에서는, 고백이 증거가 된다. 사건의 차원에서는, 고백은 하나의 시련épreuve이다. 그렇지만 사법진술이 다른 수단들에 의해 계속된 경합(agôn)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루뱅 강의의 유일한 의도propos인 것은 아니다. 이 강의는 진리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쓰기를 일삼는 중립성의 가면 아래에서 “본능, 열정, 날카로운 추궁achamement inquisiteur, 잔혹한 세련, 악의méchanceté 같은 지식의 의지의 형식들과 그 변형들”95)을 찾아낼 수 있게 해준다. 부수적으로, 푸코는 예속화의 물음을, 이 물음이 금시초문이지 않는 형벌의 장으로 옮겨 놓는다. 개인이 어떻게 주체로서 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은, 판별(discrimen)과 범죄(crimen)를 연구하는 학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맡겨진다. “진리에 의한 통치”96)의 물음은 그들에 대해 제기된다. 이 물음은 정치적 물음 ― “개인이 자신에게 행사되는 권력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그 연결을 받아들이는가”97) ― 인 동시에, 인식론적 물음 ― “주체들이 각자가 서약하는 진리진술의 형식 속에서, 또한 그 형식에 의해, 어떻게 실제로 연결되는가”98) ― 이기도 하다.






1) M. Foucault, «Le sujet et le pouvoir»(«The Subject and Power», trad. F. Durand-Bogaert), in H. Dreyfus, P. Rabinow,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p.208-226),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lV, no306, p.223.

2) lbidem.

3) lbidem.

4)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Le pouvoir psychiatrique», Annuaire du. Collège de France, 74( année, Histoire des systèmes de pensée, année 1973-1974, 1974, pp.293-300),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I, no143, p.675.

5) lbidem.

6) M. Foucault, «La vérité et les formes juridiques», p.540.

7) lbidem.

8) lbidem.

9) lbidem.

10) lbidem.

11) Idem, p.552.

12) lbidem.

13) L. Althusser,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Notes pour une recherche)», La Pensée, no151, 1970,

   http://classiques.uqac.ca/contemporains/althusser_louis/ideologie_et_AIE/ideologie_et_AIE.pdf(consulté le 30/10/2011), p.43.

14) lbidem.

15) M. Foucault, «La vérité et les formes juridiques», pp.552-553.

16) L. Althusser,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Notes pour une recherche)», p.37.

17) M. Foucault, «Leçon sur Nietzsche. Comment penser l’histoire de la vérité avec Nietzsche sans s’appuyer sur la vérité»; (conférence prononcée à l’université McGill à Montréal en avril 1971), in M. Foucault, Leçons sur la volonté de savoir, p.203.

18) lbidem.

19) lbidem.

20) lbidem.

21) lbidem.

22) lbidem.

23) lbidem.

24) Idem, p.202.

25) lbidem.

26) lbidem.

27) lbidem.

28)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77.

29) M. Foucault, «Les intellectuels et le pouvoir», p.307.

30)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80.

31) M. Foucault, Leçons sur la volonté de savoir, p.18.

32) lbidem.

33) lbidem.

34)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75.

35) Idem, p.679.

36) lbidem.

37) Idem, p.680.

38) Idem, pp.680-681.

39) Idem, p.686.

40) M.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Paris, Gallimard, 1966.

41)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75

42) Ibidem.

43) M. Foucault, Leçons sur la volonté de savoir, p.19.

44) Ibidem.

45) M. Foucault, «Le jeu de Michel Foucault»(«Le jeu de Michel Foucault», entretien avec O. Colas, A. Grosrichard, G. Le Gaufrey, J. Livi, G. Miller, ) . Miller, ) .-A. Miller, C. Millot, G. Wajeman, Ornicar ' Bulletin périodique du champ freudien, no10, juillet 1977, p. 62-93),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II, no206, p. 3 12.

46) M. Foucault, L’usage des plaisirs, Histoire dela sexualitéfl, Paris, Gallimard, 1984, p. l 1.

47) 사건화 개념에 관해 다음을 참조. M. Foucault," Qu’est-ce que la critique’ [Critique et Aufklarungh p. 47-48.

48) M.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in M. Foucault, L’usage des plaisirs, Feuiller libre joint à l’édition originale.

49) M. Foucault, L’usage des plaisirs, p.ii.

50) M. Foucault, La volonté de savoir, Paris, Gallimard, 1976, p.73.

51) Idem, p.74.

52) 조화법. 이 기술은 샤르코를 넘어서 마르셀 드티엔이 분석한 점술mantique의 몇 가지 형태들을 떠올리게 한다. “왕은 권위의 증거gage이자 도구인 왕홀sceptre을 손에 간직하고 있다. 이 막대기의 힘에 의해 왕은 법령, 정부명령, 판단을 발한다. 그것들은 마치 신탁oracles과 같은 것이다. (M. Detienne, Les maîtres de vérité dam la Grèce antique, Paris, Librairie François Maspero, 1967, rééd. 1971. Cf. pp.42-43.)

53) Idem, p.75, n.1.

54) Idem, p.74.

55) Ibidem.

56) Idem, p.124.

57) M. Foucault, «Les rapports de pouvoir passem à l’intérieur des corps»(«Les rapports de pouvoir passent à l’intérieur des corps», entretien avec L. Finas, La Quinwine littéraire, no247, l"- 15 janvier 1977, pp.4-6),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II, no197, p.228.

58) M. Foucault, «Le pouvoir psychiatrique», p.681.

59) Ibidem.

60) Ibidem.

61) 이 점에 관해 능동적 주체와 수동적 주체를 대립시키는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 후에 진행된 수정에 관련되는 다음을 참조. M. Foucault, «L’éthique du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 (encretien avec H. Becker, R. Fornet-Betancourt, A. GomezMuller, 20 janvier 1984, Concordia. Revis ta inremacional de jilosojia, n · 6,jui/let-décembre 1984, pp.99-116), rééd.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V, no356, p.719. “확실히 예를 들어 미친 주체의 구성은 강제를 행하는 시스템의 결과 …로 간주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미친 주체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닙니다. 또한 정신병환자가 미친 주체로서 구성되는 것은 그 사람을 미쳤다고 선언하는 자와의 관계에서 그 인물을 앞에 둔 것입니다. 정신의학사 속에서, 그리고 19세기의 수용소 세계 속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히스테리입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주체가 어떻게 미친 주체로서 자신을 구성하는가를 멋지게 예증합니다. 그리고 히스테리라는 현상이 대규모로 관찰된 장소가 강제가 가장 엄격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광인으로서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장소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본고의 관심에서 보면, 이 계속된 이야기를 강조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대조적으로, 현재의 내가, 자기의 실천에 의해 주체가 어떻게 능동적으로 자기를 구성하는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의 실천은 개인이 스스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문화 속에서 발견하는 도식이며, 문화나 사회나 사회집단이 도전받거나 부과되는 도식인 것입니다.” 사회학에서 ‘사회화’라고 불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 푸코가 지적하는 것은, 가령 단순히 히스테리에 있어서, 어떻게 해서 “주체가 광기 주체로서 구성되는”가를 검증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과 나란히 주체가 미치지 않은 주체로서 구성되는 방식도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성찰』로의 회귀. 즉, 『광기의 역사』 초판 서문 및 제2장 서두에서 이미 보이는 테마가 여기서 반복되고 있다(Folie et Déraison. Histoire de lafolie à l’âge classique, Paris, Pion, 196 1, p. l-Xlet p. 54-57). 1981년, 푸코는 앙드레 베르탕에게 이렇게 말한다. “[루드비히] 빈스방거나 [롤란트] 퀸의 작업이 보여주듯이, 미친 사람의 의식을 빼놓지 않고 모조리 기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광기의 경험의 문화적 및 사회적 구조화가 없을까요? 그것을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요?”(M , Foucault, «Entret ien de Michel Foucault avec André Berten»(7 mai 1981), op. cit, p.237.) 푸코의 작업의 도처에서 이 물음은 또 다른 물음과 연결된다. ― 이성경험의 분할적 및 사회적 구조화가 없는가, 그것을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62) M. Foucault, «Les rapports de pouvoir passent à l’intérieur des corps», p.228.

63) Ibidem.

64) Ibidem.

65) Ibidem.

66) Ibidem.

67) M. Foucault, L’usage des plaisirs, p.10.

68) Idem, p.11

69) Ibidem.

70) Idem, p.12.

71) M. Foucault, «Les mailles du pouvoir»(«As malhas do poder», trad. P. W Prado Jr., conférence prononcée à la faculté de philosophie de l’université de Bahia, 1976, Barbarie, no4, été 1981, pp.23-27),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IV, no297, p.198.

72) M. Foucault, La volonté de savoir, p.128.

73) Idem, p.179.

74) M. Foucault, «Leçon sur Nietzsche. Commem penser l’histoire de la vérité avec Nietzsche sans s’appuyer sur la vérité», p.199.

75) L. Althusser,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Notes pour une recherche)», p.56.

76) Ibidem.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 및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덧붙여, 보증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데카르트의 『성찰』, 그리고 데카르트적 주체를 둘러싼 푸코와 자크 데리다의 논쟁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Supra pp.159-160, n. 59.

77) M. Foucault, «Qu’est-ce qu’un auteur?»(«Qu’est-ce qu’un auteur?»),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63e année, no3, juill et septembre 1969, pp.73-104), in M. Foucault, Dits et écrits, l , no69, p.792.

78) Idem, p.803.

79) Idem, p.810.

80) Ibidem.

81) Idem, p.811.

82) Idem, pp.810-811.

83) 라캉의 발언은 다음에 채록되어 있다. M. Foucault, «Qu’est-ce qu’un auteur?», p.820.

84) J. Lacan, «L’Étourdit», Scilicet, 4, 1972, pp.5-25, reproduit in. Lacan, Autres Écrits, Paris, Seuil, p.449.

85) M. Foucault, «Les rappons de pouvoir passent à l’intérieur des corps», p.236.

86) Ibidem,

87) M. Foucault, «Le jeu de Michel Foucault», p.298.

88) Idem, p.300.

89) Ibidem,

90) Idem, p.304.

91) Idem, p.306

92) Ibidem,

93) Idem, p.310.

94) Ibidem,

95) M. Foucault,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 Hommage à jean Hyppolite, Paris, P.U.F., coll. Prométhée, 1971, pp.145-172), Dits et écrits, II, no84, p.155.

96) M. Foucault, «Conférence inaugurale», supra, p. 13.

97) Idem, p.8.

98) Idem,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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