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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 (15)
주거권 투쟁 ‘알파벳 시티’…주거난 현실이 소환한 ‘저항의 기억’
황은주 |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뉴욕의 젠트리피케이션
뉴욕 맨해튼의 남동쪽, 이스트 빌리지 안에 ‘알파벳 시티’라 부르는 동네가 있다. 19세기부터 노동운동과 집회, 폭동의 중심이 된 톰킨스 광장(Tomkins Square) 공원을 끼고 애비뉴 A부터 애비뉴 D까지, 그리고 하우스턴가에서 14번가 사이에 위치한 2㎢ 남짓한 곳이다. 1980년대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면서 노숙인과 불법점유자를 비롯한 주거 취약계층 및 모든 시민의 주거권을 옹호하는 활동가들이 주거권을 지키기 위해 2000년대 들어서까지 긴 싸움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역사가 비록 지엽적일지라도 우리는 이 투쟁의 역사가 남긴 교훈에 귀 기울여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소득 감소와 실직으로 벼랑에 몰린 하층계급의 주거권 문제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한계를 일깨우고,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불붙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경찰-자본-권력의 폭력에 대한 저항적 헤게모니의 기억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까지 이민자 거주
히피 저항문화 중심지로도 유명
1970∼80년대 백인들 떠난 뒤엔
남은 주민·활동가들 자생적 생활
‘알파벳 시티’라 불리는 이곳은 여러 개의 명칭을 갖고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로어이스트사이드(Lower East Side)라고 부르는 이민 노동자의 주거구역이었다. 1960년대에 히피 저항문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근처의 웨스트 빌리지와 그리니치 빌리지에 견주어 ‘이스트 빌리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동네에서 가난한 이민노동자들의 이미지를 지우기 원했던 부동산업자와 개발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름이 되었다. 1950년대에 백인들이 교외로 떠나고 남은 자리를 채운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주민들은 이곳을 자기 식으로 발음해 ‘로이사이다(Loisaida)’라고 불렀다.
1970년대에는 자본이 도심에 대한 투자를 회수하면서 집주인들이 건물을 유기하거나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건물에 몰래 불을 놓는 일이 많았다. 또 뉴욕시가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치안과 소방 예산을 축소하자 이곳은 삽시간에 범죄와 마약의 온상지가 되었다. 그래도 버려진 동네에 남은 라틴계 주민과 불법점유자들, 그리고 활동가들이 자본주의의 횡포에 맞서 이곳을 지켰다. 그들은 커뮤니티 가든을 일구고, 주민센터를 만들고, 전기와 수도, 난방이 끊긴 채 허물어져 가는 건물을 보수하면서 척박한 토양에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알파벳 시티’는 사실 가장 늦게 나타난 명칭으로 1980년대 초에 서서히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될 무렵, 종전의 마약과 범죄로 점철된 이미지를 벗고자 알파벳순으로 정한 거리 명칭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백인들이 버리고 간 도심을 지킨 ‘로이사이다’의 주민들에게 이 이름은 낯설고 불온한 것이었다(이 글에서는 이곳을 ‘로이사이다’라고 부르겠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곳은 유럽에서 갓 건너온 이민노동자들이 살던 테너먼트라 부르는 좁고 어둡고 비위생적인 공동주택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이 살던 동네인 만큼 경기가 나빠질 때마다 크고 작은 폭동이 있어났다. 1873년의 경제위기로 살기 어려워지자, 1874년 1월 7000여명의 이민노동자들이 톰킨스 광장에 모여 일자리와 식량, 그리고 실직자의 퇴거 중단을 요구했다. 이에 말을 탄 경찰들이 광장의 출구를 차단하고 몽둥이를 마구 휘둘러 이들을 제압함으로써 군중으로 하여금 경찰이 누구의 편인지 확실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폭동 이후, 시 정부는 대규모의 민중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집회 공간인 광장을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시 정부는 1879년부터 뉴욕에 무장경찰과 군대를 배치해 만약의 사태에 폭력으로 대응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100년이 넘게 지난 1988년, 톰킨스 광장 공원 폭동은 경찰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민중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1980년대에 여피(Young Urban Professionals) 인구가 늘어나고 집세가 계속해서 오르는 등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었다.
시 정부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박차를 가할 목적으로, 야간 공원 이용을 금지하며 노숙인들을 공원에서 쫓아내고자 했고, 이에 노숙인과 주민이 연대해 “젠트리피케이션은 계급전쟁”이라고 외치며 항의했다. 이 과정에 경찰이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 대중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여론에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야간에 공원을 폐쇄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결국 1991년 시 정부는 공원 폐쇄를 강행하고 근처 공터에 세운 노숙인들의 임시거처도 모두 철거했다.
생존 위한 대규모 집회·폭동 잦아
시 정부선 폐쇄·강제 철거 등 강행
시, 저항에 무상임대 중재안 회유
빚더미 주민들은 투쟁 결의 ‘실종’
1995년 5월 이스트 13번가에 있는 세 개의 스쾃(squats·불법점유 건물)에서 주민을 강제로 쫓아내던 날에는 경찰이 헬리콥터와 탱크를 앞세워 시위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군홧발로 집에 쳐들어가 모든 것을 짓밟았다. 그밖에 원인 모를 화재와 철거로 많은 불법점유 건물들이 사라졌지만 주민들은 철거팀과 무장경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그들이 끝까지 남아 지킨 열 개의 불법점유 건물은 2003년 뉴욕시가 명목상 각 건물마다 1달러만을 받고 당시 시 정부와 불법점유자들 사이를 중재하던 비영리기관 ‘도시자립주거지원위원회(UHAB)’에 팔면서 드디어 합법화되었다.
시가 거의 무료로 건물을 제공하는 대신 주민들이 은행에서 융자를 받고 전문 인력의 도움을 받아서 안전기준을 통과할 만큼 건물을 완벽하게 보수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주민들이 긴 투쟁의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집주인이 되는 동시에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젠트리피케이션으로부터 동네를 지키겠다는 투쟁의 결의도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무장경찰이 할 수 없던 일을 결국 은행 빚이 해냈다. 불법거주자들은 합법적으로 집주인이 되는 동시에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었고, 시 정부는 마침내 젠트리피케이션의 목적을 이뤘다.
2020년 1월 방문한 로이사이다는 젠트리피케이션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 듯해 보였다. 아직 이곳저곳에 그라피티가 있고, 노숙인이 한두 명 눈에 띄고, 커뮤니티 가든과 ‘되찾은 도시 공간 박물관’(Museum of Reclaimed Urban Space·MoRUS), 뉴요리칸(Nuyorican·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뉴요커) 시인 카페 등이 남아 있었지만, 거리는 깨끗하고 안전했으며, 특히 톰킨스 광장 공원 주변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인 크리스토도라 하우스가 우뚝 솟아있고, 개성 있는 식당과 술집은 손님들로 붐볐다. 노숙인들의 ‘텐트로 만든 도시(Tent City)’와 함께 펑크족들이 애용하던 야외무대가 있었던 공원에서 그들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안전하게 펜스가 쳐진 잔디밭에서 강아지들이 뛰놀고 있었다. 노숙인이 공원 벤치에 누워 잘 수 없도록 벤치 가운데에 팔걸이를 만드는 알뜰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한 장소에서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더불어 그곳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거나 왜곡되기 마련이다. 하층계급과 주거취약계층이 톰킨스 광장 공원 주변의 주거권을 두고 벌였던 투쟁의 역사, 자본주의 논리를 벗어난 대안적 주거 방식을 추구한 사람들, 그리고 경찰이 19세기와 20세기에 한결같이 자본과 권력의 이익을 위해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과거에 대한 기억은 미래를 담보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코로나19가 번지면서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집세를 내지 못해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국회, 주 정부, 지방자치단체, 주택도시개발부가 나서서 강제 퇴거를 금지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적 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집세 탕감(Cancel Rent) 운동과 ‘경찰에 대한 예산을 대폭 축소해 민생을 도모하자(Defund the Police)’는 정치적 움직임은 인간의 기본권을 어떻게 돈의 지배에서 해방시킬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해결 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로이사이다의 기억이 태평양을 건너 부동산 투기와 악전고투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기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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